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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평북 용천, 19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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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미상 |
국적 | 한국 |
요약 문학평론가.
네오 휴머니즘을 제시했고 세대논쟁에 참여했다. 본명은 형준(亨俊). 일본대학 철학과를 마치고 도쿄에서 잡지 〈대중지광〉을 펴냈다. 1926년 무렵 용천에서 소작쟁의를 지도했고, 1927년 동경학생 독서회사건으로 검거되기도 했다. 일본에서 돌아온 1932년 천도교 청년당 기관지인 〈농민〉을 편집하면서 농촌계몽운동에 힘썼으며 조선농민사 상임이사가 되기도 했다. 1943년에는 조선문인보국회 수필 평론부회 평의원으로 선출되었고, 해방 뒤에는 조선문학건설본부에 참가했다.
문단에 나온 것은 〈능동적 인간의 탐구〉(조선일보, 1936. 2. 23~29)를 발표하면서부터이다. 이어 〈네오 휴머니즘론〉(조선일보, 1936. 10. 1~9), 〈네오 휴머니즘 문제〉(조광, 1936. 12)를 발표했다. 휴머니즘의 무성격을 강조한 백철의 논의를 비판·극복하여 창조적 개성을 지닌 새로운 인간형에 기초한 행동적 휴머니즘인 네오 휴머니즘을 제시했다. 그러나 당시의 휴머니즘 논의에 비판적 지지를 보내고 있던 임화와 안함광으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았다. 1940년 무렵에는 세대논쟁에 참여하여 〈신세대의 개념〉이라는 글을 발표하고 딜타이류의 생의 철학으로서 세대론을 주장했다.
새로운 질서가 있는 신체제를 받아들이려는 태도로 서인석·박치우·신남철 등과 '신체제문화론'을 주도했는데, 이것은 최재서의 '국민문학론'으로 이어졌다. 〈신세대의 정신적 지표〉(인문평론, 1940. 2)·〈신세대의 문제〉(조광, 1940. 4) 등이 그 대표적인 글이며 해방 뒤에도 〈문학의 신세대〉(신문학, 1946. 4) 등을 발표했다.
1953년 임화·김남천 등과 함께 북한에서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월북 이후 발표한 〈민족문화 발전의 세 단계〉(1949), 〈장막희곡전집〉(1949) 등이 그의 활동을 가늠하게 해주고 있다. 또한 월북 전에 발표한 〈지도자 군상〉(1946)에서는 여운형·박헌영·김일성·허헌·김두봉·김원봉·무정·장건상·성주시·이주하·김성숙·홍남균·유영준·이여성·이강국 등의 민족 지도자들을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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