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1621~30년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자들은 루벤스를 외교관으로 삼았다.
그는 우아한 태도를 지녔을 뿐 아니라 유럽의 주요 정치가 및 지식인들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대리인으로는 이상적인 존재였다. 게다가 그는 화가였기 때문에 비밀외교관이나 관찰자 역할도 종종 해낼 수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맡은 중요한 외교임무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다스리는 플랑드르 지역과 북쪽의 네덜란드 공화국 사이에 맺어진 12년휴전조약(1609~21)을 재교섭하려는 스페인 및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노력과 관련된 것이었다.
플랑드르 섭정인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 왕가의 알베르트 대공은 휴전협정 연장을 아내에게 맡기고 1621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미망인인 이사벨라 공주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속하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딸이었다. 루벤스는 이사벨라 공주의 조언자가 되어 네덜란드 공화국과의 관계를 조정하려고 애썼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네덜란드에서 신교도가 우세한 네덜란드 공화국과 로마 가톨릭 교도가 우세한 플랑드르 사이에 다시 전쟁이 일어나 루벤스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1622년초에 프랑스 앙리 4세의 미망인이자 왕위를 이은 루이 13세의 어머니인 메디치가(家)의 마리가 루벤스를 파리로 불렀다.
피렌체 출신의 이 왕비는 1600년에 피렌체에서 대리인을 내세워 결혼할 당시에 그 결혼식에 참석했던 루벤스를 다시 불러들여 새로 지은 뤽상부르 궁전에 있는 2개의 기다란 회랑을 장식할 2가지의 연작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21점으로 이루어진 일련의 그림들은 마리의 일생을 표현한 것으로서, 오늘날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다. 앙리 4세의 일생을 다룰 계획이었던 또 다른 연작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루벤스는 6주일 동안 어떤 그림을 어떤 순서로 배열할 것인가를 토론하여 결정한 뒤 안트웨르펜으로 돌아와, 종교와 무관한 작업 가운데 예술적으로 가장 중요한 이 일에 2년 동안 몰두했다.
루벤스가 주문받은 그림들을 걸기 위해 1625년에 파리로 돌아왔을 때는 궁정의 정치적 분위기가 이미 바뀌어 있었다. 스페인과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우호적이었던 프랑스는 1624년 이전에 네덜란드 공화국과 덴마크 및 영국과 조약을 맺었는데, 이 나라들은 모두 합스부르크 왕가에 적대적이었다.
프랑스가 이런 나라들과 새로 동맹을 맺은 것은 젊은 루이 13세의 강력한 조언자인 리셜리외 추기경의 영향력 때문이었다. 의심할 이유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추기경은 루벤스가 두번째로 파리에 머무는 동안에는 예술가로서의 역할보다 첩자노릇을 더 할 것이라고 의심했다. 루벤스가 영국 국왕 찰스 1세의 총애를 받는 버킹엄 공작과 자주 어울린 것은 더 많은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 버킹엄 공작은 메디치가의 마리와 앙리 4세의 막내딸인 앙리에타 마리아 공주와 찰스 1세의 대리결혼을 위해 파리에 와 있었다.
공작은 탐욕스러운 미술품 수집가였다. 파리에서 루벤스에게 초상화를 의뢰한 공작은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을 그려달라고 주문했고, 몇 점의 그림과 함께 화가가 소장하고 있는 유명한 골동품을 사들였다. 루벤스가 골동품을 판 것은 돈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버킹엄의 호의를 잃지 않으려는 외교적 행동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프랑스에서 버킹엄 공작과 사귀는 동안 루벤스는 영국이 네덜란드 공화국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스페인령 네덜란드와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것을 공작에게 납득시키려고 애썼다.
그러나 버킹엄은 그 당시 영국과 스페인 사이의 전쟁을 유발시키는 일에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루벤스에게 분명한 태도를 밝히지 않았다.
버킹엄이 죽자 루벤스가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위해 평화조약 협상을 시도할 수 있는 길이 다시 열렸다. 그러나 불행히도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는 장관인 올리바레스 대공의 설득에 넘어가 로마 가톨릭 신앙을 위해 영국을 다시 침공하기로 프랑스와 밀약을 맺었다. 1628년에 루벤스는 비밀리에 급히 마드리드로 달려갔다.
루벤스는 마드리드에 9개월 동안 머물면서 영국과 싸우지 말고 평화조약을 맺으라고 간청하는 한편, 왕의 초상화들을 그렸다. 결국 펠리페 4세는 그를 적당한 칙사로 인정하고, 스페인령 네덜란드 추밀원장으로 임명하여 특별한 평화사절의 임무를 띠고 영국에 갈 수 있게 해 주었다. 그가 브뤼셀에 도착하자 그의 임무를 훨씬 더 절박하고 어렵게 만든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1629년 4월 24일 영국이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던 것이다. 영국의 찰스 1세는 대사를 교환하는 형식적인 절차를 보류한 채, 직접 사람을 보내여 루벤스를 데려오게 하였다.
1630년에 영국과 스페인이 평화조약을 맺은 것은 주로 루벤스 개인의 공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기사작위를 받았고,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왕은 그에게 궁정 건축가인 이니고 존스가 화이트홀 궁전의 일부로 설계한 왕실연회장(1619~22)을 장식할 천장화를 주문했다. 1634년에 완성된 9점의 거대한 천장화는 찰스 1세의 아버지인 제임스 1세의 통치를 우의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화가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
백과사전 본문 인쇄하기 레이어
[Daum백과] 루벤스의 외교관 시절 – 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