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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뒤샹

다른 표기 언어 Marcel Duchamp
요약 테이블
출생 1887년 7월 28일, 프랑스 블랭빌
사망 1968년 10월 2일, 뇌이
국적 프랑스

요약 팝아트와 옵아트 등에 영향을 끼친 20세기 프랑스의 미술가로 주요 작품은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2>. 프랑스에서 태어나 판화를 제작하는 할아버지 밑에서 예술적 기질을 나타내며 여러 양식을 접했으나 모방을 꺼려 자신만의 양식을 고집했다.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2>를 비롯해 누드를 주로 그렸지만 사실적이 아닌 기계적인 모습으로 비대상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누드> 작품 뒤로는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레디메이드로 불리는 파격적인 개념으로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

프랑스의 미술가이다.

ⓒ Hulton Archive/Getty Images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미술 작품과 일상용품의 경계를 허물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2 Nude Descending a Staircase, No. 2〉(1912)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뒤 다른 그림은 거의 그리지 않았다. 그대신 관습적인 미적 기준을 무시하고 유명한 레디메이드를 고안하여 미술의 혁명을 예고하였다.

다다이스트들과 가깝게 지냈으며, 1930년대에는 초현실주의 미술가들의 전시회를 여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55년에 미국 시민이 되었다. 예술가이자 동시에 반(反)예술주의자였던 마르셀 뒤샹은 20세기 회화의 주요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2〉를 제외한 그의 작품들은 오랫동안 대중들에게 무시당했다.

1960년까지는 초현실주의자들과 같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만이 그의 중요성을 주장했으며, 제도권의 미술계와 기성 비평가들은 그를 다만 괴짜이거나 실패한 예술가로 보았다. 그는 70세가 넘어서야 미국에서 신비스러운 대가로 부각되었으며, 부정적이거나 허무한 것이 아닌, 예술과 사회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그의 태도는 팝아트와 옵아트를 비롯해 각지에서 젊은 미술가들에 의해 환영받는 새로운 운동들을 낳았다. 그는 시각예술을 크게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미술가의 정신도 변화시켰다.

뒤샹의 생애

초기

뒤샹의 아버지는 공증인이었지만, 그의 가문에는 해운업자이면서 판화를 진지하게 제작한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예술적 전통이 있어 뒤샹 집안의 여섯 자녀 중 4명이 미술가가 되었다.

1875년에 태어난 가스통은 나중에 자크 비용으로 알려졌으며, 1876년에 태어난 레이몽은 스스로를 뒤샹 비용이라고 불렀다. 남자형제 중 막내인 마르셀과 1889년에 태어난 누이동생 쉬잔은 미술가로서 뒤샹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썼다.

1904년 10월에 마르셀이 파리에 도착했을 때 그의 두 형은 이미 그를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고향에서 그림을 그린 적이 있는데, 〈마르셀 르프랑수아의 초상 Portrait of Marcel Lefran이미지ois〉은 그가 이미 일정한 양식과 기법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뒤 몇 해 동안 뒤샹은 만화잡지에 풍자만화를 그리면서 당대의 주요한 회화경향(후기 인상주의 및 폴 세잔의 영향, 야수파, 입체파)을 빠르게 경험했고 여러 양식을 두루 실험하기는 했으나 특정한 양식에 빠져들지는 않았다. 그는 모방을 꺼렸을 뿐만 아니라 많은 작품을 만들거나 전시회를 자주 가지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평범한 예술가는 아니었다.

야수파 운동이 사라진 지 3~4년 뒤에 그는 야수파 양식의 작품을 그렸는데, 이것들은 그의 초기 작품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들이다. 〈미술가의 아버지의 초상 Portrait of the Artist's Father〉은 그 두드러진 예이다. 1911년이 되어서야 그는 입체파의 영향을 보여주는 양식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무렵 그는 입체파와 전위적인 모든 것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와 사귀었다.

