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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로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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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138. 1. 25, 로마 |
요약
대립교황(1130~38 재위).
본명은 Pietro Pierleoni.
교황 인노첸시오 2세에 대항해서 교황권을 주장했으며, 오늘날까지도 일부 학자들은 이 주장을 지지한다. 파리에서 공부한 뒤 클뤼니에서 수사가 되었고, 1116년 교황 파스칼 2세에게 추기경 서임을 받았다.
1118년 교황 젤라시오 2세가 로마의 유력한 가문인 프란지파니가(家)의 박해를 피해 프랑스로 도망할 때 그를 수행했다. 1130년 교황 호노리오 2세가 죽은 뒤 추기경들 가운데 다수파는 피에트로를 아나클레투스 2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에 선출했으나, 이와 동시에 소수파는 추기경 그레고리오 파파레스키(인노첸시오 2세)를 후임 교황으로 선출했다. 두 교황 지명자들은 모두 2월 23일에 축성을 받음으로써 심각한 분열을 재촉했다. 대부분의 로마 시민들과 프란지파니가의 지지를 받은 아나클레투스는 인노첸시오를 로마에서 프랑스로 추방했으나, 인노첸시오는 그곳에서 아나클레투스의 조상이 유대인이었다고 비판한 클레르보의 대수도원장 성 베르나르도의 지지를 받았다.
아나클레투스는 로제르 2세에게 시칠리아 왕의 면류관을 씌워준 뒤(1130) 그의 지지를 받았으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2세와 비잔티움 황제 요안니스 2세 콤니노스를 포함한 인노첸시오의 지지자들의 세력이 훨씬 더 컸다. 프랑스의 루이 6세가 합법적인 교황 계승자를 결정하기 위해 프랑스 에탕프에서 소집한 공의회(1130)는 인노첸시오를 교황으로 택했다.
1132년 로타르는 인노첸시오·베르나르도와 함께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를 침공했으며, 초여름에는 아나클레투스가 차지하고 있던 지역을 제외한 로마 전체를 장악했다. 그러나 로타르가 떠난 뒤 아나클레투스 지지자들은 인노첸시오를 다시 로마에서 몰아냈다. 인노첸시오는 피사로 도망하여 그곳에서 1134년에 공의회를 열어 아나클레투스를 파문시켰다. 로타르의 2번째 원정(1136~37)으로 로제르 2세는 이탈리아 남부에서 쫓겨났고, 아나클레투스는 지지 세력을 모두 잃은 채 이 위기 가운데 죽었다. 1139년 인노첸시오가 소집한 제2차 라테란 공의회는 찬반양론이 비등한 가운데 이 분열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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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아나클레투스(2세)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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