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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술의 불복

자본주의 미학과 팝아트

미술과 자본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설명해 보자. 미술의 가치는 생산 과정에서도 그렇지만 소비 과정에서 판단된다. 오늘날에도 쉽게 확인할 수 있듯이 미술품은 극소수 부자들에 의해 향유된다. 물론 중간 정도의 자산을 소유한 사람들도 이에 동참하지만, 그들의 몫이란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미술을 생산해 내는 사람들, 오늘날 이들은 예술가라는 가히 듣기 나쁘지 않은 명칭을 부여받고 있지만, 실제로 그들의 노동을 통한 미술 생산이 그 명칭에 상응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미술의 생산이 전적으로 한 사회를 이끌어 가는 주도층의 미각에 호소하는 까닭이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들을 사회의 문화적인 지도층쯤으로 생각한다. 그들의 미각이 대중적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들의 미각이 형성해 놓은 미술은 한 시대의 주류로서 구가된다. 예술에 대한 미각은 지식과 더불어 철저하게 계급화되어 있다. 가령 부유층이 고급 오페라를 즐기고 노동자층이 값싼 영화관을 찾는 것은 대중적 취향이 다름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고급문화는 교육받은 것이며 이 기회는 결코 균등하지 않다.

약간 빗나간 비유이지만, 명품과 짝퉁으로 구별되는 소비의 차이가 또 다른 예가 될지도 모르겠다. 미술품은 매우 품위 있는 명품들이다. 희소성이 있다는 점과—대체로 미술작품들은 유일하다—손으로 직접 만들어졌다는 점—기술에 의한 복제품이 아니라는 점도 내포한다—그리고 무엇보다 값이 비싸다는 점이 그렇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적인 면만이 구별의 기준은 아니다. 미술로 그려진 혹은 미술에 담겨진 내용도 그렇다고 볼 수 있다.

다니엘 뷔렌(Daniel Buren), 무제, 1972년, 개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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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한 미술은 그 내용도 교양을 지닌 소비층의 미각에 알맞은 것이어야 한다. 이를테면 철학적인 해석이나 사유가 필요한 현대의 추상회화들은 고학력이 아닌 일반 대중에게는 호소력이 없다. 그래서 모더니즘 미술은 원래 그것이 출발했을 때에 지녔던 유토피아적이고 전(全) 민중적인 성격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미술작품에 상응하는 환경, 즉 현대적으로 지어진 미술관에 걸리고, 그곳을 찾는 교양 있는 자산가들에 의해 전시되고 팔리며, 그들이 소유한 집의 넓은 벽에 걸린다. 사실 잘 살펴보면, 현대의 미니멀 아트(Minimal Art)나 개념미술(Concept Art) 작품들은 대부분 현대식 건축물 내부에 걸려 있다. 그 크기나 형태마저도 그런 용도를 의도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팝아트(Pop Art)라 불리는 현대적인 미술 사조가 등장하면서 이러한 것들에 문제를 제기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팝아트가 그려 내고 있는 것은 교양과 자본을 소유한 상류층에게는 너무 속물적이며 일상적인 내용이기 때문이다. 코카콜라나 캠벨수프 캔 그리고 연예잡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타들의 모습은 상류층만 향유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매우 대중적인 소재들이며, 나아가 대중적인 소비경제를 전제로 존재한다.

대중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을 현대미술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역사는 한참이나 위로 올라간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풍속화나 정물화는 대중적인 의식을 배경으로 태어난 것들이다. 그림 속 과일이나 사람들의 일상은 역사화나 초상화 등에 비교하여 '의미'있는 것은 아니었다. 19세기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려 냈던 도시 풍경이나 사람들이 모인 술집, 세잔이 그린 정물화 같은 것도 비슷하게 설명될 수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전의 미술과 다르게 팝아트 예술가들은 현대적인 특수한 상황에서 대중의 일상과 사회를 보고 있다는 점이다.

