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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56년 한국미술가협회가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 심사위원 선정에 불만을 품고 집단적으로 국전 출품을 거부한 사건.
1949년 10월 정부는 반공 자유민주주의 정치이념에 기초하여 미술계 내의 일제 잔재 청산과 좌우익 이념대립의 종식 및 새로운 질서 형성의 계기 마련을 위해 국전이라는 관영 공모권제도를 제정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작가군의 부족과 모범으로 따를 만한 전시제도를 알지 못해 화단 내의 일제 잔재 청산이 모호해졌다. 이에 국전은 일제시대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의 재판이 되었고 그 주도권은 선전 참여작가 다수를 포함하는 중진 미술인들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6·25전쟁을 전후로 월북·월남 작가군과 국내 미술대학 출신 작가의 제1세대 형성, 국제미술정보의 직접 수용 등으로 화단 구조의 재편성이 일어났다. 특히 거의 모든 기득권이 국전에 집중되어 있었던 당시의 화단에 대한 반발과 이권을 독식해온 기성작가군에 대한 불만이 모여 세력화되었다.
이러한 반발은 1955년에 시작된 국전분쟁과 1957년에 시작된 반국전(反國展) 세력의 현대미술운동으로 나타났다. 1957년에 형성된 반국전 세력의 현대미술운동은 국전 주도세력에 대한 조형이념적 측면에서의 헤게모니 싸움이었으나, 국전분쟁의 경우는 국전 보이코트 사건의 직접적 배경이었던, 국전에 집중된 이권을 둘러싼 인맥들간의 싸움이었다. 당시 국전 주도세력이었던 '대한미술협회'는 위원장에 도상봉, 부위원장에 윤효중·김인승, 고문에 고희동·김은호·이상범 등을 위시한 150여 명의 회원으로 결성되었으나 내부 갈등이 심했다.
1952년 대한미술협회는 미술 장르가 아니라는 이유로 서예분과를 없앴고, 1954년 총회 때 당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학장이던 장발이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나 미술인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도상봉·윤효중 등이 반발, 재투표를 실시하여 도상봉이 위원장으로 선출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대한미술협회와 별도로 1955년 장발을 위원장으로 하고 서예를 포함한 7개 분과를 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진과 그 학맥(學脈)으로 된 '한국미술가협회'가 결성되었다. 이로써 대한미술협회 내의 갈등이 대한미술협회와 한국미술가협회 간의 대립으로 나타났고 이들의 싸움은 국전분쟁의 형태를 띠었다. 이 분쟁의 핵심은 심사위원 선정으로 빚어진 국전 보이코트 사건이었다.
당시 이 사건의 주무(主務) 당국인 문교부는 한국미술가협회의 출품 거부 사태에 대한 수습책으로 처음의 국전 강행 입장을 철회하면서 국전 무기 연기를 결정했고 국회 문교분과위원회에서 소위원회를 구성하여 중재에 나섰다. 이에 대한미술협회는 한국미술가협회에서 추천한 3인을 심사위원으로 받아들인다는 조건으로 1956년 11월 10일 국전을 다시 열어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1961년 양단체가 한국미술협회로 통합되고 국전의 전면 개편이 단행되기까지 분쟁은 크고 작은 형태로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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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국전 보이코트 사건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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