그의 또다른 절친한 친구로는 프란시스 피카비아가 있는데, 그는 완전한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1909년까지 가장 정통적인 인상주의 양식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던 화가였다. 뒤샹과 그는 둘 다 입체파가 너무 체계적이고 정적이며 '지겹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둘 다 '반(半)사실주의'에서 시작하여 움직임을 '비대상적'으로 표현하는 양식으로 곧장 나아갔고, 그 가운데서 예전에 그 명칭만 알고 있었던 '미래주의'와 '추상주의'를 경험했다.

작품 〈누드 Nude〉

1911년 한 전시회에 뒤샹은 거의 단색조의 실루엣 5개를 중첩시켜 구성한 〈초상 Portrait〉을 출품했다.

이렇게 몸이 움직이는 연속적인 단계를 병렬적으로 배치한 것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2〉의 착상을 엿볼 수 있다. 두 작품의 주된 차이점은 〈초상〉에서 캥거루 같은 실루엣이 눈에 띄는 반면, 〈누드〉에서는 누드의 모습이 전혀 없고 다만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기계의 모습이 보일 뿐으로, 이를 통해 회화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비대상적이고 거의 영화와 같은 효과를 얻고 있다.

1912년 2월 제28회 앙데팡당전에 〈누드〉가 출품되었을 때 뒤샹 형제의 친구들로 이루어진 위원회에서는 이 그에 대해서도 알고 있던 이 위원회의 위원들도 보수주의자들은 아니었으나 혁신적인 시각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1년 뒤 뉴욕 시에서 열린 '아모리 쇼'에서 이 작품은 대중들에게 충격을 준 수백 점의 작품들 중에서 단연 돋보였다. 이 작품이 파리에서는 악평을 듣고 뉴욕에서는 대대적인 성공을 거둔 그 원인이 무엇이든지 간에 여기에 자극을 받아 뒤샹은 25세에 그림 그리기를 그만두었다.

뒤샹이 그의 작품에서 어느 누구도 참을 수 없는, 거의 그림 자체를 비웃는 듯한 아이러니를 나타냄으로써 그림에 대한 그 자신의 믿음도 허물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오늘날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제목만 하더라도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장난투였다. 입체파조차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뒤샹의 유일한 모티프는 도발성이었던 것 같다.

미술과의 작별

1912년 〈누드〉를 발표한 뒤샹은 그뒤 겨우 몇 점의 그림을 더 그렸다.

그 가운데 몇 작품, 특히 둘 다 뮌헨에서 제작된 〈처녀에서 기혼녀로의 변화 Le Passage de la Vierge à la Mariée〉와 〈기혼녀 Mariée〉(필라델피아 미술관 소장)는 당대의 가장 뛰어난 작품에 속한다. 이것들은 입체주의나 미래주의 또는 추상주의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 인체에 대한 뒤샹의 독특한 시각을 잘 보여준다.

뒤샹이 화가로서 매우 뛰어난 천부적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그에게 부족했던 것은 예술 자체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세계 안에서 미적 가치를, 이른바 상식 세계에 맞서는 공격적인 지성으로 바꾸려 했다. 일찍이 1913년에 그는 매우 난해한 작품인 〈거대한 유리, 또는 독신남자들이 발가벗긴 신부, 그 조차도 The Large Glass, or The Bride Stripped Bare by Her Bachelors, Even〉를 위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이 작품을 위하여 망막미술을 완전히 거부하고 산업 디자인의 기하학적 방식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상징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남자와 여자 및 사랑에 대한 그의 생각을 나타낸 기계의 청사진 같았다. 〈누드〉와 마찬가지로 〈거대한 유리〉도 현대 회화 작품들 가운데서 매우 특이한 것이다. 1913~23년에 뒤샹은 거의 그림을 위한 예비 연구와 습작에만 전념했다. 그는 그림 그리는 것을 그만두기는 했으나 결코 작품 활동을 멈추지는 않았다.

이 시기에 그는 천재성을 발휘하여 현대미술에서 매우 중요한 발견이라 할 이른바 '레디메이드'를 고안했다.

