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다음백과

도화녀비형랑설화

다른 표기 언어 桃花女鼻荊郞說話

요약 신라 제26대 진평왕 때 죽은 전왕과 동침한 도화녀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비형랑에 대한 설화.

〈삼국유사〉 권1 기이편 도화녀비형랑조에 실려 있다.

신라 제25대 진지왕이 도화녀라는 미녀를 탐냈다. 그러나 도화녀는 유부녀로서 두 남편을 섬길 수 없다고 하며 왕의 요구를 거절했다. 바로 그해 왕이 죽고 2년 뒤 도화녀의 남편도 죽었는데, 하루는 갑자기 죽은 왕이 나타나서 이전의 약속을 지켜달라고 했다. 도화녀는 죽은 왕과 함께 7일을 지낸 뒤 임신하여 비형랑을 낳았다. 진평왕은 이 소문을 듣고 신기하다 하여 비형랑을 데려다 기르고, 비형랑이 15세가 되자 집사 벼슬을 주었다. 비형랑이 밤마다 도깨비들과 노는 것을 알고 진평왕이 비형랑에게 도깨비들을 부려 다리를 놓도록 했더니 하룻밤 새에 다리를 놓았다.

왕이 국정을 도울 수 있는 도깨비를 찾자 비형랑은 길달이라는 도깨비를 추천했다. 왕은 그에게도 집사직을 주고 자식이 없는 각간 임종에게 그를 후계자로 삼게 했다. 임종은 그에게 흥륜사의 남쪽에 누각문을 세우게 했는데 그는 매일 밤 그 문 위에서 잠을 자곤 했다. 그래서 그 문을 길달문이라고 불렀다. 어느날 길달이 여우로 둔갑하여 사라지자 비형랑은 다른 도깨비를 시켜 그를 죽였다. 그뒤 도깨비들은 비형랑의 이름만 들어도 무서워하며 달아났다. 당시 사람들은 이 일을 두고 "성스러운 임금의 혼이 아들을 낳았으니 온갖 귀신들은 비형랑의 집으로 날아가고 여기에는 얼씬도 하지 말아라"라는 내용의 글을 지었는데, 신라에서는 이 글을 걸어놓고 귀신을 쫓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신라의 지배층은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 불교를 최고이념으로 삼고, 유교에 입각한 제도와 관습을 택했다. 그러나 이 설화에는 당시 사회에 무속의 전통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음이 나타난다. 왕이 도깨비를 등용하고 자식이 없는 신하의 후계자로 삼게 했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또 후대의 처용보다는 더 소극적이지만, 잡귀를 물리치는 존재로 여겨진 점에서 비형랑은 처용과 비슷한 성격의 인물이다. 이 설화는 고전소설 〈금방울전〉에 집약적으로 전승되었다.→ 야래자형설화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다음백과
다음백과 | cp명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신화/전설

신화/전설과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



[Daum백과] 도화녀비형랑설화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