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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03년 동력을 이용하여 짧은 시간이지만 조종 가능한 비행기로 최초로 비행을 했으며, 1905년 최초로 실용적인 비행기를 제작·비행했다. 형제는 그당시 원시적인 유럽 항공기 기술에 대변혁을 일으켰고 비행기가 공중에서 어떻게 제어되는지를 전세계에 보여주었다.
오토 릴리엔탈이 활공실험에 성공하고 1896년에 추락·사망했다는 것을 접한 형 윌버는 처음으로 기계비행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최초의 동력비행기 제작 외에도 3축에 대한 운동(피칭·요잉·롤링)의 제어에 성공한 것은 공기역학과 실제 비행에 있어 그들의 가장 중요한 공헌이었다.
개요
1903년 동력(動力)을 이용하여 짧은 시간이지만 조종 가능한 비행기로 최초로 비행을 했으며, 1905년 최초로 실용적인 비행기를 제작·비행했다.
초기생애
복음주의 연합형제교회 주교의 아들이며, 아주 어릴 때부터 기계에 대한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그들은 거의 독학으로 인쇄기계를 설계·제작하기 시작했고, 그뒤에는 자전거 판매사업에 뛰어들어 설계·제작까지 했다. 이 사업에서 얻은 수입으로 초기의 항공실험을 했다. 그들은 가장 적절한 시기에 항공 분야에 손을 댔다. 즉, 공기역학(空氣力學)·구조공학(構造工學)·기관설계·연료기술이 모두 어느 정도의 발전된 수준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실제로 비행할 수 있는 기계(비행기)를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근면과 불굴의 의지, 그리고 기계에 대한 재능이 뛰어나서 마침내 하늘을 정복할 수 있었다.
오토 릴리엔탈이 활공실험(滑空實驗)에 성공하고 1896년에 추락·사망했다는 것을 접한 형 윌버는 처음으로 기계비행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대머리수리가 공중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는지를 관찰한 뒤인 1899년 성공적으로 비행하기 위해서는 비행기가 반드시 세 축에 대한 운동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즉 새처럼 비행기도 한쪽 또는 다른쪽으로 선회(旋回)할 때의 기울임, 상승이나 하강, 좌우 조종 등을 할 수 있어야 하고, 필요하다면 이런 작동을 2가지 또는 모두 동시에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에게는 비행제어(飛行制御)가 주요문제였다. 그들은 대머리수리가 날개를 비틀어서 롤링(기체방향 축에 대한 회전운동)을 한다는 사실을 관찰하여, 1899년 그들이 만든 최초의 기계인 복엽연(複葉鳶)에 기계적으로 비틀 수 있는 날개를 부착했다.
따라서 한쪽은 양력(揚力 : 뜨는 힘)을 더 많이 받고 동시에 다른쪽은 적게 받게 되어 기체를 기울여 선회할 수 있으며, 바람에 의해 교란되어 불안정한 위치에서 수평으로 되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최초의 동력비행기 제작 외에도 3축에 대한 운동(피칭·요잉·롤링)의 제어에 성공한 것은 공기역학과 실제 비행에 있어 그들의 가장 중요한 공헌이었다.
동력비행을 시도하기 전에 활공비행을 터득하기로 결정하고, 1900, 1901, 1902년 3대의 복엽글라이더를 제작했다.
이들 가운데 첫번째 것은 노스캐롤라이나 키티호크에서, 다른 것들은 남쪽으로 8㎞ 떨어진 킬데블 힐스에서 비행했다. 마지막 글라이더는 상하제어를 위한 전방 승강타, 좌우로 방향을 바꾸기 위한 후방 방향타, 롤링의 제어를 위해 날개의 끝을 구부리거나 나선 모양으로 되어 충분히 제어가능하도록 개발되었다. 글라이더들의 제작·시험에 많은 이론적·실험적 연구가 사용되었으며, 여기에는 그들이 연구과정에서 수행한 데이튼에서의 풍동실험(風洞實驗)도 포함되어 있다.
그들이 최초의 동력비행기를 제작·비행하기 전에 2가지의 어려움을 극복해야 했다.
