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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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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라티움(지금의 이탈리아에 있음) 아르피눔(아르피노) 근처 케레아타이, BC 157경
사망 BC 86. 1. 13, 로마
국적 로마

요약 군사적으로 성공한 인물이 자신의 옛 군대 병사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얼마만큼의 정치적 성공을 거둘 수 있는가를 실증한 최초의 로마인이었다. BC 119년 호민관이 되었고, BC 115년 프라이토르(법무관)에 선출되었다. 다음해 원 스페인 지방을 통치하면서 광산에 투자하여 막대한 재산을 축적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BC 108년 콘술로 선출되었고, 메텔루스의 후임으로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아프리카에서 줄곧 유구르타를 패주시켰고, BC 102년 아쿠이 섹스티이에서 테우토네스족을 패배시켰다. BC 87년 술라가 그리스에서 한창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콘술인 킨나가 해임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이 틈에 군대를 모아 킨나와 합세하여 로마를 점령했다. BC 86년 콘술로 선출되어 원로원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지만 병세 악화로 사망했다.

마리우스(Gaius Mar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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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군사적으로 성공한 인물이 자신의 옛 군대 병사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얼마만큼의 정치적 성공을 거둘 수 있는가를 실증한 최초의 로마인이었다.

초기경력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힘세고 용감한 군인이며 능숙한 지휘관으로서 부하들에게 인기가 높았으나, 정치에는 거의 재능이 없었고 훌륭한 대중연설가도 되지 못했다.

에퀴테스(기사계급) 출신인 그는 상류계급의 필수교양인 그리스어 실력도 갖추지 못했다. 그는 미신을 믿었고 지나친 야심가였으며, 대단한 군사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에게 인정받지 못하자 열등감에 시달렸다. 결국 이로 인해 심한 시기심과 보복적인 잔혹성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젊은 장교로서 유구르타(뒤에 누미디아 왕)와 함께 BC 134년 스페인에서 벌어진 누만틴 전쟁에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참모진으로 참가한 그는 유구르타와 마찬가지로 자기 사령관에게 특출한 인상을 주었다.

마리우스의 가문은 여러 귀족가문의 후원을 받았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당시 최고의 정치적 권세를 누리고 있던 뛰어나고 오만한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가문은 BC 119년 그가 평민 호민관에 입후보하도록 밀어주었다. 호민관이 된 뒤 마리우스는 선거와 민회에서 투표자들이 투표용 서판을 기입하고 제출할 때 통과하도록 되어 있는 연결통로를 좁히는 투표절차 변경 법안을 제안했다.

이전에는 통로에서 참관을 하면서 자신들의 지위를 악용해 개개인의 투표에 영향을 미치던 귀족계급의 투표 개입의 여지를 없애고자 한 것이었다. 콘술 2명이 원로원을 설득해 그 법안을 저지시키려고 나서자 마리우스는 그들을 감금시키겠다고 위협함으로써 법안을 통과시켰다.

마리우스는 자기 주관 없이 무조건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입후보자는 아니었던 듯하다.

그는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곡물(穀物) 법안을 거부했으며 그 이래로 수년 간은 그다지 출세할 가망이 없었다. 그는 아이딜리스[造營官:시장과 경찰을 통솔하던 직책]가 되려다 실패했고 BC 115년에 겨우 프라이토르(법무관)에 선출되었다. 이때 그는 프라이토르가 되기 위해 막대한 뇌물을 썼으나 요행히도 이 일로 법정에서 처벌받는 것은 모면했다. 다음해에 그는 원(遠)스페인 지방을 통치하면서 산적들을 물리쳤으며 광산에 투자하여 막대한 재산을 축적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그뒤 그는 다시 세도가문으로 발돋움하는 귀족가문 출신의 여자와 결혼하는 행운을 잡았다. 그의 부인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고모 율리아였다.

콘술 선출

그당시 누미디아 왕이 된 유구르타와 로마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면서 퀸투스 메텔루스가 사령관직을 맡자 마리우스는 메텔루스의 참모진으로 초빙되었다.

메텔루스는 유구르타와의 정면전에서 그를 패배시켰으나 이후 유격전에서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는데, 마리우스는 BC 108년말 콘술에 출마하기 위해 로마에 돌아와 대중연설을 할 때 메텔루스의 이같은 실패를 과장해서 비난했다. 마리우스는 에퀴테스와 평민계급의 지지를 얻어 콘술로 선출되었고, 메텔루스로서는 분통이 터질 일이지만 마리우스는 법안에 의해 즉각 메텔루스의 후임으로 아프리카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새로 병력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마리우스는 관례를 깨고 이전에 유산(有産) 계급에게만 허용했던 군복무를 그밖의 지원자들에게도 허용했다.

