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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5. 12. 29, 경기 가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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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7. 11. 22 |
국적 | 한국 |
요약 천도교 간부로 일하면서 국내외에서 항일무장투쟁운동을 주도했다. 1920년 4월 임시정부의 요청에 따라 천도교 대표로서 상하이에 망명하여 천도교 선전에 노력하면서, 한편 박재혁을 국내에 파견하여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게 했다. 1921년 9월 신채호·박용만 등과 함께 베이징에서 군사통일회를 조직, 국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항일운동단체·독립군을 총망라하여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고 이 회의에서 장차 전개될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략을 모색할 것을 주장했다. 같은 해 11월 반임정계 요인들에 의해 조선공화정부가 수립되자 국무총리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만주를 오가면서 학생지도와 농촌계몽 및 천도교 교리 전파에 힘썼다. 해방후 귀국한 뒤 1947년 4월 16일 입법의회 의원에 피임되었고, 1948년 4월 남북협상을 위하여 김구·김규식 등과 함께 평양에 다녀왔다.
초명은 태련(泰鍊), 개명은 태치(泰癡). 호는 강재(剛齋)·시정(是丁)·치정(癡丁). 군서기(郡書記)로 약 2년간 근무하다가 1903년 12월 1일 동학(東學)에 들어갔다.
1905년 한성대동전문학교 법학과를 수료했다. 1906년 순검(巡檢)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국민신보〉 기자로 6개월간 일을 한 뒤 약 4년 동안 탁지부 인쇄국 교정원으로 있었다. 1907년 김남수(金南壽)·김남로(金南老)와 함께 문창학교(文昌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을 지냈다. 1910년 천도교 가평 교구장, 1912년 천도교 종학강습소 간사, 1914년 대구 대교구장, 1919년 중앙대종사 종법원 겸 외사원을 지냈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김영륜(金永倫)과 〈기미독립선언서〉를 교정·인쇄하는 데 참여하여 각 지방에 배포했다. 1920년 4월 임시정부의 요청에 따라 천도교 대표로서 상하이[上海]에 망명하여 천도교 상하이 전도실을 설치하고 〈천도교의 실사(實事)〉를 간행하여 천도교 선전에 노력했다.
한편 박재혁(朴在赫)을 국내에 파견하여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게 했다. 1920년 12월 상하이 대한인거류민단의사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임시정부의 외교노선에 반대하고 무장투쟁노선을 주장하여, 1921년 9월 신채호(申采浩)·박용만(朴容萬) 등과 함께 베이징[北京]에서 군사통일회를 조직, 국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항일운동단체·독립군을 총망라하여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고 이 회의에서 장차 전개될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략을 모색할 것을 주장했다.
같은 해 11월 반(反)임정계 요인들에 의해 조선공화정부가 수립되자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1922년 5월 국민대표회의 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했으며, 1923년 1월부터 상하이에서 약 5개월 동안 계속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의 주요이론가로서 활동했다. 그러나 독립운동방략을 둘러싸고 개조파·창조파·중도파·임정유지파 등이 대립하여 국민대표회의가 진척이 없고, 더욱이 1923년 5월 김동삼(金東三) 등이 국민대표회의에서 탈퇴하자, 부의장으로서 창조파를 중심으로 헌법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김구(金九)를 중심으로 하여 국민대표회의의 무효가 선언되자 다시 만주로 갔다.
1924년 만주 교하(蛟河)의 농촌에 정착하여 천도교 납법구종리원(拉法溝宗理院)을 설립하고 학생지도와 농촌계몽 및 교리전파에 힘썼다. 1926년 10월 중동선(中東線) 빈현(賓縣) 이도하자(二道河子)의 삼청궁농장(三淸宮農場)으로 옮기고, 1927년 2월에는 송봉산 개간농장으로 이주하여 신창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었다.
그리고 빈현·쌍성현 지방의 한인농장을 연합하여 쌍빈지방자치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었다. 1927년 이우석(李雨錫)·심만호(沈萬湖) 등과 더불어 지린 성[吉林省] 아성 현[阿城縣] 대석하(大石河)에서 농장을 경영하던 중 신민부가 군정위원회와 민정위원회로 나뉘어 대립하자, 그는 민정위원회의 입장으로 3부 통합운동에 참가했다. 1930년 7월 북만주에서 홍진(洪震)·이청천(李靑天)·정신(鄭信)·남대관(南大觀) 등과 함께 한족총연합회를 모체로 하여 한국독립당과 그 산하 무장부대인 한국독립군을 조직하고 한국독립당의 총무위원장·문화부장으로 활동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가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수립하자 한국독립당은 1931년 11월 긴급중앙회의를 개최, 모든 역량을 항일전에 집중시키기로 하고 중국군과의 연합작전을 전개할 것을 결정하고 신숙을 중국호로군연합군총부(中國護路軍聯合軍總部)에 파견했다. 교섭 결과 한중연합군을 편성했는데, 그는 1932년 솽싱푸[雙星堡] 전투에 한국독립군의 참모장으로 참전했다. 1933년 상하이·난징[南京]에 파견되어 중국 국민당정부와 군사협력을 강구했다.
1935년 만주로 돌아오던 도중 잉커우[營口]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으나, 1936년 3월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1945년 하얼빈[哈爾濱]에서 한하인(韓荷仁)·한형권(韓馨權)·오광선(吳光鮮) 등과 재만동지회를 결성,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광복군 본영과 연합작전을 계획하다가 8·15해방을 맞았다. 같은 해 8월 26일 조직된 지린 한국인회의 위원장에 선임되어 교민들의 귀국을 위해 노력했다.
귀국한 뒤 1947년 4월 16일 입법의회 의원에 피임되었고, 1948년 4월 남북협상을 위하여 김구·김규식(金圭植) 등과 함께 평양에 다녀왔다. 1949년 1월 천도교 도사에 선임되었으며 만화회(萬化會)를 조직하여 위원장이 되었다. 1956년 11월 15일 이동화(李東華)·장건상(張建相)·최익환(崔益煥)·고정훈(高政勳)·김성숙(金星淑) 등과 함께 민주혁신당을 조직하고 중앙위원에 취임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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