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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63. 2. 14, 프랑스 모를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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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13. 9. 2, 보헤미아 란 |
국적 | 프랑스 |
요약 프랑스의 장군.
프랑스 혁명전쟁(1792~99)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나중에는 보나파르트의 통치를 격렬히 반대했다.
변호사의 아들로 렌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대학시절인 1788년 파를르망(고등법원)의 권위를 제한하려는 루이 16세의 조처에 반대하는 학생시위를 이끌었다. 이듬해 일어난 혁명을 환영해 즉시 렌에서 국민 수비대를 조직했다.
1791년 의용군 대대의 중령으로 선출되었고 1792년 프랑스가 오스트리아·프로이센과 전쟁을 시작한 뒤에는 샤를 프랑수아 뒤 페리에 뒤무리에 장군의 북부군과 합류했다. 1794년 4월 사단장으로 임명되어 샤를 피슈그뤼 장군을 도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정복했고, 1795년 3월에는 피슈그뤼를 이어 북부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796년 3월 14일 라인·모젤 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6월 24일 라인 강을 건너 독일로 쳐들어가 뮌헨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엄청난 저항에 부딪치자 현명한 퇴각전술을 펴 슈바르츠발트를 지나 가을에는 알자스에 도착했다.
1797년 4월 자신의 친구인 피슈그뤼가 망명귀족들과 음모를 꾸미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문서를 발견했으나 이 증거를 뒤늦게야 파리의 공화국 정부에 제출했다. 그는 결국 쿠데타가 일어나 왕당파들이 정부에서 쫓겨나고 피슈그뤼가 체포당한 5일 뒤인 9월 9일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러나 1799년 4월에 이탈리아 주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0월에 파리로 귀환, 브뤼메르 18일 쿠데타(1799. 11. 9)에서 보나파르트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큰 몫을 했다. 그 보답으로 보나파르트는 그에게 라인군과 헬베티아 공화국 군대의 지휘권을 주었다.
1800년 12월 3일에 모로는 호엔린덴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싸움으로 오스트리아는 평화조약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으나 보나파르트는 그를 질투하기 시작했다. 통령이 된 보나파르트의 아내인 조제핀이 드러내놓고 자신을 모욕하자 그는 보나파르트 체제를 뒤엎으려는 음모를 꾸미던 피슈그뤼와 다시 관계를 맺었다. 1804년 2월 5일 그는 체포되어 보나파르트의 추방령을 받고 미국으로 떠났다.
1813년 프랑스 왕당파의 초청으로 유럽으로 돌아와 프랑스에 대항하는 동맹군에 합류했다. 8월 26~27일 드레스덴 전투에서 부상당해 몇 주 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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