아프리카에서 그는 줄곧 유구르타를 패주시켰으며 BC 105년에 유구르타는 동맹자인 마우레타니아 왕 보쿠스의 배신으로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유구르타를 생포한 것은 마리우스가 아니라 콰이스토르(재무관) 자격으로 BC 107년 마리우스의 참모진에 가담했던 평판이 별로 좋지 않은 젊은 귀족 술라였다. 술라는 이 공적을 자신의 문장(紋章)에 새겨넣게 함으로써 마리우스의 시기를 샀다.

그러나 승리는 마리우스의 것이었다.

BC 104년초에 그는 개선식을 벌였고 유구르타는 처형당했다. 그해 다시 콘술에 선출된 마리우스는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의 침공을 막아내기 위한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은 북방에서 로마 군대를 연속적으로 격파한 바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BC 105년에 다시 로마인들에게 불명예를 안겨주었었다. 이 전쟁을 위해 마리우스는 루틸리우스 루푸스(BC 105년에 콘술을 지냄)가 양성한 신예 병력을 이용했는데 이들은 검투사 교관들에게 특공전술을 능숙하게 훈련받은 병력이었다.

이 병력을 이끌고 마리우스는 BC 102년 아쿠이 섹스티이(지금의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에서 테우토네스족을 패배시켰으며, BC 101년에는 심각한 궁지에 몰려 있던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BC 102년에 콘술을 지냄)를 지원하러 갔다. 두 사람은 포 강(江) 유역에 있는 오늘날의 로비고 부근 베르켈라이에서 킴브리족을 패배시켰고 이로써 위기는 일단락되었다. 이때가 마리우스의 성공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다.

그는 BC 104년 이래 해마다 콘술을 지냈고 BC 100년에도 다시 콘술로 선출되었다. 그는 카툴루스와 공동으로 개선식을 가졌으나 둘 사이의 감정은 이미 나빠져 있었다. 마리우스는 승리가 모두 자신의 공이라고 주장했으나 카툴루스와 술라는 그들의 회상록에서 그것에 대해 전혀 다르게 설명했다.

마리우스는 항상 에퀴테스의 지지를 받았는데 이는 그가 에퀴테스 출신일 뿐 아니라 교역에 방해가 되는 전쟁을 나서서 마무리지었기 때문이었다.

로마 평민들은 그가 귀족이 아니기 때문에 그를 좋아했다. 그는 또한 자기 부대 병사들에게서도 지지를 받았는데 부대 지휘관인 마리우스와 긴밀하게 손잡는 것이 그들에게도 이익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리우스는 아마도 이들이 가진 잠재력을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점에서 병사들의 잠재력을 이용해 엄청난 성과를 거둔 술라·카이사르·옥타비아누스와 대조가 된다.

실각

BC 100년은 마리우스가 정치가로서 참담한 실패를 겪은 해였다.

당시 사투르니누스는 호민관에 재선되었고 글라우키아는 프라이토르였다. 현존하는 자료가 빈약하기 때문에 그들이 가졌던 정치적 목표라든가 마리우스와 그들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있다. 이 세 사람은 똑같이 메텔루스를 증오하고 있었는데, 그는 BC 102년 켄소르(감찰관)를 지내면서 사투르니누스와 글라우키아를 원로원에서 몰아내려고 했다. BC 103년 사투르니누스는 퇴역병사들의 아프리카 정착을 위한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안은 명백히 마리우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었다.

로마 평민들은 이 조치에 반대했기 때문에 명백히 사회적 혼란이 예견되는 상황이었으므로 사투르니누스는 북방의 킴브리 영토를 그 지역에 사는 로마인들과 나아가 이탈리아인들에게 분배하고, 동맹군을 포함한 퇴역군인들을 해외 식민지에 정착시키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법안을 도입했다. 이 법안은 또한 마리우스에게 퇴역군인들의 정착을 관할하는 막강한 권한(각 식민지의 새로운 정착자들에게 일정수의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권한)을 주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마리우스는 이미 BC 101년 킴브리족과 맞서 싸우던 자기 휘하의 이탈리아인(카메르테스족) 2개 보병대에게 전장에서 시민권을 부여함으로써 법을 어기고 있었기 때문에 사투르니누스와 마리우스는 새로운 식민지 정착을 계기로 이탈리아인들에게 폭넓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계획에 합의했던 것 같다.

그러나 뒤이어 둘 사이에 균열이 생겼으며, 이는 아마도 마리우스가 시기하는 마음에서 사투르니누스가 자신의 공을 가로챈다고 느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사투르니누스의 무법(無法)한 행동이 마리우스의 자존심에 거슬릴 정도에 이르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먼저 토지분배와 식민지 정착에 관한 법안이 통과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뚜렷한 불법이 저질러졌다.

