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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빈치의 첫번째 밀라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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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2년 레오나르도는 밀라노 대공의 후원을 받게 되어 피렌체를 떠났다.

그가 피렌체를 떠난 이유는 메디치가(家)가 통치하던 피렌체의 신플라톤주의 풍조가 경험지향적인 그의 정신과 상반되고 좀더 현실적이고 학구적인 밀라노의 분위기에 매혹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게다가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화려한 대저택과 그곳에서 맡게 된 일들에 매료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1499년 루도비코가 권좌에서 물러날 때까지 17년간 밀라노에서 지냈다.

그곳에서 대공의 전속 화가이자 토목기사로 지내면서 화가이자 조각가로 또 궁정 연회의 기획자로서 활동했다. 또한 토목 건축 및 군사 문제의 기술고문으로 활약했으며, 수력과 기계에 관한 공학자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밀라노에서 지낸 17년간 단지 6점의 회화작품만을 남겼다. 체칠리아 갈레라니를 그린 〈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 Lady with an Ermine〉을 비롯해 〈악사 Musician〉, 제단화로 그린 2점의 〈암굴의 성모 The Virgin of the Rocks〉, 산타마리아델레그라치에 수도원의 식당에 그린 불후의 명작 〈최후의 만찬 Supper〉(1495~97), 밀라노 카스텔로 스포르체스코에 있는 살라 델레 아세의 천장을 장식한 그림(1498)이 그것이다.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 초청된 진짜 이유로 추측되는 대규모의 조각기획은 스포르차 가문을 세운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를 기념해 거대한 청동기마상을 세우는 일이었는데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는 중도에 일시적으로 중단하기도 했으나 이 일에 12년을 바쳤고 이것을 위한 수많은 스케치를 남겼다. 그중 가장 인상깊은 것은 20세기 중엽에야 마드리드에서 발견된 레오나르도의 노트 2권인데, 이를 통해 그의 구상이 얼마나 장엄하고 비현실적이리만치 대담한가를 알 수 있다. 1493년에 막시밀리안 황제가 비안카 마리아 스포르차와 결혼할 때에 말의 점토원형이 공개되었는데, 높이가 5m에 이르렀다.

그러나 임박한 전쟁의 위험 때문에 주조용 금속이 대포를 만드는 데 대신 사용되어 그 계획은 중단되고 말았고, 루도비코가 1499년 권좌에서 내려옴으로써 15세기의 가장 큰 기념비적 사업이던 이 기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또 점토원형은 전쟁의 참화로 파괴되고 말았다.

거장이 된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에서 커다란 공방을 가지고 견습공들과 제자들을 키웠다.

그들의 활동은 레오나르도의 위작 여부에 관한 논란을 초래했는데, 〈이마에 아름다운 장식을 두른 여인 La Belle Ferronnière〉(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루크레치아 크리벨리 Lucrezia Crivelli〉(밀라노 암브로시아나 미술관 소장)·〈리타의 성모 Madonna Litta〉(상트페테르부르크 예르미타슈 미술관 소장) 등을 비롯한 작품들의 제작에 그들이 참여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당시 레오나르도의 제자 가운데는 조반니 안토니오 볼트라피오, 암브로조 데 프레디스, 베르나르디노 데 콘티, 프란체스코 나폴레라노, 안드레아 솔라리, 마르코 도조노, 살라이 등이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과학 연구에도 몰두했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느끼고 경험하는 모든 것을 기록해둘 필요를 느꼈다. 이는 당시에 나왔거나 구해볼 수 있었던 몇몇 예술 논문들에서 자극받은 것이기도 했다.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의 〈건축론 De re aedificatoria〉이 1485년에 처음 출판되었으며, 프란체스코 디 조르조의 〈건축에 관한 논문 Treatise on Architecture〉은 필사본으로 나왔는데 레오나르도는 그 사본을 저자에게서 직접 선물받았다. 또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쓴 〈회화에서의 원근법에 관하여 De prospectiva pingendi〉는 원근법이론에 관한 모범서가 되었다.