첫째, 그 시대에 존재하지 않던 효율적인 프로펠러를 설계·제작하는 것, 둘째, 그 시대의 자동차 기관은 너무 무거워서 비행기에 적당한 기관을 설계·제작하는 것이었다.
최초의 동력비행
1903년 최초의 동력 비행기인 '플라이어 I'(지금은 보통 '키티 호크'로 불림)을 완성하여, 1903년 12월 17일 아침에 킬데블힐스에서 아무 도움없이 이륙하여 역사상 최초로 동력(動力)을 이용해서 얼마 동안 공중에 떠 있었고 제어가능한 비행을 했다.
처음 비행은 12초였으며, 2번째 비행은 59초 동안 243.84m를 비행했으나, 역풍(逆風)이 불었기 때문에 실제 비행거리는 800m가 넘었다. 새로운 기관을 설치하여 개량한 '플라이어 Ⅱ'는 1904년 데이턴 근처의 허프먼프래리에서 비행했다. 1905년에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실용 비행기인 '플라이어 Ⅲ'은 선회·방향전환·원운동·8자비행을 쉽게 할 수 있었고, 30분 이상 공중에 떠 있을 수 있었다. 팔 수 있는 성공적인 비행기를 가지고 있다고 믿으려 하지 않은 미육군의 억울하고 무익한 거래와 산업 스파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라이트 형제는 정부나 개인회사의 재정적 협정이 공정해질 때까지 비행하지 않았다.
그결과 1905년 10월 16일부터 1908년 5월 6일까지는 한 번도 비행하지 않고 여러 대의 새로운 비행기와 기관을 제작했다.
이들 형제의 글라이더에 대한 소식과 설명은 유럽에서 현대 항공기산업의 탄생을 직접적으로 촉진시켜, 마침내 1908년 형제는 유럽에서 라이트 비행기를 면허 생산한다는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미국에서는 동생 오빌이 시험비행에 합격하면 육군이 라이트 비행기를 받아들이기로 동의했다.
미국에서 비밀 연습비행을 몇 번 한 뒤 윌버는 1908년 8월 8일에 프랑스 르망 근처의 경주로에서 새로운 비행기로 최초로 공개비행을 시작하여, 1908년말까지 근처의 오부르에서 시범비행을 계속했다. 윌버는 이 5개월 동안 100회 이상을 비행하여 25시간 이상 공중에 떠 있었으며, 이중 약 60번 정도 승객을 태웠고, 1시간이 넘는 비행을 7번하여 결국 2시간 20분이라는 비행기록을 세웠다. 반면에 미국에서 오빌은 9월에 버지니아 포트마이어에서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비행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9월 17일 오빌의 비행기가 기계적 손상으로 추락하여 오빌은 부상을 입었고 승객인 리유트 T.E. 셀프리지는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평가
형제는 그당시 원시적인 유럽 항공기 기술에 대변혁을 일으켰고 비행기가 공중에서 어떻게 제어되는지를 전세계에 보여주었다.
1909년 윌버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시범비행을 다시 시작하여 그들의 성공을 더욱 공고히했다. 오빌은 새로 제작한 비행기를 가지고 포트마이어로 돌아와 이 비행기를 세계 최초의 군용기로 미육군과 쉽게 계약을 맺었다. 그는 독일에 가서 또다른 라이트 비행기로 화려한 시범을 보였다.
1909년말까지 유럽과 미국에서는 그들의 비행기를 제작하여 계속해서 세계 항공기산업을 주도했다.
비록 1910년과 1911년에 개량된 라이트의 비행기가 계속 제작되어 뛰어난 비행을 했지만 결국 유럽의 경쟁자들은 그들을 능가하기 시작했다. 1912년에 윌버는 장티푸스로 사망했으나, 오빌은 1948년까지 항공공학에 값진 공헌을 했다. 비행술에만 열정을 쏟았기 때문에 형제는 둘다 미혼으로 죽었다. 그의 아버지가 쓴 윌버의 추도문은 뛰어난 이 두 사람에게 꼭 들어맞는 것이었다. "중요함으로 가득한 짧았던 삶. 실수없는 지성, 동요하지 않는 열정, 크나큰 겸손과 자기 신뢰, 정의를 명확히 바라보고 그것을 꾸준히 추구하면서 살다 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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