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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득, 묻다
: 세 번째
이야기

인류 최고의 발명품은 무엇일까

인류 최고의 발명품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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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문명과 정신을 발전시킨 최고의 발명품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에 단 하나의 정답은 있을 수 없습니다. 거리에 잠깐 서서 눈에 보이는 사물의 이름을 대는 것만으로도 발명품의 목록이 되니까요. 지난 반만년 동안 인류는 이루 다 헤아리기 힘들 만큼 많은 발명품을 내놓았고, 그 덕에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었고 진화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무수한 후보들을 제치고 개인적으로 추린 세 가지가 있습니다. 바퀴, 시간, 사랑입니다.

바퀴

우리는 하루에도 이것을 수십 번 봅니다. 도로 같은 큰길은 말할 것도 없고 골목길처럼 작은 길에서도 어김없이 볼 수 있습니다. 어느 건물 안에나 있으며 사무실에도, 집에도 있지요. 한마디로 이것이 없는 공간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바로 바퀴입니다.

버스와 자동차, 기차, 자전거, 수레 같은 운송수단은 물론이고 여행가방에도 회전의자에도 바퀴가 달려 있습니다. 엘리베이터의 도르래도 바퀴의 일종이고, 공항이나 마트에서 흔히 보는 컨베이어 벨트도 바퀴의 굴러가는 힘을 응용한 것이니, 만약 바퀴가 없다면 일단 우리가 육체적으로 많이 힘들어질 것 같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사람과 물류이동이 꽉 막혀 고립되는 건 시간문제겠지요. 이 때문에 학자들은 인류의 문명을 발전시킨 중요한 발명품으로 바퀴를 꼽는데요. 바퀴는 언제 처음 등장했을까요?

지난 2011년 시리아와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등 광대한 사막 지역에서 무더기로 ‘나스카 라인(Nazca Line)’이 발견됐습니다. 그 전까지 나스카 라인이라고 하면 페루 등 주로 안데스 산맥 남쪽에만 존재하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공중에서 봐야 어떤 문양인지 식별이 가능할 만큼 거대한 이 문양의 정체는 대부분 새나 짐승이었지요. 그런데 중동지역에서 발견된 나스카 라인은 흥미롭게도 바퀴였습니다. 원이 아닌 바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바퀴살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바퀴가 한 개만 있는 것부터 시작해서 수십 개가 모인 것이 있고 모양도 둥근 바퀴, 네모 바퀴 등 다양할 뿐 아니라 크기도 작은 것은 25미터에서 큰 것은 70미터에 이르는데요. 제작 시기는 최소 2천 년 전으로 추정됩니다.

그런가 하면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 있는 고구려 고분 ‘오회분 4호 묘’에는 오른손에 망치를 왼손에 커다란 바퀴를 잡은 ‘수레바퀴신’이 그려져 있습니다. 고구려가 668년에 멸망했으니 최소 1천5백 년 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바퀴살이 달린 지금과 같은 형태의 바퀴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이미 테두리가 철로 둘린 바퀴를 사용했을 만큼 진보했고, ‘오회분 4호 묘’에 그려진 수레바퀴 신이나 대장장이 신은 고구려인이 철과 바퀴를 중요하게 여겼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 1오회분 4호 묘의 ‘수레바퀴 신’
    • 2오회분 4호 묘의 ‘대장장이 신’

인류가 바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이보다 훨씬 오래전인 B.C.3500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였습니다. 하지만 용도가 지금 같은 운송수단이 아니라 그릇을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원반에 진흙을 얹은 후 손으로 돌리면서 그릇을 빚으면 더 빨리 많이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 원반을 무거운 짐을 실어 나르는 운송수단으로 발전시키는 데는 약 250년이라는 세월이 더 걸려야 했는데요. 메소포타미아처럼 사막에 사는 사람들은 굳이 바퀴가 아니라도 평평한 나무 막대들 위에 짐을 실어 끌면 됐습니다. 모래 위나 얼음 위에서는 바퀴보다 썰매가 운송수단으로 더 적합하기도 하지요.