원로원 의원들은 법안 통과 후 그것을 준수하겠다는 선서를 5일 이내에 하도록 되어 있었다. 마리우스는 오해받을 소지가 많은 진술을 한 뒤 선서를 했다. 그러나 메텔루스는 법안통과 과정을 문제삼아 선서를 거부했고, 반역재판에 회부당할 것을 예상해 그리스로 도망쳤으며 그뒤 정식으로 추방당했다. BC 99년 호민관 선거에서 사투르니누스는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아들임을 주장하던 사칭자(이를 믿는 사람은 없었음)와 함께 재선되었다.

글라우키아가 후보로 나선 콘술 선거에서는 웅변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선출되었고 대중적 인기가 높았던 가이우스 멤미우스는 살해당했다. 뒤이어 대혼란이 일어났으며, 원로원은 콘술들에게 구국(救國)의 조치를 요구하는 '최후의 포고령'을 통과시켰다. 마리우스의 활약으로 사투르니누스와 글라우키아는 카피톨리누스 신전에서 붙잡혀 원로원에 감금되었으나, 한 무리의 군중들이 원로원의 지붕을 뜯고 그들을 돌로 쳐서 죽였다. 이는 마리우스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이 일로 인해 그는 적들뿐만 아니라 친구까지도 배신한 인물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말년

추방당한 메텔루스의 귀환이 필연적이었기 때문에 마리우스는 BC 99년 동방으로 가서 폰투스 왕 미트라다테스 6세를 만났다.

그는 아우구르[卜占官]로 선출되었으나 BC 97년 현명하게도 켄소르 후보직을 사퇴했다. 그는 갈등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BC 90년대의 정치상황 속에서 배후인물로 활동했으며, BC 95년에는 이전 사투르니누스의 식민지 정착법안에 따라 부여했던 시민권을 박탈하려는 움직임(법안 자체는 미결상태로 있었음)이 있자 그를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BC 92년 자신의 옛 동료 루틸리우스 루푸스가 아시아에서 통치를 잘못했다는(사실은 모범행정관이었음) 이유로 고발당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마리우스는 그의 편을 들기는커녕 판결을 지지했다.

마리우스는 이제 나이의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BC 90년 이탈리아 반란(동맹시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군인으로서 그보다 훨씬 하급자인 콘술 루틸리우스 루푸스의 지휘 아래 참전했다. BC 88년 호민관 술피키우스 루푸스가 마리우스만이 그같이 중요한 전쟁을 지휘할 경험이 있다는 이유로 아시아의 군사지휘권을 당시의 콘술인 술라에게서 마리우스에게로 넘길 것을 제안했을 때 로마에서는 술라에 대한 대중의 격렬한 반대가 일어났다.

그러나 술라는 캄파니아로 가서 자기 군대를 이끌고 다시 로마로 진격해 들어왔다. 술피키우스의 조치는 취소되었고 마리우스는 추방당했다.

몇 차례 연이은 파국(이야기 속에서는 모두 그럴 듯하게 윤색되어 있음)에 가까운 상황을 겪고 나서 마리우스는 안전하게 아프리카로 피신했다. BC 87년 술라가 그리스에서 한창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로마에서 계속되던 무질서는 결국 콘술인 킨나가 해임되는 사태로 이어졌다.

이 틈에 마리우스는 에트루리아에 상륙해 군대를 모은 뒤 오스티아를 약탈하고 킨나와 합세하여 로마를 점령했다. 마리우스와 킨나는 모두 BC 86년 콘술로 선출되었으며 마리우스에게는 그것이 7번째였다. 마리우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푸블리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등 자신에게 배신적인 행동을 했다고 여겨지는 모든 유명인사들에게 처형 명령을 내렸으며, 이후 끔찍한 학살이 뒤따랐다. 이때 그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BC 86년 그가 죽자 그의 적과 친구를 비롯해 모두가 그의 죽음을 천행(天幸)으로 여겼다.

마리우스의 외아들은 BC 82년에 콘술이 되어 술라와 맞서 싸우다 죽었다. 그의 부인은 BC 69년까지 살았고, 여성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조카인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그녀의 장례식에 애도의 연설을 바치는 영광을 누렸다. 카이사르는 뒤에 술라가 철거했던 마리우스의 승전기념비를 이후 카피톨리누스 신전에 복원시켜 커다란 인기를 얻었다. 아프리카의 두 정착촌 우키마유스와 티바리스를 비롯해 코르시카의 한 식민지를 지칭하는 이름인 마리아나와, 론 강에 마리우스의 병사들이 판 운하 포사마리아나는 모두 마리우스를 기념해 붙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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