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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영국 잉글랜드 서머싯 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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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 8,717명 (2015 추계) |
면적 | 2.98㎢ |
언어 | 영어 |
대륙 | 유럽 |
국가 | 영국 |
요약 영국 잉글랜드 서머싯 주 멘딥 행정구에 있는 지역. 브루 계곡에서 바위산 봉우리에 이르는 언덕에 있다. 1892년 글래스턴베리에서 북쪽으로 2.4㎞ 떨어진 낮은 마운드에서 유사 이전의 철기시대 주거지 유적이 처음 발견되었다. 이 유적은 글래스턴베리에서 북서쪽으로 6㎞ 떨어진 미어에 있는 유명한 두 마운드 군과 함께 20세기초에 발굴되었다. 지금은 낙농, 양가죽 가공, 양가죽제품 제조업이 주요산업이다. 1536년에서 1539년까지 철폐가 진행되고, 대수도원은 건축용과 도로포장용 석재 채취소가 되었지만, 세인트메리 예배당과 대수도원 건물 일부의 유적은 아직도 남아 있다. 면적 2.98㎢, 인구 8,717(2015 추계).
개요
브루 계곡에서 바위산 봉우리(158m)에 이르는 언덕에 있다.
역사/문화
1892년 글래스턴베리에서 북쪽으로 2.4㎞ 떨어진 낮은 마운드에서 유사 이전의 철기시대 주거지 유적이 처음 발견되었다. 이 유적은 글래스턴베리에서 북서쪽으로 6㎞ 떨어진 미어에 있는 유명한 두 마운드 군(群)과 함께 20세기초에 발굴되었다. 사람들이 살던 때 이 주거지는 이탄 습지와 개천으로 이루어진 저지대에 있었다. 발굴된 토기 유형으로 보아 BC 60년경부터 로마가 침입한 AD 1세기 정도까지 사람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미어 유적에는 4세기에 사람이 다시 살기 시작했다.
현재 글래스턴베리의 '대수도원장의 재판소'(The Abbot's Tribunal)에 몇몇 발굴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대수도원 본관 건물은 영국 최초의 그리스도교도 왕으로 보이는 루시어스 왕의 요청으로 로마에서 온 선교사들이 166년에 지었다고 전해진다. 나무와 욋가지로 지은 이 본관 건물은 1184년까지 남아 있었고 아일랜드의 성인(聖人) 파트리티우스의 묘지가 있었다고 한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에는 웨식스 왕인 이너가 대수도원을 세웠다고 되어 있으나 이 켈트인의 수도원은 이보다 더 일찍 세워졌고 색슨족이 정복하기 전부터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있다. 이미 3명의 왕의 묘지였던 이 대수도원은 10세기에 매우 중요한 곳이 되었으며, 〈둠즈데이 북(Domesday Book)〉(1086)은 이곳이 이미 5개의 주에 땅을 갖고 있는 것을 비롯, 매우 큰 부를 축적했음을 보여준다.
1184년 대화재 이후 대수도원은 재건되고 세인트메리 예배당이 신축되기 시작했다. 이 공사는 교회 안의 분쟁으로 중단되기도 하면서 14세기까지 계속되었다. 1536~39년 철폐 이후, 대수도원은 건축용과 도로포장용 석재 채취소가 되었지만, 세인트메리 예배당과 대수도원 건물 일부의 유적은 아직도 남아 있다(→ 세인트메리 대수도원).
로마 지배 이후 영국의 전설적 통치자였던 아서 왕과 귀네비어 왕비의 무덤이 1191년 글래스턴베리에서 발견되었다는 주장이 나왔는데, 그 뼈들은 대수도원에 이장되었다.
13세기 중엽의 다른 전설에 따르면 초기 그리스도교도인 아리마디아의 성 요셉은 최후의 만찬 때 썼던 술잔 또는 십자가의 피를 담은 작은 병을 갖고 이 지역에 왔다고 한다. '성배 우물'(Chalice Well)은 16세기 초에 순례지가 되었다. 또 글래스턴베리가시나무(Crataegus monogyna praecox)가 성 요셉의 지팡이에서 돋아나왔다는 전설도 전해온다.
경제
글래스턴베리는 수도원 철폐로 가난해졌고 소모사와 견 방적산업도 발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와 배수시설을 개선하고 공유하던 황무지가 사유화되면서 번창해졌다. 지금은 낙농, 양가죽 가공, 양가죽제품 제조업이 주요산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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