그러던 어느 날, 어떤 호기심 많은 사람이 ‘원반과 썰매를 결합시키면 평지에서도 무거운 짐을 쉽게 나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고, 훗날 바퀴로 불릴 그것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메소포타미아 남부, 수메르의 우르크 유적에서 발견된 B.C. 32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 문자에 실려 있다고 하는데요. 처음에는 단단하게 만든 나무 원반 두 개를 축에 부착시켜서 사람이 끌거나 황소, 야생 당나귀가 끄는 형태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이집트에서 테두리에 가죽을 덧댄 바퀴가 등장합니다. 오늘날 타이어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정작 타이어가 등장한 것은 그로부터 무려 4천7백여 년이나 흐른 19세기 중반이었습니다.

15세기에 콜럼버스가 아이티에서 고무를 가져왔지만 별 쓸모가 없어서 방치했다가, 18세기 중반에 우연히 고무로 연필의 글씨를 지울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에 힘입어 19세기 중반에 고무산업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는데 지우개가 대부분을 차지했고, 비나 눈에 젖지 않게 덧신이나 외투로 만들어 입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고무는 기온이 내려가면 굳고, 올라가면 끈적거리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여름에 고무 외투를 입고 마차를 타면 옆 사람과 붙어버리는 해프닝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이런 단점을 개선한 사람이 바로 미국의 발명가 찰스 굿이어입니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고무의 가공법에 관심이 많아서 고무로 만든 모자에 고무로 만든 바지와 코트를 입고 고무신발을 신고 돈은 한 푼도 들어 있지 않은 고무지갑을 가지고 다녀서 마을 사람들이 미치광이라고 손가락질했습니다. 그렇게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던 1839년, 서른아홉 살 때 생고무에 유황을 섞고 가열 처리하면 온도와 상관없이 안정적으로 강도와 탄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1844년 특허를 받았습니다. 그 후 자전거가 대중화되고 자동차가 등장하면서 고무 수요가 폭증했고 ‘고무의 시대’가 열렸으니 특허권을 가진 찰스 굿이어가 부자가 되는 건 시간문제였지요.

하지만 그는 평생을 가난뱅이로 살았습니다. 말이 좋아 특허권이지 너도 나도 허가 없이 무단으로 사용해서 상업화했고, 찰스 굿이어 자신은 상업화에 실패해 파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현실에 대해 비관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씨앗을 뿌렸는데 남이 과실을 가져갔다고 불평할 필요는 없다. 안타까워 해야 할 일은 씨앗을 뿌렸는데 아무도 과실을 가져가지 못하는 것이다. 인생을 돈의 기준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런 그의 삶이 안타까워서였을까요. 그가 사망한 지 30년 후인 1898년, 찰스 굿이어와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프랭크 시버링이 타이어 회사를 만들었습니다. 쓸모없는 천연고무를 쓸모 있게 만든 그의 이름을 따서 세상에 널리 알린 이 회사의 이름은 ‘굿이어’입니다.

시간

시간, 구체적으로는 하루가 24시간, 1년이 열두 달, 365일(윤년은 366일)인 것은 자연의 창조물이 아니라 인간의 발명품이자 관념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에티오피아에 13월이 있을 리 없으니까요.

2007년 9월 12일, 에티오피아에서 대대적인 밀레니엄 축하행사가 열렸습니다. 에티오피아에서는 그날이 바로 2000년 1월 1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에티오피아 달력에서 한 달은 모두 30일, 1년은 13월까지 있어서 13월 5일이나 6일에 한해가 끝나고, 우리 달력으로 9월 11일에 새해가 시작됩니다. 이런 식으로 셈을 하면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그레고리우스력보다 약 7년가량 늦습니다.

