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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378(우왕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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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458(세조 4) |
국적 | 조선, 한국 |
요약 조선의 음악가이자 음악이론가인 박연은 고구려의 왕산악, 신라의 우륵과 함께 우리나라의 3대 악성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본 세종 에게 중용되어 조선의 예악 정비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세상을 다스리는 음이 편안해서 즐거우면 정치가 조화롭게 된다. 이 때문에 성(聲)으로 음(音)을 알고, 음을 살펴 악(樂)을 알고, 악을 살펴 정치를 알게 되어 정치의 도리가 갖추어진다.
《예기》에서 음악과 정치의 상관관계를 설파한 말이다.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은 창업 초기부터 예악(禮樂)을 매우 중요시했다.
예(禮)는 천지의 질서이고 악(樂)은 천지의 마음이므로 한 나라에 예악이 잘 갖추어져야만 백성들이 선악의 이치를 깨닫고 바른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세종은 신생국 조선에서 무엇보다도 예악의 완비가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이때 박연은 세종의 뜻을 받들어 채원정의 《율려신서》, 주자의 《의례경전서》, 임우의 《석전악보》 등을 깊이 연구하여 악서 찬집, 아악기 제작, 아악에 관련된 각종 제도의 정비라는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세종과의 만남
박연(朴堧)은 1378년(고려 우왕 4년) 8월 20일 충북 영동에서 삼사좌윤 박천석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 어린 시절의 이름은 연(然), 자는 탄부(坦夫), 호는 난계(蘭溪)이다. 어머니는 경주 김씨로 통례문부사 김오의 딸이었는데, 박연이 11세 때인 1388년에 사망했다. 부인은 여산 송씨로 판서를 지낸 송빈의 딸이다.
박연은 슬하에 3남 4녀를 두었는데, 맏아들 맹우(孟愚)와 둘째 아들 중우(仲愚)는 각각 현령과 군수 등의 지방관을 지냈고, 막내아들 계우(朴季愚)는 집현전 학사로서 아버지와 함께 세종을 보위했다.
어린 시절 영동향교에서 학문을 닦았던 박연은 거문고와 비파 등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는데 특히 피리의 명수로 이름을 날렸다. 성현의 《용재총화》에는 그가 젊은 날 과거 응시를 위해 한양에 갔을 때 장악원의 악사에게 피리 연주를 배운 일화가 실려 있다.
당시 그의 연주를 들은 악사는 “소리와 가락이 상스럽고 절주(節奏)에 맞지 않다. 옛 버릇이 굳어져 고치기가 어렵다.”고 혹평했다. 하지만 박연은 좌절하지 않고 그의 문하에서 열심히 수련한 끝에 “규범이 이루어졌으니 장차 대성할 수 있겠다.”라는 호평을 듣기에 이르렀다.
박연은 1405년(태종 5년) 생원시에 급제했고, 6년 후인 1411년(태종 11년)에 문과에 합격하여 34세의 나이로 관직에 진출했다. 그때부터 박연은 집현전 교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등 청요직을 두루 거치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태종 말년에 그는 세자시강원 문학 직위에 오르면서 자신의 역량을 알아주는 주군을 만났다. 당시 세자 이제가 낙마하면서 그 자리를 물려받은 충녕대군 이도가 그의 음악적 재능에 호기심을 보였던 것이다.
편경 제작
1418년(세종 원년) 보위에 오른 세종은 박연에게 봉상판관과 악학별좌, 관습도감 제조 등을 제수하면서 예악에 관련된 업무를 맡겼다. 조선의 예악을 완비하고자 했던 세종은 우선 궁중제례악을 정확하게 연주할 수 있는 악기 제작을 독려했다. 이때 박연은 맹사성의 지휘를 받아 악사 정양, 악기제작자 남급과 함께 수많은 악기를 만들었다.
1423년(세종 5년) 악공들의 연습용으로 금, 슬, 대쟁, 생, 봉소가 만들어졌고, 이듬해에는 화, 우, 피리, 훈, 지, 아쟁, 가야금, 거문고, 향비파까지 완성했다. 하지만 전체 악기의 기본음을 조율하는 편경의 음이 일정치 않아 문제가 되었다.
