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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30년 창당된 한국독립당은 산하에 한국독립군을 조직하여 북만주에서 대일항전을 전개했다. 만주사변 이후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수립한 일제는 독립군에 대한 토벌작전을 본격화했다. 이에 한국독립당은 반만항일의 기치를 든 중국군과의 연합작전을 전개했다. 한중연합군은 솽싱푸·쓰다오허쯔·둥징청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점령지를 오랫동안 확보할 수 없어 산림지대로 후퇴한 한중연합군은 모든 부대를 라오쑹링으로 이동시켰다. 일본군이 다뎬쯔링을 통과한다는 사실을 탐지한 한중연합군은 매복 공격을 개시했다. 일본군은 4시간 만에 전멸되었으며, 한중연합군은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했다. 전리품 분배관계로 독립군과 중국군 간에 알력이 일어났으며, 중국군이 둥닝 현 전투에 약속한 후속부대를 파견하지 않아 독립군은 퇴패했다.
1930년 7월 홍진(洪震)·지청천·신숙(申肅)·남대관 등은 한족자치연합회를 기반으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고 그 산하 무장부대로 한국독립군을 조직하여 북만주 일대에서 대일항전을 전개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는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수립한 후 만주군과 합동하여 독립군에 대한 토벌작전을 본격화했다. 이때 만주 일대에는 반만항일(反滿抗日)의 기치를 든 많은 중국부대가 편성되어 일본군과 만주군에 항전하고 있었다.
이에 한국독립당은 1931년 11월 긴급중앙회의를 개최, 모든 역량을 항일전에 집중시키기로 하고 중국군과의 연합작전을 전개할 것을 결정했다.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이청천은 중국호로군사령관(中國護路軍司令官)과 협의, 한중연합군을 편성하여 1932년 8월부터 본격적인 연합작전을 시작했다. 한중연합군은 1932년 솽싱푸[雙星堡] 전투의 승리에 이어 1933년에는 쓰다오허쯔[四道河子]·둥징청[東京城]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한중연합군은 전투에 이기고도 점령지를 오랫동안 확보할 수 없어 산림지대로 후퇴하여 재진출을 계획하는 수밖에 없었다. 6월 28일 한중연합군은 모든 부대를 라오쑹링[老松嶺]으로 이동시켰는데, 이때 다뎬쯔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이쯔카[飯塚] 연대는 한중연합군을 공격하기 위해 7월 1일 다뎬쯔 북방 5리에 있는 노무제하(老毋諸河)에 도착했다. 일본군이 7월 3일 다뎬쯔링을 통과한다는 사실을 탐지한 한중연합군은 2일 오후 6시 다뎬쯔링에 도착하여 3일 새벽까지 전투준비를 완료했다. 다뎬쯔링에 매복한 독립군 병력은 2,500명, 중국군 6,000명이었다. 이를 3대로 나누어 독립군 2,500명, 중국군 2,500명을 전위부대로 편성하되, 공격의 주동은 독립군이 담당하기로 하고 매복했다. 일본군이 다뎬쯔링을 반쯤 넘어서 후미가 중턱에 이르렀을 때 연합군이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 매복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불과 4시간 만에 전멸되었으며, 이 전투에서 한중연합군은 일본 군복 3,000벌, 군수품 200여 마차, 대포 3문, 박격포 10문, 소총 1,000여 정, 담요 300장 등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했다. 이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 분배관계로 독립군과 중국군 차이스룽[蔡世榮] 부대 사이에 알력이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9월 1일 둥닝 현[東寧縣] 전투에서 중국군이 약속한 후속부대를 파견하지 않아 독립군은 3일 동안 막대한 손실을 입고 퇴패했다. 뿐만 아니라 중국군은 독립군의 총사령관 이하 수십 명의 고급간부를 구금하고 무장해제시켰다. 곧 화해가 되었으나, 독립군은 중국군과 관계를 끊고 남중국 방면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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