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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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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광주항일학생운동을 주도했던 비밀결사단체. 학생들이 주도했던 운동으로, 전국 각지의 학교에 각각 독서회의 조직이 있었다. 이를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한 단체는 광주의 성진회이며, 강령으로는 한국의 독립, 일제의 식민교육 결사 반대, 언론과 출판의 자유 요구 등이 있었다. 성진회는 학생들의 민족운동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광주 내의 여러 학교와 연합하여 동맹휴교를 일으켰고, 이는 반년 가까이 지속되어 수백여 명의 무기정학생을 발생시켰다. 이후 학교과 경찰의 강경대응으로 일단락되었으나 학생들의 항일의식은 1929년 한·일 통학생 충돌사건이 일어나면서 겉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1919년 3·1운동 후 학생운동은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전국 각급 학교에 조직되었던 비밀결사인 독서회의 조직을 통한 동맹휴학의 형태로 나타났다.

광주에서도 1926년 11월 3일 성진회(醒進會)가 조직되면서부터 비밀결사조직에 의한 조직적인 동맹휴학 투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성진회는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농업학교의 장재성(長載性)·왕재일(王在一) 등 16명이 조직한 비밀결사로, 임원은 총무 왕재일, 서기 박인생(朴仁生), 회계 장재성 등이었으며, 강령으로 ① 일제의 기반(羈絆)에서 한국의 독립을 쟁취한다.

② 일제의 식민지 노예교육을 절대 반대한다. ③ 언론·출판·결사의 자유를 요구한다는 것을 내걸었다. 그리고 회원의 임무로서 ① 사회과학연구의 정진, ② 비밀엄수, ③ 언문신문(諺文新聞)의 숙독, ④ 동지의 획득을 결정하였다. 성진회는 1927년 자진 해산하고 각기 학교단위의 비밀조직을 통한 항일운동을 벌이다가, 장재성이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 김상환(金相奐)·김보섭(金普燮)·윤창하(尹敞夏), 광주사범학교 학생 송동식(宋東植)·강달모(姜達模), 광주농업학교 학생 조길용(趙吉龍)·김순복(金順福) 등과 회합하여 독서회 중앙부를 조직했다.

장재성은 김기권(金基權)과 상의하여 학생소비조합을 만들어 자금조달에 힘쓰면서 각 학교별 독서회 조직에 힘써 광주고등보통학교독서회·광주농업학교독서회·광주사범학교독서회·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독서회 등을 조직하였다. 성진회·독서회의 조직은 광주지역 한국인 학생들의 민족운동을 위한 행동화에 기폭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들은 먼저 학원 내의 문제해결을 위한 동맹휴교를 일으켜 이를 민족운동으로 확산시켜 나갔다. 1927년 5월 하순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한일학생 교육제도 차이와 시설의 차이'를 지적하고 물리·화학 교실의 확충을 비롯한 요구조건을 내걸고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교장 시라이[白井]는 학생들의 요구조건 이행을 약속하여 일단 마무리되었으나 해를 넘겨도 요구조건은 실천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1928년 6월 26일부터 본격적인 항일동맹휴학이 일어났다. 1928년 4월 16일 광주와 송정리지방에 '조선독립선언문'이 살포된 것을 중대시한 광주경찰서가 광주와 송정리의 청년·학생들을 구속하였는데, 학교당국에서는 구속된 학생 중 광주고등보통학교 5학년생인 이경채(李景采)를 제적시켰다.

학생들은 이경채의 제적이유를 밝히라고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에 학생들은 동맹휴교를 결의, 6월 26일 전교생이 강당에 모여 진정서를 학교당국에 제출하고 등교를 거부하였다. 학교당국이 27명을 퇴학, 281명을 무기정학시키는 강경한 방침을 취하자, 학생들은 7월 10일 맹휴대책을 강구하기 위한 중앙본부설치를 결의하고, 끝까지 결사투쟁하는 내용의 격문을 작성·배포하였다. 8월 초순에는 중앙본부격문을 발표하여 일제의 주구·노예됨의 거부와 자유쟁취를 호소하였다.

동맹휴교는 그해 10월초까지 반년이나 계속되었다. 이에 따라 학생들의 희생도 컸는데, 수형자가 16명, 퇴학생이 40명, 무기정학생이 300명이나 되었다.

광주고등보통학교에서 동맹휴학이 진행되고 있을 때, 성진회·독서회 등에서 같이 활동하던 광주농업학교·광주사범학교 학생들도 공동보조를 맞추어 동맹휴교에 들어갔다. 6월 27일 광주농업학교에서는 송성수(宋聖秀)·김윤성(金允城)·유상걸(柳上杰)·나석현(羅碩鉉) 등이 중심이 되어 150명의 연명을 얻어 일본인 교사를 배척하는 진정서를 학교당국에 제출, 거부당하자 29일 동맹휴교에 들어갔다.

학교당국이 송성수 등 12명을 퇴교시키고 10여 명을 무기정학에 처하자 학생들은 동원부·연락부·모계부(謀計部)·탐복부(探復部) 등을 두어 동맹휴교를 체계화하였으며 식민지교육제도 폐지, 한일공학제 실시반대, 끝까지 투쟁을 호소하는 격문을 배포하기도 했다.

성진회·독서회 등의 비밀결사체에 의한 광주고등보통학교와 광주농업학교의 동맹휴교 투쟁은 학교당국·도학무과·경찰의 강경한 조치로 표면상으로는 종식되었으나 학생들의 반일감정은 더욱 심화되어갔다.

이러한 항일의식은 1929년 한·일 통학생 충돌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학생운동으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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