본래 중국의 악기인 편경(編磬)은 돌로 만들어져 온도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으므로 그 음을 다른 악기의 기본음으로 삼았는데, 당시 조선에 있던 편경은 오래 되고 낡아서 정확한 음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고려 예종 때 송나라 휘종 황제가 제례악에 쓰이는 종(鍾), 경(磬) 각 1채와 여러 악기들을 각각 2부씩 내려주었는데 매우 정밀했다. 하지만 홍건적의 침입 당시 대부분의 악기가 유실되었고, 늙은 악공이 종, 경 두 악기를 연못에 던져 넣어 조선에까지 전해졌다. 그 후 명나라 태조와 태종이 연이어 종과 경을 보내주었지만 모양이 거칠고 소리도 좋지 않았다.
1425년(세종 7년) 예조에서 제향에서 연주할 때 쓰이는 돌로 만든 석경(石磬)이 부족하자 임시방편으로 기와로 만든 와경(瓦磬)을 만들어 사용했다. 그러나 종의 모양도 제각각이고 소리도 어지러워 연주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참다못한 세종은 박연에게 석경을 만들라고 명했다. 때마침 석경의 재료인 경석이 남양에서 생산되었고 편경을 조율할 율관 제작에 필요한 검은 기장이 옹진에서 재배되고 있었다.
박연은 오랜 노력 끝에 1427년(세종 9년)에 이르러 1틀에 12개 달린 조선식 석경을 완성했다. 당시 그는 석경의 황종음을 기준으로 응종까지 3분씩 자르는 삼분손익법(三分損益法)을 써서 12개의 해죽으로 된 율관(律管)을 만든 다음 검은 기장으로 조율했다. 그런데 시연회에 참석한 세종이 이칙음각주1) 이 조금 높다고 지적했다.
박연이 자세히 살펴보니 경쇠에 가늠한 먹이 조금 남아있었다. 그가 서둘러 남아있던 먹을 갈아내자 소리가 일정하게 되었다. 그처럼 음률에 밝은 군주가 있었기에 박연의 능력이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악서의 편찬
예악을 정비하려면 우선 정확한 악서(樂書)를 찬집하여 음악이론을 정비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리하여 박연은 1425년(세종 7년) 2월 24일, 세종에게 문신 한 사람을 악학(樂學)에 추가하여 악서 찬집과 악기 및 악보법 연구 등을 담당하게 해달라고 건의했다.
음악의 격조가 경전·사기 등에 산재하여 있어서 상고하여 보기가 어렵고, 또 《문헌통고》 ・ 《진씨악서》 ・ 《두씨통전》 ・ 《주례악서》 등을 소장한 사람이 없으므로 비록 뜻을 둔 선비가 있더라도 얻어 보기가 어려우니, 진실로 악률(樂律)이 이내 폐절되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문신 1인을 본 악학에 더 설정하여 악서를 찬집하게 하고, 또, 향악 ・ 당악 ・ 아악의 율조를 상고하여, 그 악기와 악보법을 그리고 써서 책을 만들어, 한 질은 대내로 들여가고, 본조와 봉상시와 악학관습도감과 아악서에도 각기 1질씩을 수장하게 해 주십시오.
이듬해 4월에는 장문의 상소를 올려 국가에서 주관하는 각종 제례악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음악에 관한 역대의 고전들과 제도들을 연구하고, 새로운 악서를 찬집하여 제례악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와 같은 박연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1430년(세종 12년) 윤12월 〈아악보(雅樂譜)〉의 편찬으로 1차적인 결실을 맺었다. 그 후 단종 대에 악학제조로 봉직하던 박연은 세종의 《어제악보》를 인쇄, 반포하기도 했다. 이런 그의 연구와 노력을 토대로 성종 대에 성현의 《악학궤범(樂學軌範)》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아악의 정비
세종은 1426년(세종 8년) 박연을 태상판관 겸 악학별좌에 임명했다. 악학별좌란 악학제조를 보좌하면서 예악을 관장하는 벼슬이다. 그때부터 박연은 본격적으로 아악의 정비에 나섰다. 아악(雅樂)은 궁중의식에 쓰이는 전통음악으로 좁게는 문묘제례악을 가리키지만 넓게는 의식에 쓰이는 당악(唐樂), 향악(鄕樂)까지 포괄하는 명칭이다.
