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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아악

다른 표기 언어 大晟雅樂 동의어 대성악, 대성신악

요약 1114년(예종 9) 하례사 왕자지와 문공미가 중국에 다녀오면서 등가악기와 헌가악기를 들여 왔는데 편종·편경·금·슬·지·척·소 등 20가지이다. 이 때 무용기구, 무복, 악복 등을 함께 가져왔고 고려 악공들이 이를 연구하게 되었다.
의종(1147~70) 때 비로소 연주절차가 제도화되어 안정되었으나, 외부적 요인으로 아악기의 8음이 구비되지 못하고, 중국 전통에 의존하는 등의 진통을 겪었다. 아악의 부흥은 조선 세종 때 박연에 의해 이루어졌다.
세종 때 대성아악의 절차는 ① 영신, ② 관세, ③ 승전, ④ 전폐, ⑤ 봉조, ⑥ 초헌, ⑦ 아헌, ⑧ 철두(徹豆), ⑨ 송신(送神), ⑩ 망료 등을 따른다.

대성악 또는 대성신악이라고도 한다. 대성아악이라는 명칭은 송나라 휘종 때 설립된 음악기관인 대성부에서 새로 만든 음악으로 해석된다.

1114년(예종 9) 송에서 새로 만든 악기들을 고려에 보내오자, 예종은 이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왕자지와 문공미를 하례사로 중국에 보냈다. 이들이 귀국할 때 휘종은 다시 대성부에서 새로 제정한 아악기를 주었다.

이때 들여온 아악기는 등가악기와 헌가악기로 분류되는데, 등가악기는 편종·편경·금·슬·지·척·소 등 20가지이다. 또한 문무·무무에 사용되는 무구·의관·무의·악복·의물도 함께 가져왔다. 그러나 아악을 연주해본 경험이 없는 고려의 악공들에 의해 연주된 아악은 그 연주순서가 바뀌고, 일무에 사용되는 무구의 숫자가 변하는 등 혼란에 빠져 연주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연주절차가 의종(1147~70) 때 비로소 어느 정도 제도화되어 안정되었으나, 그후 계속되는 몽고와의 전쟁 등 외부적 요인에 의해 아악기의 8음이 구비되지 못하고, 송대 아악의 전통을 따르다가 명대의 전통을 따르는 등 또다시 진통을 겪었다. 1391년(공양왕 3) 아악서를 설립해 아악을 재정비하려 했으나 고려의 멸망으로 아악의 부흥은 조선 세종 때 박연에 의해 이루어졌다.

세종 때 대성아악의 절차와 곡조는 다음과 같다.

① 영신:응안지곡 9변(變), 황종궁 3성(成), 대려위각 2주(奏), 태주위치 2주, 응종위우 2주, ② 관세:동안지곡·고선궁, ③ 승전:동안지곡·남려궁, ④ 전폐:명안지곡·남려궁 5성(成), ⑤ 봉조:풍안지곡·고선궁, ⑥ 초헌:성안지곡·남려궁정위·연국공·성국공·기국공·추국공, ⑦ 아헌:문안지곡·고선궁, ⑧ 철두:오안지곡·남려궁, ⑨ 송신:영안지곡·황종궁, ⑩ 망료:관세와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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