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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전라남도 나주시 일대에 분포하는 삼국시대의 무덤떼.
나주시에는 다시면·동강면·반남면 등지에 많은 수의 고분이 분포하나 그중에서도 반남면의 고분군이 숫자나 내용 면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반남면고분군은 해발고도 98m의 자미산이 뻗어내리면서 형성된 나지막한 구릉과 평탄지에 분포하고 있으며 약 50기 가량이 확인되었다. 분포상태에 따라 대안리고분군(사적 제76호)·신촌리고분군(사적 제77호)·덕산리고분군(사적 제78호) 등으로 나뉜다.
대부분의 고분은 내부 매장주체시설이 전용(專用)의 대형 독무덤[甕棺墓]이다. 이는 다른 지역의 경우 독무덤이 유아용으로만 사용되거나, 혹은 다른 매장주체시설에 부수되는 배장적(陪葬的)인 성격이 강한 것과는 커다란 차이를 갖고 있다. 이러한 전용 독무덤의 사용은 영산강 유역 고분문화의 가장 큰 특징이다. 반남면고분군의 외형은 원형(圓形)·절두원형(截頭圓形)·방대형·전방후원형(前方後圓形) 등으로 구분되며 이중 원형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전방후원형 고분은 신촌리6호분과 덕산리2호분을 들 수 있는데 이 고분들은 일본 고분시대의 대표적 무덤인 전방후원분과 분구(墳丘)의 형상이 흡사하여 일제시대부터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 이유는 일본인 연구자들이 이러한 전방후원분을 일본 야마토[大和] 정권의 한반도 파병과 지배라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또는 '남선경영론'의 고고학적 근거로 삼으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실패했고 도리어 일본 전방후원분의 원류가 한반도에 있다는 주장이 발표되기도 했다.
반남면고분의 공통적인 구조는 우선 흙으로 커다란 분구를 축조하고 독무덤이 들어갈 정도의 크기로 분구 일부를 파낸 후 독무덤을 묻었는데, 2개 이상의 독무덤의 아가리를 잇대고 그 안에 시신을 안치한 이음식[合口式] 독무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독무덤의 안에는 장신구류가 주로 부장되며 바깥에는 약간의 토기류가 부장된다. 하나의 분구 내에 다수의 독무덤이 안치되어 있는데 이러한 집단묘의 특징은 분구 내에 묻힌 다수의 사람들이 혈연관계에 있음을 반영한다.
반남면의 고분 중에는 분구의 지름이 30~45m, 높이가 5~9m에 이르는 초대형이 있을 뿐만 아니라 신촌리9호분에서는 금동제 관(冠)·관모·신발·고리자루칼[環頭大刀] 등의 화려한 껴묻거리가 출토되어 이 고분에 묻힌 사람의 신분이 상당히 높았음을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이 지역에 백제의 중앙정부에 직속되지 않은 강력한 세력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고 이들은 마한의 잔여세력으로 추정된다. 이들이 반남면 일대에 대형고분을 축조한 시기는 대략 5세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백제의 지방정비책에 의해 이 지역의 토착적인 질서가 해체되면서 새로이 등장하는 것이 흥덕리고분과 대안리4호분 등의 굴식 돌방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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