당시 박연은 세종과 함께 종묘제례에 쓰이는 보태평 11성과 정대업 15성을 만든 다음, 1431년(세종 13년) 정월하례에 새로 제정된 아악을 연주했다. 그러자 세종은 몹시 기뻐하면서 박연에게 안마(鞍馬)를 하사했다. 이때 제정된 아악의 명칭은 다음과 같다.
보태평 11성 - 희문(熙文)·계우(啓宇)·의인(依仁)·형광(亨光)·보예(保乂)·융화(隆化)·승강(承康)·창휘(昌徽)·정명(貞明)·대동(大同)·역성(繹成).
정대업 15성 - 소무(昭武)·독경(篤慶)·선위(宣威)·탁령(濯靈)·혁정(赫整)·신정(神政)·개안(凱安)·지덕(至德)·휴명(休命)·순응(順應)·정세(靖世)·화태(和泰)·진요(震耀)·숙제(肅制)·영관(永觀).
당시 박연과 함께 숙원이었던 종묘제례악을 완성한 세종은 몹시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너는 내가 아니었다면 음악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고, 나도 네가 아니었다면 역시 음악을 만들기 어려웠을 것이다.
음악제도의 개선
박연은 예문관 대제학, 이조판서를 역임한 후 관습도감제조에 있는 동안 수많은 상소를 통해 음악에 관련된 각종 제도의 정비를 건의했으며, 이 중 상당수가 정책에 반영되었다. 그의 문집인 《난계유고(蘭溪遺稿)》에는 총 39편의 상소문이 수록되어 있는데, 대부분 《세종실록》에도 실려 있다.
그 중에서 내용적으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1430년(세종 12년) 2월에 올린 장문의 상소이다. 박연은 이 상소에서 종묘의 영신악(迎神樂), 악현(樂懸. 악대) 제도, 선농(先農)의 음악, 제향에서 사용하는 북, 헌가(軒架)의 편종 배치, 등가각주2) 연주자 양성, 일무각주3) 의 위치, 율관 제정, 악서 편찬 등 23개의 조항에 걸쳐 종묘제례악에 관한 종합적인 내용을 건의했다.
상소에는 특히 악공의 복식, 풍우뇌우단각주4) 의 제도, 단유각주5) 제도, 제사를 마친 후 폐백(幣帛)을 묻는 의식 등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박연이 단순히 제례악에 관한 것만 연구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제례 전반에 걸쳐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 방안을 제시했음을 보여준다. 그밖에 세종대에 박연이 올린 건의 내용과 새롭게 제정한 제도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430년(세종 12년) 9월에는 조회 때 사용하는 음악을 건의했고, 1431년(세종 13년) 8월에는 회례에 참여하는 남자 악사의 관복을 만들어 올렸다. 그해 11월에는 각종 의식에 사용하는 음악에 관한 내용을 건의했으며, 12월에는 정재 무동의 선발과 방향(方響. 철편으로 만든 편종과 비슷한 타악기) 제작을 건의했다.
1432년(세종 14년) 1월에는 종묘의 정전 앞뜰이 좁아 제례를 지내기 어렵다면서 그 앞에 있는 공신당(功臣堂)의 위치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해 3월에는 일무를 옛 제도에 맞게 시행하는 조건을 건의했다. 1433년(세종 15년) 3월에는 제례악에 사용하는 관복의 제도를 만들어 올렸으며, 1438년(세종 20년) 11월에는 중사(中祀)와 소사(小祀)에 해당하는 제단의 정비를 건의했다.
박연은 이처럼 세종 대 아악의 정비와 아악기의 제작, 음악에 관한 각종 정책과 제도 확립에 공헌했으며, 각종 제단과 제례 복식을 정비하는 등 조선 초기 국가 의례의 확립에 크게 기여했다.
다재다능한 능력
1431년(세종 13년) 이후 박연은 대호군·상호군 등의 무반 직에 임명되었지만 실제로는 계속해서 예악 정비에 관한 업무를 수행했다.