1913년에 그는 단지 평범한 자전거 바퀴에 지나지 않는 〈자전거 바퀴 Bicycle Wheel〉를 제작했다. 1914년에 만든 〈약국 Pharmacy〉은 겨울 풍경이 담긴 상업 인쇄물에다 약제사의 병을 생각나게 하는 2개의 작은 형상을 덧붙인 것이다. 이러한 레디메이드가 미술 작품을 지나치게 중요시하는 데 대해 비웃는 태도 이상의 것으로 여겨지고 긍정적인 가치로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거의 40년이 지나서였다.

레디메이드를 계기로 현대 미술은 본질적으로 창작과 비평의 혼합물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군 복무에서 면제된 뒤샹은 거의 완전한 고립 상태에서 살며 작업했다. 그는 프랑스를 떠나 미국으로 가서 '아모리 쇼'를 통해 친구들을 사귀었다. 1915년 6월, 그가 뉴욕에 도착했을 때 기자들은 그를 유명인사로서 환영했다. 지식인 단체들에서의 따뜻한 환영도 그의 기분을 고무시켰다.

부유한 시인이자 수집가인 월터 아렌스버그는 그를 위하여 자신의 집에 작업실을 차려주었으며, 그는 거기에서 곧 〈거대한 유리〉의 제작에 착수했다. 그는 아렌스버그 그룹의 중심인물이 되어 명성을 떨쳤으며, 〈누드〉를 그린 화가인 그의 작품들을 전시하고 싶어하는 미술관들로부터 많은 제의를 받았으나, 그는 전업화가로 나아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 제의들을 모두 거절했다. 그는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프랑스어 강습을 했다.

그는 그무렵 작품을 팔면 인기를 끌었을 것이지만 친구들에게 그것들을 무료로 나누어 주거나 일부러 적은 금액을 받고 파는 데 만족했으며, 그후에도 계속 그러한 미술가로 남았다. 그는 아렌스버그를 도와 〈누드〉를 비롯한 그의 작품의 상당수를 보이는 대로 사들였다. 이것들이 아렌스버그 컬렉션의 주요작품이 되었으며, 뒤에는 필라델피아 미술관으로 넘어갔다.

1923년 작업을 그만둘 때까지 8년을 더 작업한 〈거대한 유리〉 외에 뒤샹은 단지 몇 점의 레디메이드만을 더 만들었다.

그는 1917년에 독립미술가협회의 제1회 전시회에 〈샘 Fountain〉이라는 제목을 붙인 소변기를 출품했다. 그는 이 단체의 창립회원이었지만, 그 작품에 'R. Mutt'(얼간이)라고 서명했기 때문에 그것은 거절당했다. 그의 레디메이드는 피카비아가 잡지 〈291〉(1917)에서 뉴욕 시에 소개한 다다이즘 운동을 몇 년 앞질러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 운동에 대한 반응으로서 뒤샹은 아렌스버그와 H. P. 로셰를 도와 〈맹인 The Blind Man〉과 〈롱롱 Rongwrong〉을 발행했는데, 전자는 단 2회만 발행되었고 후자는 단 1회만 발행되었다. 그뒤 1921년에 화가인 맨 레이와 함께 〈뉴욕 다다 New York Dada〉를 단 1회 발행했다.

1918년 그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거대한 유리〉를 월터 아렌스버그에게 팔았다.

이 작품과 그의 마지막 작품인 또다른 그림을 팔아 나온 돈으로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9개월 동안 지냈으며, 그곳에서 정전(停戰) 및 그의 형 레이몽 뒤샹 비용과 기욤 아폴리네르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1919년 그는 피카비아와 함께 파리에 머물면서 최초의 다다이스트들과 교류했다. 이를 계기로 그의 가장 유명한 레디메이드인, 콧수염과 염소수염을 붙인 〈모나리자 Mona Lisa〉라는 사진작품이 나왔다.

이러한 행위는 과거의 미술에 대한 다다이스트들의 경멸을 나타낸 것이었는데, 그들에게 있어서 과거의 미술은 이제 막 끝난 전쟁의 공포를 일으킨 파렴치한 문명의 일부였다.