그곳에서는 또 우리의 아침 7시가 하루의 시작인 1시라고 하지요. 한때 프랑스에서도 (순전히 지금의 개념에서) 독특한 역법을 사용했던 적이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과 함께 등장한 공화국에서 역법 개혁을 시행했는데 모든 달은 30일로 통일시켰고, 남은 5~6일을 마지막 달에 몰아넣었습니다. 또 하루를 24시간이 아닌 10시간으로 나누었고, 1시간은 100분, 1분은 100초로 바꿨습니다. 일주일도 7일이 아닌 10일, 그래서 휴일은 9일 동안 일하고 다음날 주어졌지요. 이처럼 철저히 십진법에 입각한 시간은 14년 동안 유지되다 나폴레옹이 폐지하고 다시 그레고리력으로 복귀시켰습니다. 당시 프랑스 공화국이 십진법 역법을 도입했던 것은 기독교에 입각한 전통적 역법체계를 청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현재 세계 공통으로 사용하고 있는 그레고리우스력은 158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가 그해 10월 5일부터 14일까지 열흘을 없애고 10월 15일부터 새로운 월력을 시행토록 한 것에서 시작됩니다. 이런 역법 개혁을 단행한 것은 그때까지 사용하던 율리우스력이 1년에 11분 14초가 더 긴 오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16세기쯤 되니까 역법상 오차가 쌓여 자연현상과 열흘이나 차이가 나버렸습니다. 고대로부터 인류는 한해의 시작을 ‘춘분’에 두었는데 춘분은 3월(March)에 들어있고, 그래서 3월을 한 해의 첫 달로 삼았습니다.

춘분을 새해의 첫날로 삼은 이유는 밤과 낮의 길이가 같은 날이고, 이 날을 기점으로 낮이 길어지기 시작해서였는데요. 325년부터 춘분은 3월 21일로 확정돼 있었고, 로마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축일인 부활절은 3월 21일 춘분 후 보름이 지난 첫 번째 일요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열흘이나 차이가 나다 보니 밤과 낮의 길이가 같은 날이 열흘 먼저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춘분이나 부활절의 날짜 조정이 필요했고, 158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그해 10월 5일부터 14일까지 열흘을 없애버리고 10월 15일부터 새로운 월력을 시행토록 했습니다.

여기에는 신교도 탄압이라는 종교적 의도도 있었다고 하지요. 이 새로운 달력을 유럽 국가들이 곧바로 채택한 건 아닙니다. 2백여 년 동안 신교도가 많은 나라는 여전히 율리우스력을, 구교도가 많은 나라는 새로운 그레고리우스력을 썼고, 이 때문에 다른 국적을 가진 사람들끼리의 약속이 어긋나는 일도 허다했을 겁니다. 이처럼 달력에서 절대 권력의 흔적을 찾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7월은 영어로 ‘July’, 8월은 ‘August’입니다. 잘 알려진 대로 ‘July’는 로마제국의 영웅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인 율리우스에서 왔습니다. 그는 B.C. 45년 지중해를 통합하고 로마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후에 자신의 이름을 딴 율리우스력을 제정해서 로마의 모든 영토에서 사용하도록 했는데, 원래 이름이 ‘퀸틸리스(quintilis)’였던 7월을 ‘율리우스(julius)’로 바꾼 이유는 자신이 태어난 달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전의 달력에서 1년은 355일, 율리우스력에서 1년은 365일이었습니다. 더 늘어난 열흘을 어느 달에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대한 결론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당시 로마인들은 홀수를 행운의 숫자로, 짝수를 불운의 숫자로 여겼기에 홀수 달을 31일, 짝수 달을 30일로 정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1년이 366일이 됩니다. 그래서 당시에 1년의 마지막 달이었던 2월(February)에서 하루를 뺐고 이 때문에 2월은 29일이 됐습니다. 다시 말해 한 달의 크기가 천체의 운행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현재 2월 29일은 윤년일 때만 해당됩니다. 평년에 2월은 28일까지지요. 이렇게 된 것에 또 한 명의 절대 권력자가 등장합니다.

8월인 ‘August’는 로마제국 최초의 황제 옥타비아누스로부터 왔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꺾고 내전을 종식시켰습니다. 많은 경우에 전쟁, 특히 내전에서 승리를 거두면 노골적으로 권력의 정점을 향해 달리기 마련인데 옥타비아누스는 달랐습니다. ‘질서가 회복되었다’면서 전쟁 기간 자신에게 집중됐던 군사, 정치 결정권을 모두 원로원과 시민에게 돌려주겠노라며 공화정을 선언했고, 이에 감동한 원로원이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수여했는데, ‘존엄자’라는 뜻입니다.

