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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술의 불복

한국 미술의 사실주의

한국의 현대 화단에서 사실주의는 서구의 그것에 비교할 때 내용보다는 형식적인 측면에 집착했다고 판단된다. 극사실적인 묘사 방식에서 현대성을 발견한 한국의 사실주의는 뛰어난 회화적 기법에 집중되었다. 이것에 반하여 정치적, 사회적 발언은 거의 배제되었다. 예를 들자면 김강용의 벽돌과 이석주의 일상적인 사물, 고형훈의 책과 돌, 대중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김창렬의 물방물 등은 그 형식만으로 판단할 때 현대적인 사실주의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그러나 현대적 사실주의의 경향에 근거하여 엄밀히 보면, 그들의 사실주의는 묘사에 치중한 나머지 사실성이 제기해야 할 문제의식을 결여하고 있다. 특히 그들이 그려 내는 전형적인 사물들, 즉 벽돌, 책, 물방울 같은 것들은 그 반복적인 표현으로 말미암아 동시대에 주류를 이루었던 추상화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김강용의 벽돌 그림은 그 환각적 표현에 대한 치밀함이 돋보인다. 그 치밀함은 화면 전체를 하나의 대상, 즉 벽돌을 쌓아 만든 구성상의 미학과 벽돌 표면의 질감을 충실하게 표현한 데 기인한다. 이러한 성격은 추상미술에서 일궈 온 모더니즘의 원리인 순수주의(Purism)에 더 가깝다. 김창렬의 물방울도 이와 유사하게 해석된다. 이들의 극사실적인 묘사는 그것이 형식적이든 내용적이든 간에 첨예한 부분을 드러내지 못한다. 이들의 그림은 사실성이 아니라 구성상의 문제에 관계되어 있으며, 그런 측면에서 동시대 추상미술의 형식주의에 접목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성이 미술 외적인 사실과 어떻게 교류될지에 대해서는 판단이 유보된 상태이다. 그들은 단지 사물을 묘사하는 추상화였을 따름이다.

이석주와 고영훈의 경우는 사실주의를 넘어 초현실주의(Surrealism)각주1) 에 가까운 그림이다. 그들의 세계는 메타포를 실재보다 우위에 둠으로써 사실성을 단지 보조적인 위치로 내려앉히고 있다. 이석주의 메타포는 사실주의적이 아니라 사실에 기인한 묘사를 통해 일종의 정물화를 이룩함으로써 가능했다. 고영훈의 경우는 더 극단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고영훈의 메타포는 거의 종교적인 차원에 다다른 것으로 사물들의 현상적인 수용보다는 관념론적인 의미를 추구한다. 고영훈의 사실주의는 형이상학을 사물에 이입시킨 변종이다.

간단히 정리하면, 한국의 사실주의는 서구의 현대 사실주의의 형식을 빌렸지만 그 속에 내재된 의식은 공유하지 못했으며, 추상 일변도인 미술계 속에서 오히려 추상미술에 가까워졌다. 다시 말해 앞에서 언급한 화가들의 작품들은 사실적으로 그려진 추상화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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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락 집필자 소개

독일 프라이브르크대학교 박사학위취득(서양미술사학), 카이스트 강의교수, 서양미술사학회 등 다수의 미술사학회 임원. 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

출처

미술의 불복종
미술의 불복종 | 저자김정락 | cp명서해문집 도서 소개

미술작품 속에서 나타나는 사회상과 인간의 모습들을 살펴보고 있으며, 미술이 전하는 메시지를 통해 아름다움 이상의 가치를 보여준다. 특히 미술과 권력의 관계에 대해 깊이..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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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한국 미술의 사실주의 미술의 불복종, 김정락,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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