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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쑨원의 중국국민당이 광둥에 수립한 정부.
광저우[廣州] 정부라고도 한다.
1915년(民國 4)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제제운동(帝制運動)에 반대하여 호국군(護國軍)을 조직한 광둥·광시[廣西]·윈난[雲南]·구이저우[貴州]의 남서지방 각 성(省)이 1916년 5월에 광둥 성 자오칭[肇慶]에서 조직한 군무원(軍務院)을 광둥 정부의 기원으로 보는 설이 있다. 이 군무원, 곧 호국군 정부가 중화민국 정치사상 북방의 군벌정권에 대항하여 남방에 수립된 최초의 정권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군무원에는 쑨원[孫文]이나 중국국민당측이 전혀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국민당이 수립한 광둥 정부의 범주에 넣기는 어렵다.
국민당이 관여한 최초의 광둥 정부는 1917년 9월에 쑨원을 대원수로 하여 조직한 군정부(軍政府)였다.
이 정부는 1917년 7월 북방에서 안후이파[安徽派] 군벌 돤치루이[段祺瑞]가 정권을 장악하고 난 후 복고적인 군벌 장쉰[張勳]에 의해 해산된 정식국회를 부활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이에 대항하여 쑨원을 중심으로 민당파(民黨派) 국회의원들이 광둥에서 조직한 것이다. 이 정부는 일명 호법군(護法軍) 정부라고 하는데, 이는 돤치루이의 북방 군벌정권이 법통(法統)을 무시하고 중화민국 원년에 마련된 임시 약법(約法)에 근거하여 성립된 정식국회를 소집하지 않은 데 대항하여 법통을 옹호한다는 의미가 내포된 것이다.
이 정부는 쑨원과 광시·윈난 등 남서부 각 성 군벌들의 제휴에 의해 수립된 것이었기 때문에 양자의 견해가 북방과의 관계를 둘러싸고 대립하게 되면서 기반이 취약해졌다. 결국 1918년 5월 남서 군벌들은 대원수제였던 군정부의 조직을 7명의 총재(總裁)로 구성된 위원제 정부로 바꿈으로써 쑨원의 실권을 빼앗았다.
이에 쑨원은 정부 참여를 거부하고 광둥을 떠나 상하이[上海]로 갔고, 그후 남서 군벌간의 제휴도 깨지게 되면서 광둥 정부는 광시파의 지배하로 들어갔다. 1920년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민당파의 군벌 천중밍[陳炯明]은 광시파와 싸워서 이기고 광둥에 들어갔다. 이로써 군정부 곧 1차 광둥 정부는 소멸되었다.
1921년 5월 천중밍의 지원하에 광둥에서 쑨원을 대총통으로 하는 정부(광둥·중화민국 정부)가 조직되었다.
이것이 제2차 광둥 정부이다. 이로써 다시 북방의 군벌정권에 대항하는 남방의 정권이 수립되어 남·북 대치의 형세를 보이게 되었다. 제2차 광둥 정부는, 열강이 중국문제를 포함한 의제를 논의하는 워싱턴 회의가 열리자 미국에 광둥 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으나, 베이징 정권을 중국의 대표로 승인하고 있던 열강의 승인을 얻을 수는 없었다. 1922년에 들어서 쑨원은 북방의 군벌정권에 대항하여 적극적으로 북벌(北伐)을 개시하기 위한 준비를 진척시켜나갔지만, 천중밍은 북벌로 인한 광둥 성의 재원고갈 등을 우려하여 내치(內治)를 우선적으로 하자는 견지에서 북벌에 반대했다(→ 북벌전쟁).
쑨원은 4월에 광둥군 사령관 겸 성장(省長)으로 있던 천중밍을 해임하고 광둥군의 실권을 스스로 장악하여 북벌을 지속할 결의를 굳혔다.
