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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9. 1. 22, 프랑스 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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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3. 11. 30, 파리 |
국적 | 프랑스 |
요약 프랑스의 화가·삽화가·디자이너·작가·편집인.
입체파와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운동에 연이어 참가했다. 피카비아는 국립미술학교와 국립장식미술학교에서 공부한 뒤 약 6년 동안 알프레드 시슬레의 작품과 비슷한 인상주의 양식으로 작품을 제작했다. 1911년 입체파의 한 분파인 섹시옹도르의 회원이 되었다.
또한 1911년에 미술가 마르셀 뒤샹을 만났는데, 그후 피카비아가 이지적인 입체파 회화를 거부하고 복잡한 정물과 상징적인 형태를 추구한 것은 뒤샹의 영향으로 생각된다.
1913년 뉴욕에서 열린 '아모리 쇼'와 앨프레드 스티글리츠의 '포토 시세션' 화랑에 작품을 전시했다. 그는 선구적인 다다이즘 평론지인 〈291〉과 스티글리츠가 발행한 잡지 〈카메라 워크 Camera Work〉에 글을 기고했는데, 후자에서 당대의 미술 경향을 풍자한 무정형주의를 선언했다. 1917년에는 부유한 시인이자 학자 겸 수집가인 월터 애런스버그와 함께 〈291〉을 전승한 잡지 〈391〉을 발간했다.
그를 포함해 마르셀 뒤샹, 마리우스 데 자야, 맨 레이 등은 뉴욕에 사는 유럽 미술가들로 구성된 다다이즘 그룹의 일원이었다. 1917년 유럽으로 돌아가서 바르셀로나·파리·취리히에서 활동했으며, 1918년에는 취리히에서 트리스탄 차라와 함께 잡지 〈다다 Dada〉의 4·5호를 만들었다. 1920년 파리에서 〈카니발레 Cannibale〉라는 평론지를 창간했다. 1921년경 다다이즘이 해체되자 시인 앙드레 브르통과 함께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가했다. 그는 많은 문학작품을 썼는데 그중 〈어미 없이 태어난 소녀에 관한 시와 소묘들 Poèmes et dessins de la fille née sans mère〉(1918)이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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