레오나르도와 아는 사이였던 수학자 루카스 파치올리는 1494년 〈산술집성 Summa de arithmetica geometria, proportioni et proportional ità〉 이어 〈신성한 비례 Divina proportione〉를 출판했는데, 거기에 레오나르도는 대칭을 이루는 형태를 삽화로 그려넣었다.

이런 환경에서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예술이론을 글로 옮기고 싶은 생각을 갖기 시작했으며, '회화학'(science of painting)이라는 원대한 구상을 떠올렸다.

알베르티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원근법과 비례법에 대한 그들의 분석에서 이미 회화의 수학적인 토대를 입증하여 학문으로서의 회화 개념을 뒷받침해주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의 주장은 훨씬 더 진전된 것으로서 '보는 것'과 '인지하는 것'을 동일시하여 대담한 결론에 도달했다. 즉 화가는 관찰을 통해 지식을 얻고 그 지식을 다시 확실하게 그림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자질을 부여받은 최고의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1490~95년 레오나르도의 거대한 집필계획은 시작되었다.

거기에는 그의 필생의 중요한 4가지 주제가 포함되었는데, 회화에 관한 논문, 건축에 관한 논문, 기계학의 원리에 관한 글, 인체 해부에 관한 개요가 그것이다. 그밖에도 지구물리학·식물학·수리학·기상학에 관한 연구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레오나르도가 어렴풋이 생각해낸 '눈에 보이는 우주론'(visible cosmology)의 일부를 이룬다. 그는 관념적인 지식을 경멸하고, 체험에서 직접 보고 터득한 반박의 여지가 없는 사실들을 받아들여 기록했다.

이 모든 연구와 스케치는 수천 장에 이르는 노트와 낱장의 종이에 기록되어 있다. 이는 어떤 화가가 남긴 것보다도 분량이 가장 많은 문학적 유산으로 옛 문헌에 언급된 40편 남짓한 사본들 가운데 21편이 남아 있으며, 이중에는 원래 분리되어 있던 것이 합본된 노트와 함께 모두 31편이 보존되어 있다.

레오나르도는 밀라노에서 처음 이러한 노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는 낱장의 종이나 허리띠에 찬 조그만 스케치북에 관찰한 것들을 재빨리 스케치한 뒤 그것들을 주제별로 분류하여 순서대로 노트에 끼웠다. 이 당시에 작성한 노트 가운데에는 회화론을 위한 첫 자료집(MSS. A와 B, 파리 프랑스 학술원 소장), 종교적인 건축과 범속한 건축의 전형적인 스케치 모음집(MS. B, 파리 프랑스 학술원 소장), 기계학 기초이론서(MS. 8937, 마드리드 국립도서관 소장), 인체에 관한 논문의 첫번째 부분(해부학 MS. B, 윈저 성의 왕실도서관 소장)이 보존되어 있다.

레오나르도의 노트는 특히 거울에 비치는 상(像)처럼 글씨를 뒤집어 쓴 것과 글자와 그림의 관계에 있어서 독특하다.

왼손잡이던 레오나르도가 글씨를 반대로 쓴 것은 그로서는 쉽고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것은 은밀하게 남기려는 필적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의 글은 거울에 비춰보면 쉽게 읽을 수 있다. 때때로 그가 정상적인 필법으로 글을 쓴 예로 보아(제3자에게 건네줄 편지나 메모 또는 논평의 초안들), 그는 정상적인 필법으로 글을 쓰는 데 전혀 이상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메모 가운데 대부분이 거울에 비친 상처럼 씌어졌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글로 쓴 독백'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결국 이 글들은 출판을 위한 예비단계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노트의 또다른 특색은 도해와 본문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점이다. 레오나르도는 명확하고 표현이 풍부한 말을 쓰는 데 열심이었으나, 교수법에서는 글보다 도해를 절대적으로 중요시했다. 그는 스스로 '실물교수'(dimo-strazione)라 부른 실물묘사법에서 현대 과학적 도해의 선구자였다.

이렇게 밀라노에서 레오나르도의 2가지 '활동영역'이던 예술과 과학은 훗날 그의 창조력을 발전시키고 구체적으로 실현시켰다.

그것은 서로의 영역을 고무시키고 또 자극하는 일종의 '창조적 이원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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