그러나 6월에 들어 천중밍의 부하들이 정변을 일으켜 승리를 거두었고 쑨원은 간신히 군함을 타고 피신했다. 광저우를 수복하려던 시도가 실패한 데다가 북벌군이 패배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쑨원은 광둥에서 물러나 홍콩을 거쳐 상하이로 갔다. 이로써 2차 광둥 정부는 소멸하고 광둥에서의 정권은 천중밍에게 돌아갔다. 천중밍은 광둥을 자치적으로 통치했으나 주변에 서남 군벌들이 난립하고 있었으므로 그 세력이 광둥 성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연말에 광둥 성은 광시·윈난군의 공격을 받았다. 다음해인 1923년 1월 천중밍은 패전과 부하의 배반으로 은퇴성명을 내었고 광시·윈난 성 군대가 광둥에 들어왔다.
2월에 다시 광둥으로 돌아온 쑨원은 대원수에 취임하여 중화민국대원수부(府)가 성립되었다. 이것이 제3차 광둥 정부이다. 3차 광둥 정부의 초기에는 광둥 성 내의 군소 군벌들, 그중에서도 천중밍의 잔여세력과의 전투로 대외적인 발전을 보기 힘들었다.
1924년 1월의 국공합작(제1차) 및 국민당의 개조(改組)를 거치면서 국민당이 공산당을 받아들이고 소련의 지원을 얻어 군사력을 강화해나갔다. 쑨원의 광둥 정부가 처음으로 독자적인 혁명군을 조직할 수 있었던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이해에 제2차 봉직(奉直) 전쟁이 일어나자 쑨원은 북벌을 개시했다. 그런 가운데 10월에 베이징에서 군벌 펑위샹[馮玉祥]이 정변을 일으키고 쑨원의 북상(北上)을 요청하자 쑨원은 이에 응하여 베이징에 갔다가 다음해 3월 사망했다.
쑨원이 죽은 후 5·30사건, 사기(沙基)사건 등이 발생하면서 국민당은 혁명사업을 추진함에 있어서 강력한 통일정부를 수립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하여 7월에 '이당치국'(以黨治國 : 국민당의 일당통치)의 원칙에 입각한 중화민국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이것이 제4차 광둥 정부이며, 이 정부는 합의제를 채택했다. 4차 광둥 정부가 성립된 때에는 이미 윈난·광시의 군벌군을 쳐부수고 천중밍과도 타협을 하여 광둥 성에서 국민당의 지위가 공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6년 북방 군벌들간에 대규모 혼전이 벌어지자 이 기회를 이용하여 광둥 정부는 7월에 북벌을 개시했다.
그러나 국민당 내에서는 점차 세력이 커져가고 있던 공산당에 대한 반대세력(장제스[蔣介石] 등의 우파)과 국공합작을 처음과 같이 유지하려는 세력(왕징웨이[汪精衛] 등의 좌파) 및 공산당 간에 내분이 일어났다.
특히 북벌이 급속히 진행되어감에 따라 수도를 옮길 필요성이 생기자 양자는 새 수도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하다가 일단 수도가 우한[武漢]으로 결정되었고, 국공합작이 결렬되면서 난징[南京]으로 옮겨갔다. 광둥 정부가 우한으로 옮겨가면서(1927. 2) 광둥에 수립되었던 4차 광둥 정부는 사라진 셈이었다.
북벌의 완성(1928. 6)으로 중국을 통일한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수도를 난징에 두었고 이때부터 난징 국민정부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난징 정부 초기에 장제스에 반대하던 국민당 내 일파가 광둥에 잠시 국민정부를 두었고(5차 광둥 정부 : 1931. 5~1932. 1) 국공내전에서 밀린 난징 정부가 광둥으로 천도하여(1949. 1) 잠시 6차 광둥 정부가 출현했다. 일반적으로 4차까지의 광둥 정부를 군벌시대 남북대치의 한 축을 이루고 있던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광둥 정부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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