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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투르니누스

다른 표기 언어 Lucius Appuleius Saturninus
요약 테이블
출생 미상
사망 BC 100
국적 로마

요약 고대 로마의 정치가.

가이우스 세르빌리우스 글라우키아와 함께 BC 104~100년 원로원에 맞섰다. 처음에는 가이우스 마리우스도 이들에게 협력했다. 사투르니누스는 BC 104년 직전에 콰이스토르(재무관)였다.

BC 103년 호민관이 된 그는 매달 정부에서 배급하는 곡물 가격을 과감하게 낮추는 법률을 통해 로마 노동자 계급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그는 반역죄를 재판하는 최초의 상설재판소를 세우고, 유구르타 전쟁(BC 111~105)이 끝난 뒤 제대한 마리우스의 부하 병사들에게 아프리카에서 새로 얻은 토지를 무상으로 할당했는데 그 불하 면적이 1인당 0.24㎢를 넘었다. BC 102년 2명의 보수적인 켄소르(감찰관)가 사투르니누스와 글라우키아를 원로원에서 추방하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듬해 사투르니누스는 사형당할 수도 있는 중죄로 기소되었지만 에퀴테스(기사계급)의 지지 덕분에 혐의를 벗었다. 그가 에퀴테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글라우키아가 법령을 제정해 상설재판소의 배심원단을 구성할 수 있는 배타적 권리를 에퀴테스에게 되돌려주었기 때문이다.

BC 100년에 사투르니누스는 다시 호민관이 되었고, 마리우스는 6번째로 콘술(집정관)이 되었으며, 글라우키아는 프라이토르가 되었다. 사투르니누스가 킴브리 전쟁이 끝난 뒤 제대한 마리우스의 병사들에게 알프스 산맥 북쪽에 있는 갈리아 지방의 땅을 무상으로 할당할 것과 다른 퇴역병들을 위해 시칠리아와 마케도니아 및 아카이아에 로마 식민지를 건설하자고 제안하자, 이 법률안의 통과를 둘러싸고 소동이 벌어졌다. 사투르니누스는 BC 99년 호민관으로 재선되었지만 그의 급진적인 정책의 위험성을 깨닫게 된 마리우스는 그와 결별했다.

글라우키아는 콘술 선거에 입후보하려 했지만 입후보 자체가 허용되지 않았고, 후보 가운데 한 사람이 살해되는 바람에 콘술 선거는 혼란 속에서 무산되었다. 사투르니누스와 글라우키아는 추종자들과 함께 카피톨리누스 언덕을 점령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마리우스에게 질서를 잡으라고 요구했다. 사투르니누스와 글라우키아는 결국 마리우스에게 항복했고 마리우스는 그들을 원로원에 감금했다. 그러자 적들이 원로원 지붕을 뚫고 들어가 그들을 돌로 쳐죽였다. 사투르니누스가 죽은 뒤, 원로원은 그의 급진적 법률을 거의 모두 폐지했다. 오늘날 남아 있는 사투르니누스에 대한 설명은 그에게 적대적인 자료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가 정직성과 정치적 수완이 부족했던 것은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그는 자신이 본보기로 삼은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보다 뒤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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