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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929년 민족차별교육·식민지노예교육에 반대한 광주지역 학생들의 시위를 계기로 전국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한 항일학생운동. 당시 학생운동은 6·10만세운동 이후 목적을 가지고 활기를 띠기 시작했는데, 그러던 중 전남 나주에서 광주로 통학하는 일본인 학생과 조선인 학생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이는 양국 학생들의 격돌로 진화했고, 신간회는 이 사건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광주학생운동은 약 5개월 동안 지속되었으며, 이는 반일민족독립을 절규하던 민족해방운동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배경
6·10만세운동 이후 학생운동은 사회주의사상의 보급으로 종래의 자연발생적인 운동에서 목적의식적 운동으로 급속히 전환되기 시작했다.
특히 학교·학년별로 조직된 비밀결사·독서회는 민족의식 고양, 식민지노예교육 철폐, 나아가서는 조선독립을 요구하는 학생운동의 핵심이었다. 광주학생운동의 기원도 1926년 11월 광주고보생과 광주농교생 10여 명이 조직한 성진회(醒進會)라는 학생비밀결사를 모태로 이루어졌다. 조선독립과 일제의 노예교육 폐지를 강령으로 내세운 성진회는 1927년 11월에 '독서회중앙본부'로 개편, 각 학교·학년·학급별로 조를 편성하여 민족의식을 고양시키는 학습을 실시했다.
1928년 6월 광주고보생 이경채(李景采)가 〈조선독립〉이란 선전문건을 교내에 배포하다가 발각되어 경찰에 구속당한 사건이 일어나자, 독서회가 중심세력이 되어 6월 26일부터 1학년을 제외한 광주고보생들이, 그리고 6월 29일부터는 광주농교생들이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광주고보생들의 동맹휴학은 5개월간이나 계속되었으며, 동맹휴학 1주년이 되는 1929년 6월 26일에는 '조선독립만세'·'식민지교육철폐'·'일본제국주의타도' 등의 전단이 광주고보 내에 살포되어 이미 학생시위의 움직임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운동의 발단
광주항일학생운동은 전남 나주에서 광주로 기차통학하는 광주중학생(일본인)과 광주고보생(조선인) 사이의 충돌로부터 시작되었다.
일본인 중학생 후쿠다[福田修三] 등이 광주여자고보 3년생인 박기옥(朴己玉) 등 여학생들의 댕기꼬리를 잡아당기면서 희롱하자, 이때 개찰구를 나오던 박기옥의 사촌 남동생인 광주고보 2년생 박준채(朴準埰)와 싸움이 일어나고, 급기야 나주역전에서 광주고보생들과 광주중학생들 사이의 편싸움으로 번졌다. 이에 일본인 순경들은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들을 편들고 박준채를 구타했다. 일본인 신문인 〈광주일보〉도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들을 옹호하는 보도를 했다.
역전충돌은 11월 3일에 일본인 학생과 조선인 학생의 집단적 격돌로 발전했다.
그날은 일제의 4대 명절의 하나인 명치절(明治節)이었으며, 또 광주에서는 '전남누에고치 600만 석 돌파축하회'가 열려 각지에서 많은 농민이 모여들었다. 또한 이날은 성진회 창립 3주년 기념일이어서 독서회중앙본부에서는 이날을 기해 일제히 궐기하자는 상호연락과 지시를 내렸다.
명치절 기념식을 끝낸 광주고보생들은 일방적으로 한국인 학생들을 비난하는 기사를 쓴 광주일보사를 습격, 윤전기에 모래를 뿌렸다. 또한 광주고보의 다른 학생들은 신사참배를 하고 돌아오던 광주중학 일본인 학생들과 광주천에서 맞붙어 광주역전까지 쫓아갔다. 이 소식을 들은 광주중학생 수백 명이 검도 등으로 무장을 한 채 광주역전으로 몰려들자, 광주고보생들은 농교생들과 합세하여 일본인 학생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 충돌에서 한국학생은 9명, 일본학생은 26명이 부상을 당했다.
