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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체육회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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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을 시작으로 일본 유학생들과 국내에서 활동중이던 체육인들은 거국적인 체육단체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들은 1920년 6월 16일 서울 인사동의 명월관에서 조선체육회 창립을 위한 발기인 대회를 열고 윤익현·변봉현·원달호·이등식·김병태·이병국·유문상·이원용·김동철·김규민 등 10명의 준비위원을 선임했고, 같은 달 26일 같은 장소에 모여 설립 취지문을 낭독하고 정관 등을 작성, 7월 13일 역사적인 창립총회를 열었다.

초대회장에는 당시 재계(財界) 중진이었던 장두현이, 이사장에는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을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에서 교장을 지내고 있던 고원훈이 각각 선출되었다. 첫 사업으로 그해 11월 4일 전조선야구선수권대회를 개최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전국체육대회의 효시가 되고 있다.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우리나라는 올림픽 등 각종 국제대회에 참가했다. 특히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한 손기정이 마라톤에서 우승을 차지해 민족의 울분을 달래주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는 1938년 4월 8일 조선체육회를 강제해산하고 이를 자신들이 만든 조선체육협회에 통합·흡수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면서 체육계 지도자들이 모여 9월에는 축구·농구 대회와 서울시를 일주하는 마라톤 대회를 개최했다. 11월 26일에는 체육회 재건을 위한 모임을 통해 헌장을 제정하고 임원을 선출하는 등 본격적인 체육회 부활을 서둘렀다. 1945년 12월 27일 자유해방경축 전국종합경기대회를 열었고 1946년 10월 16일에는 전국체육대회를 정식으로 부활시켰으며 1948년 1월에는 동계 올림픽에, 7월에는 제14회 런던 올림픽에 해방 후 처음으로 태극기를 앞세우고 출전했다.

1952년 6·25전쟁 중에도 제15회 헬싱키 올림픽에 선수단을 파견했다. 1954년 3월 16일 각 경기단체와 시·도 지부와의 연계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사단법인체로 체육회의 위상을 격상시켰다. 5·16군사정변이 일어난 뒤인 1965년부터는 스포츠를 통한 국위선양을 목적으로 대표선수들의 강화훈련을 시작했다.

이를 위해 1966년 2월 28일 태릉선수촌을 세웠다. 11월에는 실내체육관을 비롯한 훈련 시설을 확충했고, 때마침 제3공화국의 체육입국정책에 힘입어 국민 체위향상을 위한 사회체육진흥과 엘리트 스포츠 육성으로 국위선양을 위해 막대한 재정적인 지원이 뒤따랐다. 1981년 9월 30일 제24회 올림픽의 서울 유치에 성공했고 1983년 올림픽의 원만한 개최를 위해 수익사업이 가능하게끔 체육회를 특수법인화했다. 1984년 11월 선수 훈련시설 확충을 위해 경상남도 진해에 제2선수촌을, 충청남도 온양에 온천수를 이용한 실내수영장을 각각 건립했다. 1986년 아시아경기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해 사상 처음 일본을 꺾고 중국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이어 1988년 역사적인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했고 종합 성적에서도 소련·동독·미국에 이어 세계 4위를 차지했다. 1989년 12월 4일 23년간 업무를 보아왔던 무교동 체육회관에서 송파구 오륜동 88번지 올림픽 회관으로 위치를 옮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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