피터 아르스텐(Pieter Aersten), 마리아와 마르타의 집에 머문 그리스도, 나무에 유화, 1552년, 빈 미술사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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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 압생트, 캔버스에 유화, 1876년 파리, 루브르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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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팝아트는 무엇인가? 팝아트라는 말이 처음 나온 것은 1950년대 말이었다. 미술 용어 겸 개념으로서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이는 로렌스 알로웨이(Lawrence Alloway)라는 영국의 미술비평가였다. 그는 화가였던 리처드 해밀턴(Richard Hamilton)의 콜라주 작품에 들어간 P.O.P라는 단어에서 착안하여 위와 같은 개념을 만들어 냈다. pop이라는 단어가 popular의 약자라는 사실은 금방 알 수 있다. 해밀턴과 그의 동료들이 추구했던 미술을 포괄해서 부르는 이 말은 미술이 담고 있는 형상적인 내용의 특징을 알려 준다. 즉 그림이 표현하는 대중적인 내용과 소재를 말한다. 이 그림은 그리기보다는 사진들을 오려 붙여 조합한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콜라주(Collage)라고 한다. 콜라주는 20세기 초반에 입체파 화가들과 다다이즘 화가들이 사용한 매우 현대적인 미술 방식이다.

그래픽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이미지들을 절묘하게 혼합해 내는 오늘날의 시점에서 리처드 해밀턴의 그림은 조악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조악함도 엄격한 의미에서 팝아트의 미술 의도였다는 사실을 감안해 보면, 팝아트가 얼마나 도전적이었나를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해밀턴이 그림으로 가져온 이미지들은 대중적인 잡지, 이를테면 성인 잡지, 상품 광고가 잔뜩 들어간 주간지나 월간지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더 나아가 이 이미지들은 영국의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 수많은 구호물품과 군수용품에 섞여 건너온 대중매체들이었다. 이것들은 영국 사람들의 시각을 자극했으며, 화가들에게는 낯설지만 새로운 이미지들이었다. 그때까지도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이러한 상업적인 사진 이미지들은 일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해밀턴의 그림은 그런 이미지들을 조합한 가상의 실내를 보여 준다. 현대식 가구로 꾸며진 거실에 옷을 벗은 남녀가 있다. 남자는 육체미 선수를 연상시키는 자세로 커다란 사탕을 들고 있다. POP라는 알파벳이 사탕을 포장한 종이 위에 찍혀 있다. 오른쪽에 있는 여자는 이상한 모자를 쓰고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댄 채 매우 관능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방 안에는 텔레비전과 녹음기 등 첨단 기술이 이루어 낸 가전제품들이 놓여 있다. 왼편으로 난 긴 계단 위에는 빨간 옷의 여자가 이상하리만큼 긴 흡입관을 가진 진공청소기로 계단을 청소하고 있다. 그리고 창밖에는 뉴욕 브로드웨이의 뮤지컬 간판이 번쩍거리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미국 사회에 대한 동경과 비판을 동시에 보여 주고 있다.

리처드 해밀턴, Just what is it that makes today's homes so different, so appealing?, 1956년, 종이 위에 콜라주, 튀빙겐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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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영국을 비롯한 유럽은 경제적으로 매우 낙후되어 있었고, 마셜 플랜으로 불리는 미국의 경제 원조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군사적, 경제적으로 강대국이 되어 버린 미국의 대중문화도 유럽으로 흘러 들어왔다. 미국은 당시 영국인들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의 나라로 비쳤다. 미국의 현대적인 기술과 대중매체는 유럽인들을 자극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배경으로 한 미국의 화려하고 대중적인 상업 이미지들은 유럽인들이 미국을 현대적이고 거대하고 자유로운 미래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해밀턴의 그림은 바로 이러한 이상향을 조금 희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의 그림은 소비적이지만 편안하고 폼 나는 미국식 생활 방식(The American Way of Life)의 단면을 보여 주는데, 해밀턴은 이에 대해 사뭇 조롱하는 태도를 취했다.

해밀턴은 피터 블레이크(Peter Black), 에두아르드 파올로치(Eduard Paolozzi) 등과 더불어 1950년대에 영국에서 활동한, 당시로 보면 신세대에 속하는 예술가였다. 이들로부터 시작된 팝아트는 이후 미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팝아트는 미국이 아니라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영국 화단의—당시 영국은 유럽 대륙의 주류에도, 미국의 신흥 화단에도 끼지 못하는 주변에 불과했다—낙후성을 벗어나고자 했던 국가적 예술 사업의 일환으로, 여러 가지 제도와 전시를 통해 그 존재를 알린 예술가 집단이었다. 또한 왕립 미술학교를 갓 졸업했거나 지방에서 나름의 작업을 해 온 신인들이기도 했다.

