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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0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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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118. 4. 2, 이집트 알아리시 |
국적 | 예루살렘 |
요약
십자군 원정 뒤에 세워진 예루살렘 왕국의 왕(1100~18 재위).
(영). Baldwin Ⅰ.
왕국 영토를 넓히고 지켰으며, 그가 만든 행정기구는 이후 200년 동안 프랑크족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는 토대가 되었다.
볼로뉴 백작 외스타슈 2세와 아르덴의 이다의 아들이며 제1차 십자군(1096~99)에 참가한 부용의 고드프루아의 동생이다(→ 고드프루아). 아나톨리아의 셀주크 투르크족과 싸우는 한편 군사 원조를 대가로 에데사(터키의 우르파)의 그리스도교도 군주 토로스에게서 에데사 공국 상속을 약속받았다.
그뒤 보두앵은 토로스를 폐위하고 에데사 영토를 차지했다(1098). 그는 새로 얻은 공국을 강화했고 아르메니아 귀족의 딸 아르다와 결혼해 아르메니아 토착민과 공국의 결속을 다졌다. 1100년 7월 형 고드프루아가 예루살렘에서 죽은 뒤 귀족들은 보두앵을 성묘(聖墓) 수호자(Advocatus Sancti Sepulchri:예루살렘 왕의 칭호) 자리에 앉히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소환했다. 왕국 남부에서 이집트의 파티마조와 맞서 세력을 떨쳤고 십자군 귀족의 반대를 누른 뒤 그해 12월 예루살렘의 왕이 되었다. 국내에서 자신의 세력을 굳힌 후인 1101년 해안도시 아르수프(이스라엘의 텔아르샤프)와 카이사레아(이스라엘의 호르바트케사리)를 장악했고 1112년까지는 아스칼론과 티루스를 제외한 지중해의 모든 해안도시를 점령했다. 1115년 왕국 남부를 지키기 위해 크라크 드 몽레알 성을 지었다. 1113년에 아내를 수녀원에 유폐하고 시칠리아 백작의 미망인인 사오나의 아들레이드와 결혼했으나 후계자 없이 죽었다. 그에게서 에데사 백작작위를 받았던(1100) 사촌 보두앵 뒤 부르가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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