한편 광주일보사를 습격했던 광주고보생들은 학교로 돌아와 투쟁방법을 토론하다가 광주역전에서 일본 학생들과 충돌했던 학생들이 들어와 사태를 보고하자 가두투쟁을 결행하기로 결의, 김병기(金炳基)·강윤석·김용대(金容大) 등의 지휘하에 목봉·삽·곡괭이 등으로 무장, 약 300명이 대오를 편성하여 거리로 나섰다.
그들은 '조선독립만세'·'일본제국주의타도'·'광주중학타도'·'식민지교육철폐' 등의 구호와 운동가를 부르면서 광주시가지를 돌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시민들도 합세하여 시위대는 한때 3,000명까지 달했다. 일제는 광주시내 모든 중등학교에 휴교령을 내렸으며, 한국학생 75명을 구속했다가 그 중 62명을 검사국으로 송치했고, 일본학생은 7명만을 구속했다가 모두 석방했다.
한·일 학생들의 충돌에 일제가 극히 편파적 대응을 하자, 광주시민과 학생들은 다시 분노했다.
신간회(新幹會)에서는 허헌(許憲)·김병로(金炳魯)·황상규(黃尙奎) 등을 파견하여 사태를 조사케 하고, 조선청년동맹과 학생전위동맹도 조사단을 파견했다. 신간회 광주지회를 비롯하여 재광주사회단체 간부들인 장재성(張在性)·장석천(張錫天)·강석원·박오봉(朴五鳳)·국채진(鞠採鎭) 등은 학생투쟁지도본부를 설치,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전국화를 위한 지원활동을 시작했다. 또한 제2차 봉기를 위해 광주고보생 오쾌일(吳快一)·이영범(李榮範)·김홍남(金鴻南), 광주농고생 김남철(金南哲)·정욱(鄭昱)·조길룡(曺吉龍), 광주사범 이신행(李信珩)·황상남(黃相南) 등이 중심이 되어, 광주장날을 기해 거사하기로 결정했으며, 〈학생대중아! 궐기하자〉라는 격문을 작성했다.
이 격문에서 ① 검거자를 즉시 우리들이 탈환하자, ②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를 확립시켜라, ③ 식민지노예교육제도를 철폐하라, ④ 민족문화와 사회과학 연구의 자유를 획득하자, ⑤ 전국학생대표회의를 개최하라 등의 9개 항목을 선언했다. 11월 12일 광주학생들은 제2차로 다시 봉기했다.
광주고보·광주농교·광주사범의 학생시위대는 광주형무소를 포위하고 '구속자석방'과 '조선독립'을 외치면서 격렬한 시위를 전개했다. 제2차 시위에서 광주고보생 약 300명과 농교생 약 100명이 경찰에 구속당했다. 일제는 약 70명에게 체형을 선고했다. 엄격한 보도통제에도 불구하고 광주학생시위 사실은 전남지역과 서울, 그리고 전국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학생들의 항일시위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서울지역의 학생운동
광주학생운동의 전국적 확대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한 신간회에서는 광주고등보통학교사건보고회를 개최하려 했다.
그러나 이것이 좌절되자 다음 단계로 민중대회를 열 것을 계획하고 '민중선언서'를 작성하여 1929년 12월 13일 안국동 네거리에서 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그러나 대회 개최 6시간 전 신간회 본부는 포위되고 현장에서 대회준비를 하던 조병옥 등 44명과 근우회·청년총연합회·노동총동맹 등의 관련자 47명을 합하여 91명이 검거되어 실패했다.
한편 이보다 앞서 학생전위동맹과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은 비밀리에 운동의 전국적 확대와 서울에서의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서울시내 각 학교별로 조직된 비밀독서회 간부를 소집, 광주학생운동의 진상과 결과를 상세히 전달하는 등 항일시위운동의 조직화를 위한 조치를 취했다.
이에 12월 2일 밤부터 3일 새벽 사이에 경성제대를 비롯하여 제일고보·제이고보·중동·경신·보성고보·중앙고보, 기타 청년단체 학생대표들이 주동이 되어 학생운동의 전국화를 위해 학생과 민중의 총궐기를 요구하는 격문을 살포했다.
