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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060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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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100. 7. 18, 예루살렘 |
국적 | 프랑스 |
요약
하로렌(Lower Lorraine)의 공작(고드프루아 4세로서 1089~1100 재위)이자 제1차 십자군 지도자.
(영). Godfrey of Bouillon.
1099년 7월 이슬람교도에게서 예루살렘을 되찾은 뒤, 팔레스타인에 세워진 예루살렘 라틴 왕국 최초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불로뉴 백작 외스타슈 2세이고 어머니는 하로렌 공작 고드프루아 2세의 딸 이다이다. 1076년 외삼촌에게서 하로렌 공작령 계승자로 지명받았으나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는 로렌 공작령을 자기 아들에게 주기 위해 남겨 두고 고드프루아에게는 프랑스 아르덴 지역 부용에 있는 영지를 주었다. 그는 황제가 작센인들과 전쟁할 때 충성한 대가로 1089년 로렌 공작령을 되찾았다.
공작령 통치에 실패한 그는 종교적인 동기와 모험에 대한 열망으로 형제인 외스타슈·보두앵과 함께 1096년 제1차 십자군원정에 참여했다. 십자군의 세속인 지도자였던 툴루즈의 레몽이 예루살렘 라틴 왕국 왕이 되기를 거절해 고드프루아가 왕위에 올랐으나 왕의 칭호는 거부하고 대신 '성묘 수호자'(Advocatus Sancti Sepulchri)라는 명칭을 썼다.
그는 이슬람교도가 지배하는 해안도시인 아스칼론·카이사레아·아크레와 휴전하고 이집트의 공격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으나, 많은 십자군 지도자들과 사이가 벌어졌다. 그때문에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유럽으로 돌아가거나 팔레스타인의 다른 지역에 거처를 잡았으므로 예루살렘은 무방비 상태에 빠졌다. 또한 고드프루아는 예루살렘 총대주교인 댕베르의 봉신이 되었는데, 그때문에 훗날 십자군의 세속인 지도자들과 성직자들이 왕국의 지배권을 놓고 서로 싸우게 되었다.
그가 죽자 형제인 보두앵 1세가 왕이 되었다. 통치자로서는 나약했으나 샤를마뉴의 후손으로, 큰 키에 금발을 한 잘생긴 고드프루아는 훗날 "완벽한 그리스도교도 기사이자, 전체 십자군원정사에서 어느 누구와도 비길 데 없는 영웅"으로 우상화되어 전설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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