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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만 페르난데스

다른 표기 언어 (Silvestre) Antonio Guzmán Fernánde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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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도미니카 공화국 라베가, 1911. 2. 12
사망 1982. 7. 4, 도미니카 공화국 산토도밍고
국적 도미니카 공화국

요약 도미니카 공화국의 대통령(1978. 5~1982. 7 재임).

15세 때 집안의 직물가게에서 일했으며, 17세에 쿠라사오무역회사의 점포를 경영했다. 토지를 매입해 쌀을 경작했으며 곧 다른 농작물 수출에도 손을 댔고 1940년에는 부유한 목장주가 되었다. 도미니카 공화국 독재자인 라파엘 트루히요가 죽은 후 좌익인 도미니카 혁명당(PRD)에 들어갔다.

창당자 후안 보슈가 1962년 12월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농업장관으로 임명되어 1963년 9월 보슈가 물러날 때까지 함께 일했다.

1966년에는 보슈의 러닝메이트로서 부통령 후보로 나섰으나 선거에 패배했다. 도미니카 혁명당은 그 다음 선거를 보이콧했지만, 1978년 선거 때부터 당과 보슈 사이에 불화가 확대되었다. 보슈는 계속 선거를 거부하자는 입장이었으나 대부분 당원들은 정치에 다시 참여하기를 원했으므로, 결국 보슈는 새로 당을 만들기 위해 떨어져 나가고, 도미니카 혁명당은 대통령 후보로 구스만을 지명하기에 이르렀다.

후보로 나선 구스만은 당시 대통령인 호아킨 발라게르가 내건 도시 공공사업에 드는 엄청난 비용을 삭감하겠다고 약속했다. 1978년 5월 선거에서 구스만의 승리가 예상되자 군부 내의 발라게르 지지세력이 개표 중단을 명령했지만 당시 카터 미국 대통령은 발라게르를 지지하는 쿠데타에 반대할 것이라고 경고함으로써 이것을 무산시켰다. 카터 대통령은 또 구스만의 대통령 취임식에 고위급 민간·군사 대표단을 보낼 뜻을 밝혀 그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그는 18억 달러나 되는 외채를 안고 있는 심각한 경제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기술관료(technocrat)들로 내각을 구성했다. 당시 세계적으로 설탕값이 크게 떨어져 경제사정은 더욱 나빠졌으나 행정부가 적극적으로 농업정책을 편 결과, 첫해에 성공을 거두어 도미니카 공화국 역사상 처음으로 주요 농산물인 쌀과 콩을 자급자족할 수 있었다. 또, 시골에 학교와 보건소를 세웠으며 낙후된 전국 도로망을 보수하기도 했다.

1981년 구스만은 도미니카 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투표로 뽑힌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재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가 선택한 후보자가 당에서 지명받지는 못했으나 대통령 선거는 1982년 5월 평화스럽게 치러져 도미니카 혁명당 후보가 당선되었다. 취임식이 있기 전 구스만은 총에 맞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자살한 것 같았지만 공식발표에서는 사고사라고 했다. 그는 약 50년에 걸친 가혹한 독재정권, 외국의 간섭, 억압적인 과두정치 끝에 집권했지만 도미니카 공화국 정치에서 군부세력을 몰아내는 데 공헌했고, 국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주의 제도와 안정된 경제를 정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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