그해 6월 상호군 남급, 군기판관 정양 등과 함께 새로 만든 회례악기를 올렸고, 1433년(세종 15년)에는 정초, 김진 등과 함께 새로 만든 혼천의(渾天儀)를 올림으로써 그가 세종대의 과학기술 프로젝트에도 참여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해 7월 21일 세종이 신료들과 경복궁의 풍수에 대하여 논할 때 승문원(承文院) 터가 호걸이 날만한 명당이라고 말했다가 설화를 입어 파직되기도 했다.
1436년(세종 18년) 1월 판봉상시사, 그해 12월에는 첨지중추원사의 벼슬에 올랐고, 이후 공조참의, 예조참의, 인순부윤 등 고위직을 두루 거쳤다. 이후 동지중추원사로 재임하던 1445년(세종 27년) 박연은 명나라 황제의 생신을 축하하는 절일사(節日使)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때 사신의 숙소인 회동관을 나서면서 성문 출입증인 부험(符驗)을 잃어버렸다가 되찾아온 일이 있었다.
귀국한 뒤 서장관 김중량의 복명으로 그 사실을 알게 된 세종은 국가에 누를 끼쳤다 하여 고신(告身. 관리의 사령장)을 빼앗고 종사관들을 처벌했다.
1447년(세종 29년) 1월, 박연은 인수부윤으로 관직에 복귀했지만 이듬해인 1448년 3월 휴가를 얻어 고향에 갔을 때 누이가 죽자 나흘 만에 장사지내고 재산을 나누어 가져왔고, 악학제조로서 사사로이 악공을 데리고 영업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러나 박연은 1년 뒤인 1449년 5월 인수부윤으로 재차 복직되었고, 1450년(문종 즉위년)에는 중추원부사에 임명되었다.
1452년(문종 2년) 3월 12일, 김종서는 중국 사신을 영접할 때 여악을 폐지하고 남악을 사용해야 한다며 박연 같은 사람은 얻기 어려우니 그로 하여금 절차를 연구하게 하라고 상주했다. 그러자 문종은 음률에 정통한 수양대군의 관장 하에 박연이 조치를 강구하라고 명했다.
문종이 세상을 떠났을 때 박연은 정인지, 이사철 등과 함께 능지를 논의하기도 했다. 그가 음악뿐만 아니라 다방면에 걸쳐 뛰어난 지식을 보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기에 세종은 일찍이 ‘박연은 세상일에 통하지 아니한 학자가 아니라 세상일에 통달한 학자라 할 수 있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불행한 말년
1453년(단종 1년) 조선에서는 수양대군 일파의 계유정난으로 피바람이 불었다. 그런데 이듬해 9월 9일 집현전 학사인 박연의 막내아들 박계우가 안평대군의 역당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당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이때 의금부에서는 역도의 아비인 박연도 연좌하여 처벌하라고 주청했다. 그로 인해 박연은 고산(高山)으로 유배되었고, 며느리 소비(小非)는 공신 홍윤성의 노비가 되는 등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버렸다.
얼마 후 박연은 유배지에서 아내가 죽자 고향에서 장사지내게 해달라고 주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4년 뒤인 1458년(세조 4년) 유배에서 풀려난 박연은 고향인 영동 고당리(高塘里)에 머물다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부음을 들은 세조는 악학도감 성임에게 ‘배워서 박연을 따를 수 있겠는가?’라고 묻자 성임은 “박연에게는 미칠 수 없으나 배우면 혹시 깨달음이 있을까 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그처럼 당대에 박연의 음악적 재능을 따를 사람이 없었다.
성종 대에 이르러 박연과 아들 박계우가 신원되었고 며느리 소비도 방면되어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서거정은 《필원잡기》에서 박연은 앉으나 누으나 항상 가슴에 손을 얹고 악기 치는 시늉을 했고, 입으로는 휘파람으로 음률 소리를 내어가며 10여 년의 공을 쌓아 일가를 이루었다면서, 그가 조선의 기틀을 마련한 세종 대의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태어난 인물이라고 평했다. 그처럼 박연은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음악가로 추앙받았다.
현재 그의 고향인 영동에서는 해마다 난계음악제를 열어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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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 〈현대적 관점에서 본 난계 박연의 음악관〉 박정련. 민족문화논총. 2009.
- ・ 〈박연이 후세에 준 음악유산〉 이혜구. 사상계. 1959.
- ・ 《이도 세종대왕》 이상각. 추수밭.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