팝아트 예술가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경제적, 사회적으로 변화된 일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자 하였고, 특히 미국에서 유입된 새로운 생활문화에 대한 자신들의 반응을 그렸다. 이들의 의도는 1956년에 런던의 화이트 채플 갤러리에서 열렸던 전시 'This is Tomorrow(이것이 미래다)'를 통해 일반에 공개되었다. 이 전시는 총 열두 개의 테마로 나뉘어 열렸는데, 회화와 조각, 건축을 아우르는 다양한 미술 형식들이 동원되었다. 여기서 해밀턴은 존 맥해일(John McHale) 그리고 건축가였던 존 벌커(John Voelcker)와 함께 특별한 환경을 구성하였다. 이 공간에 해밀턴은 인기 있는 대중매체 이미지들을 이용하여 약간은 혼잡한 전망대를 만들었다. 공간 외벽에는 젊은 여성을 안은 로봇이나 마릴린 먼로의 사진들을 전시하였다. 한마디로 첨단의 이미지로 요지경을 만들어 놓았는데, 해밀턴은 자신의 전시 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의미로 가득 찬 상징들의 정의가 아니라 우리의 지각 능력의 발전이다. 시각적인 물질이 계속 증가되는 것을 우리가 수용하고 이용하기 위해서이다."

이들 작품의 특징을 대략 정리해 보면, 자본과 기술의 발달로 나타난 그리고 미래에 야기될 현상을 보여 주고 있는데, 해밀턴의 작업처럼 싸구려 잡지에서 오려 낸 이미지들을 콜라주라는 형식으로 묶어서 소비 지향적 현대 생활을 보여 주거나 로봇과 같은 존재가 등장하는 미래 사회를 보여 주었다. 이 모든 형상은 무에서 창조해 낸 것이 아니라 예술가들이 여러 가지 매체에 나타난 동시대의 이미지들을 엮어 놓은 것으로, 다양한 시각적 이미지들을 미술에 수용하고 활용할 눈과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해밀턴이 동료였던 피터와 앨리슨 스미스(Peter & Alison Smith) 부부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팝아트의 성격을 조목조목 잘 알 수 있다. 자신들의 예술은 "대중적(즉 익명의 다수를 위해 만들어진 것들처럼)이고, 유통기간이 길지 않으며(즉 순식간에 소비되어야 하고), 빨리 잊히는 것이어야 하고, 값싸고 다량으로 생산되며, 젊고(즉 젊은 소비층을 위한 것이고) 웃기며 섹시하고 조잡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것은 미술이나 고급문화가 구축했던 모든 기존의 원리원칙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반란이라고 할 수 있다.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값싸고 도회적인 사물들을 그려 내는 배경에는 20세기 중반부터 세계적으로 확대된 미국식 소비문화가 자리하고 있다. 팝아트는 그런 소비문화의 특징을 담아낸 예술이다. 팝아트 예술가들은 자신들을 둘러싼 사회적, 문화적 환경에 눈을 돌렸다. 추상미술이나 초현실주의 미술이 인간 내면의 심리와 심오한 철학적 원리를 탐구했던 것과는 달리, 팝아트 예술가들은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소비재에서 그들의 미학을 발견했다. 대중매체와 소비사회에서 넘쳐나는 광고나 상품의 포장이 그들을 둘러싼 환경이었다. 그런 환경이 만들어 낸, 어떻게 보면 키치(Kitsch)에 가까운 이미지들이 그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그들은 그 이미지를 복제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사실 '키치'는 원작을 조악하게 모방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팝아트는 그런 유치한 모방을 한 번 더 모방함으로써 전통적인 모방이론에 반항한 것이었다.

영국의 팝아트는 시대와 환경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진보적이고 실험적인 예술이었다. 그러나 조금 늦게 시작되었지만 더 영향력 있는 사조로 발전한 미국의 팝아트는 그 성격이 달랐다. 이제 미국의 대표적인 팝아트 예술가들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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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락 집필자 소개

독일 프라이브르크대학교 박사학위취득(서양미술사학), 카이스트 강의교수, 서양미술사학회 등 다수의 미술사학회 임원. 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

출처

미술의 불복종
미술의 불복종 | 저자김정락 | cp명서해문집 도서 소개

미술작품 속에서 나타나는 사회상과 인간의 모습들을 살펴보고 있으며, 미술이 전하는 메시지를 통해 아름다움 이상의 가치를 보여준다. 특히 미술과 권력의 관계에 대해 깊이..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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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미술과 사실의 모순적 관계 - 미술은 사실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허상을 생산한다 제욱시스의 포도나무 사실주의 미술사 사진과 사실주의 포토리얼리즘 사실주의의 현재와 미래 한국 미술의 사실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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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자본주의 미학과 팝아트미술의 불복종, 김정락,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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