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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30~55년 소련의 수용소 제도.
러시아어 'Glavnoye Upravleniye Ispravitelno - Trudovykh Lagerey'(교화노동수용소관리국)의 약어.
1930년대에는 최고 수백 만 명을 수용하기도 했다.
굴라크는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 1918~56〉(1973)가 나오고 나서 서방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책의 제목은 소련 전역에 흩어져 있는 노동수용소들을 군도에 비유한 데서 나온 것이다.
소련의 강제노동수용소 제도는 1919년 4월 15일자 소비에트 법령에 따라 시작되어, 1920년대에는 행정과 조직에 변화가 있어났고 1930년대 비밀경찰인 통합국가정치보안부(OGPU)의 통제 아래 굴라크를 설립함으로써 완결되었다(OGPU는 1934년 해체되어 그 기능이 내각부설 국가보안위원회로 넘어갔음). 굴라크에 수용된 사람들은 집산화 과정에서 체포된 농민들 외에 반체제 지식인, 반역 혐의가 있는 소수민족단체 구성원, 소련 공산당 내에서 세력을 잃은 사람, 외국 정부와 음모를 꾸민 혐의가 있는 여행자, 태업 혐의자 일 반범죄자 등 여러 부류였다.
역사상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굴라크에 수용된 적이 3번 있었다. 즉 제1차 5개년 계획의 초기였던 1929~32년과 스탈린 숙청의 절정기였던 1936~38년,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의 몇 년 동안이었다. 솔제니친은 1928년~53년 동안 "약 4,000만 명에서 5,000만 명이 수용소 군도에서 장기복역을 했다"고 주장했으나 학자들은 대부분 1936~53년 동안 줄잡아 600만~1,500만 명이 수용되었다고 보고 있다.
굴라크는 스탈린 이후 '자유화시대'에 공식해체되어 그 업무는 여러 경제부처에서 흡수했으며 남아 있던 수용소들은 1955년에 구이테카(GUITK:교화노동정착촌관리국)라는 새로운 조직으로 재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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