이때부터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로 불리기 시작했는데 그는 라이벌조차 없는 로마제국의 1인자였으며 사실상 독재자나 다름없는 절대 권력자였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양아버지인 율리우스를 통해 과두제의 한계를 인식했기 때문에 군대 통수권과 법률 제정에 관한 권한을 끝까지 유지했습니다.

신기한 점은 율리우스가 황제가 되려고 했을 때는 암살까지 불사했던 원로원과 로마인들이 아우구스투스에 대해서는 전혀 반감을 갖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아우구스투스가 기분 좋게 남을 속이는 재주, 구체적으로는 ‘자신을 절대 위험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지 않는’ 재주가 있었다고 평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투스가 얼마나 큰 야심을 가졌으며 그 야심을 현실화했는지는 달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생일이 들어있는 달인 8월을 아우구스투스의 달로 이름을 바꾸었고, 또 자기 달이 율리우스 달보다 하루가 적은 것이 못마땅해서 가뜩이나 작은 달 2월에서 하루를 떼와 28일로 만들었으며, 원래 30일이었던 8월을 31일로 만들었습니다. 8월 다음부터는 홀수 달이 30일이 되고 짝수 달이 31일이 된 것도 이때 정해졌습니다. 결과적으로 로마제국이 2천 년 동안 번영하는 데 기틀을 놓은 율리우스와 아우구스투스가 남긴 절대 권력의 흔적을 우리는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셈입니다.

율리우스력에서 그레고리우스력으로 개혁하는 과정에 1582년 10월 5일부터 14일까지 열흘이 사라졌다면, 우리나라에서는 1895년 11월 18일부터 그해 말까지 43일이 사라졌습니다. 1895년 일본의 압력으로 그해 음력 11월 17일을 1896년 1월 1일로 고치고 앙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음력으로 셈했을 경우) 1895년 11월 18일부터 12월 30일까지 43일이 역사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또 1912년 조선총독부가 일본의 표준시를 따르도록 하면서 우리나라의 표준시가 30분 늦춰졌는데각주1) , 쉽게 말해 세종대왕 때 만들어진 해시계가 정오시를 가리킬 때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시계는 12시 30분을 가리킨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실제보다 30분 빠른 표준시가 누적되면 일진은 물론 윤달과 절기까지 연쇄적으로 어긋나게 되겠지요. 즉, 음력으로 받아놓은 제삿날이나 혹은 이삿날이나 결혼일 등 길일로 받은 택일이 과연 맞는지 장담하기 힘들다는 겁니다.

시간의 가장 기본 단위인 1초 역시 정확하지 않습니다. 1초에 대한 정의는 ‘평균 태양일의 86400분의 1’입니다. 문제는 천체의 운행이 늘 안정적이지 않다는 거지요. 이 때문에 4년에 한 번 2월에 윤일을 넣고, 매년 연말에 윤초를 1초 넣어 수정 보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세상 그 무엇보다 정확하다고 믿는 시간이란, 현재도 앞으로도 계속 오차를 수정해나가야 하는 사회적 발명품이자 관념입니다. 그리고 시간의 정확성과 그를 위한 세밀함은 점점 더 크게 요구될 것입니다. 해가 뜨면 일하러 나가 해가 지면 들어와 자고, 절기만 알면 굳이 몇 월 며칠인지 알 필요 없었던 농경시대와 달리 우리는 초 단위로 시간을 맞추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요.

한 가지 예로 라디오 방송을 듣는 청취자들에게는 들리지 않지만 방송이 끝날 무렵 PD가 DJ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끝 멘트 00분 00초에 맞춰주세요.”입니다. 초 단위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방송국 주조정실 시스템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넘어가 DJ 멘트가 잘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지구표준시도 먼 미래에 인류가 우주로 진출하는 시대가 되면, 우주표준시에 맞춰 달라질 확률이 높다고 하지요.