1923년 2월에 뒤샹은 〈거대한 유리〉의 작업을 멈추고 영원히 완성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해가 지남에 따라 어떤 종류의 예술활동도 점점 더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으나, 영화는 움직임에 대한 그의 흥미를 충족시켜 주었다. 이때까지 그가 만든 것들은 다만 잠재적인 기계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제 작동하고 움직이는 실제 기계를 만들게 된 것이다.

최초의 기계는 광학에 관한 것이었으며, 여기에서 단편영화인 〈무기력한 영화 Anemic Cinema〉(1926)가 나왔다. 또한 "광학적 축음기 음반"을 포함한 다른 작품들을 만들면서 그는 일종의 아마추어 기술자로서 활동했다. 그러나 그가 만든 보잘 것 없는 기계들은 산업의 야망을 비웃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그는 나머지 시간에는 체스 놀이에 열중하여 국제시합에 참가하기도 하고 1932년에는 그 주제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뒤샹은 미술단체들을 피하려고 애썼지만, 주로 예전의 다다이스트 친구들로 이루어진 파리의 초현실주의자 그룹과는 관계를 유지했다.

1934년 그가 〈거대한 유리〉에 관한 일련의 자료들을 담은 〈초록 상자 Green Box〉를 출판하자 초현실주의 시인인 앙드레 브르통은 이 그림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처음으로 뒤샹에 관한 포괄적인 연구논문을 써서 1935년 파리의 〈미노토르 Minotaure〉지에 실었다. 그후 초현실주의자들과 뒤샹의 관계는 더 가까워졌으며, 뒤샹은 브르통을 도와 1938~59년에 초현실주의자들의 모든 작품전시회를 지원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바로 전에 그는 그의 작품들을 복제한 68점의 축소품들이 들어 있는 〈부아탕발리즈 Boîte-en-valise〉라는 화첩을 만들었다.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하자 그는 여러 차례 여행을 하며 그의 작품을 국외로 몰래 옮겼다.

결국 그것은 뉴욕 시로 옮겨졌으며, 그는 거기에서 브르통과 막스 에른스트, 이브 탕기 등 망명 중인 많은 초현실주의자들과 합류했다. 그는 1942년 10월과 11월에 뉴욕 시에서 열린 초현실주의자들의 전시회를 준비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동료 망명객들과는 달리 그는 미국에서 편안함을 느꼈으며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전쟁 기간 중 뉴욕 시의 현대미술관에서 〈거대한 유리〉를 전시하여 명성을 회복했으며, 1945년에는 미술잡지인 〈전망 View〉의 특별호에 그가 특집으로 다루어졌다. 2년 뒤 그는 초현실주의 전시회 문제로 브르통을 도우러 파리에 갔으나 곧 뉴욕 시로 돌아와서 여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1954년 티니 새틀러와 결혼한 뒤로는 예전보다도 더욱 은둔해서 살았으며, 마음이 움직일 때마다 기묘하고 독특한 물건을 만들고 체스를 두며 살았다.

이러한 조용한 생활은 1960년쯤 깨지고 말았다. 그 무렵 새로운 세대의 미국 미술가들은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의 상당 부분을 뒤샹이 이미 풀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세계 곳곳으로부터 그에게 찬사가 쏟아졌고 그의 작품 회고전들이 미국과 유럽 각지에서 열렸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레디메이드들이 그의 허락하에 제한된 수로 복제된 것이며, 가장 놀랄만한 일은 그가 뇌이에서 죽은 뒤 그의 친구들이 그가 마지막 20년 동안 남몰래 〈명제:1. 폭포, 2. 조명 가스 Etant donnés : 1. la chute d'eau, 2. le gaz d'éclairage〉라는 걸작을 만들었다는 것을 듣게 된 것이다. 그것은 현재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있는데, 무거운 나무문에 2개의 작은 구멍이 나 있어 그것을 통해 뒤샹의 신비한 예술세계를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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