격문 요지는 ① 검속된 광주학생 동지를 즉시 탈환하라, ② 식민지노예교육을 반대하라, ③ 살인적 폭도인 일본이민군을 구축하라, ④ 신간회와 청총에 민족적 환기를 호소하라는 등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투쟁으로써 광주학생운동을 지지·성원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격문주동자가 다수 검거되었으나, 학생들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12월 5일에는 제이고보가 동맹휴학을 단행했고, 6일 중동학교는 시위운동에 이어 동맹휴학을 단행했으며, 9일에는 독립만세시위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경신학교 300여 명의 학생들은 12월 9일 가두시위투쟁을 전개했다. 이것이 제1차 서울학생만세시위운동이었다.
이 운동에서 일제경찰은 모두 1,400여 명의 남녀학생을 구속했다.
일제는 학생독립운동의 전국화 추세에 당황, 신간회·청년총동맹 등 사회단체 간부들을 대규모로 구속함과 동시에 12월 13일부터 겨울방학을 조기에 실시하고, 삼엄한 초비상 경계망을 폈다. 이듬해 1930년 1월 초순에 휴교했던 학교들이 다시 개교하자 서울지역학생들의 제2차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제2차 서울학생시위운동에서는 여학생들이 총궐기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주동적인 역할은 이화여고보 4년생 최순복(崔順福)이 담당했다.
그는 근우회 간부의 지도를 받으면서 동교생 김진현(金鎭賢)·최윤숙(崔允淑), 여자상업학교의 송계월(宋桂月) 등과 협의하여 태극기 100장과 함께 격문을 살포했다. 이들은 실천여학교·이화여전·이화여고보·동덕·배화·진명·근화·정신 등의 학생대표들과 협의, 1월 15일 9시를 기해 대대적인 시위운동을 계획했다.
1월 15일 서울시내의 남녀학생 5,000여 명이 가두시위 혹은 교내시위를 전개, '조선독립만세'·'약소민족해방만세'·'일본제국주의타도'를 절규했다.
이날 시위는 3·1운동 이후 서울에서 전개된 최대 규모의 시위운동이었다. 일제는 1월 20일까지 임시휴교조치를 내렸으나, 1월 18일까지 학생시위는 계속되었다.
전국적 시위확대
광주학생운동은 1929년 11월 3일부터 이듬해 3월말까지 약 5개월 동안 계속되었는데, 참가한 학교가 194개교, 참가한 학생수가 전국에서 약 5만 4,000명으로서, 당시 중등학교급 이상 학생수 8만 9,000명의 약 60%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이 운동으로 구속 기소된 학생수는 1,642명으로 이중에서 4년 이상의 체형을 받은 학생이 3명이었으며, 퇴학당한 학생이 582명, 무기정학을 당한 학생이 2,330명에 달했다.
한편 일제의 탄압으로 학생운동이 대중운동과 결합하지 못했지만, 해외의 조선인단체들은 이 운동과 연대하여 행동했다. 중국 동북지방에서는 간도성의 조선인학교가 만세시위를 했으며, 지린[吉林]에서도 이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재만한인반제국주의동맹이 결성되었다.
일본에서도 조선인유학생학우회와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이 행동에 나섰으나 불발로 끝났다. 상하이에서는 안창호·윤기섭 등이 상하이 각 단체연합회를 조직하고 중국인단체도 이와 연대하여 행동했다. 베이징, 톈진, 미국 본토 및 하와이, 시베리아, 연해주 등지에서도 국내운동에 대한 지원이 있었다.
역사적 의의
광주학생운동은 반일민족독립을 절규하던 민족해방운동이었다.
광주학생운동에서 주목되는 것은 그때까지 없었던 새로운 구호, 즉 '약소민족해방만세'·'제국주의타도만세'·'피압박민족해방만세'·'무산계급혁명만세' 등의 구호가 전면에 나타났다는 점이다. 이는 3·1운동 당시의 '조선독립만세' 대신에 '피압박민족'·'약소민족'이란 구호로서 민족해방의 이론적 모색이 한층 구체화되어 나타난 것이다. 즉 식민지노예교육에 반대하고 조선인 본위의 교육을 주장함과 동시에 그들의 구체적인 요구를 민족해방이라는 정치적 요구에 결부시키고 있다.
광주항일학생운동은 1920년대 학생운동의 한 정점이었으며,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항일학생운동이었다.
이에 1953년부터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정해 광주학생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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