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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59. 1. 25, 에도[江戶:지금의 도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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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29. 6. 14, 에도 |
국적 | 일본 |
요약 간세이 개혁[寬政改革]을 실시한 일본의 정치가.
간세이 개혁은 1603년부터 집권한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의 거대한 지배력을 회복해 일본의 부흥을 꾀한 보수적인 성격의 재정 및 사회개혁이었다.
전통적으로 역사가들은 마쓰다이라의 개혁을 높이 평가해왔지만, 지금은 이 개혁이 시대에 뒤떨어진 제도를 부활하려 했던 부질없는 시도이며, 이미 일본 사회에서 일고 있던 정치체제의 변혁과 개선의 움직임에 역행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마쓰다이라는 도쿠가와 바쿠후의 제8대 쇼군[將軍]인 요시무네[吉宗]의 손자로서, 한때 쇼군의 후계자로 부상하기도 했다. 일찍이 학문을 사랑하고 지능을 발휘했던 그는 쇼군의 직접 통치권 밖에 있는 주요영지인 시라카와 한[白河藩]의 한슈[藩主]인 마쓰다이라 사다쿠니[松平定邦]의 양자가 되었으며 1783년 가문을 계승해 한슈가 되어 재정과 행정조직을 재정비하는 데 힘썼다.
1786년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德川家治]가 죽은 뒤에는 도쿠가와 이에나리[德川家齊 :1787~1837 재위]를 쇼군에 옹립하는 데 영향력을 행사했다. 새 정부에 등용되어 12세기 중국 송대 주희의 주자학에 바탕을 둔 반상업주의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당시 무역과 산업발전을 장려했던 로주[老中:쇼군 직속의 최고 관직] 다누마 오키쓰구[田沼意次]의 정책과 비교되었다.
마쓰다이라는 부패정치로 악명높던 다누마를 제거한 뒤 로주가 되었다. 로주로서 그는 이학을 금지·탄압했으며, 수많은 부패관리를 제거하고 시험을 통해 새로운 관리들을 등용했다. 또한 대외무역을 통제하고 상인계급의 성장을 엄격히 제한해 전통적 농업경제를 강화하는 한편, 야심적인 경제계획으로 재정낭비를 최소화하려 했다. 그의 정책은 정부의 재정적 어려움을 어느 정도 해결해주었으며 기근 해소 대책으로 농민들의 심각한 동요를 진정시켰으나, 결국 이러한 효과들은 일시적인 것으로 끝나버렸다.
1793년 쇼군과의 사소한 정책 논쟁으로 로주직에서 물러나 유학 연구와 저술에 몰두한 그는 유교적인 지배자의 모범으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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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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