사랑

사랑을 인류의 발명품이라고 하면 많이들 놀랄 것 같습니다. 임상학적으로 사랑을 가장 잘 설명한 것으로 꼽히는 이 시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2천6백 년 전인 B.C. 7세기 그리스의 시인 사포가 쓴 것이니까요.

그대를 볼 때마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내 혀는 비틀거리고
가느다란 불길이 내 팔다리에 스며들고
내면의 천둥소리가 내 귀를 멀게 하고
내면의 어둠이 내 눈을 멀게 한다
- 사포, 〈질투〉 중에서

하지만 그래서 사포는 죽었습니다. 사랑이란 스스로를 불태우는 감정입니다. 그 감정을 이기지 못해 선덕여왕을 사랑한 지귀는 불귀신이 됐고, 사포는 레우카디아의 절벽에서 몸을 던져 자살했습니다. 서라벌의 온 거리를 불태우던 지귀는 선덕여왕의 이 제문을 받고서야 물러났습니다. ‘지귀는 마음에서 불이 일어 몸을 태우고 불귀신이 되었네. 푸른 바다 밖 멀리 흘러갔으니 보지도 말고 친하지도 말지어다.’ 그리고 사포가 몸을 던진 레우카디아의 절벽에는 여기에서 몸을 던지면 죽지 않으며 사랑으로 인한 고통을 치유할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포는 죽었습니다. 몸만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남긴 방대한 양의 시도 죽었습니다. 겨우 살아남은 것은 지극히 일부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녀의 시를 죽인 것은 공동체였습니다. 사포의 시가 본능적이고 열렬한 사랑에 대한 희로애락을 담았을 것으로 짐작되는바, 사포의 시를 죽였다는 것은 사랑을 죽였다는 말과 같은 맥락입니다. 아마도 숨을 쉬지 못하게 목을 조르는 방식이었을겁니다.

남녀의 사랑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실은 이기적인 감정입니다. ‘나’보다 ‘우리’가 우선하는 사회에서 그런 위험한 감정이 들어설 자리는 허용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랫동안 한 인간의 통과의례로 관혼상제(冠婚喪祭)를 꼽았습니다. 이는 혼례가 선택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상식적으로 하는 행위였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또 혼주가 당사자가 아닌 신랑(신부)의 아버지인 것은 혼례가 개인과 개인의 결합이 아니라 공동체와 또 다른 공동체의 결합이며 그들의 결정에 따른 것임을 알려줍니다.

결혼과 사랑은 결코 같은 것이 아니었고 같은 것일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런 현실은 사포가 살던 시대, 비교적 자유분방했다는 그리스에서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사랑은 남자와 남자가 하는 것, 결혼과 여자는 후세를 잇기 위한 절차와 도구쯤으로 여겼다고 하니까요. 이런 상황이고 보면 사포가 왜 레스보스 섬의 뱃사공 파온에게 끝내 사랑받지 못해 고통에 빠지고 말았는지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남자에게 여자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어떻게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지, 지금으로서는 참 이해되지 않는 일이지만 생각해보면 여자가 남자에게 사랑의 대상이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사랑이라는 자리를 가장 오랫동안 꿰차고 앉았던 것은 종교와 국가였습니다. 특히 중세에 얼마나 여자와 사랑을 탄압했는지에 대해서는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낭만’이라는 말이 탄생한 것도 이때입니다.

낭만! 국어사전에서는 이렇게 풀이합니다. ‘실현성이 적고 매우 정서적이며 이상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심리상태, 또는 그런 심리상태로 인한 감미로운 분위기.’ 어째 부정적입니다. 우리나라에서만이 아닙니다. ‘낭만적’이라는 말을 영어로 ‘Romantic’, 독일어로 ‘Romantisch’, 불어로 ‘Romantique’라고 하는데 모두 부정적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환상이나 상상으로 실재적이 아닌 것, 사실적인 근거가 없는 것, 과장, 거짓말, 이상화된 방식으로 구애하려고 하는 것, 또는 그런 행동 등으로 풀어놓고 있으니까요. 혹시 사람 사는 게 각박해져서 낭만적이라는 말이 부정적으로 변했나 싶지만 아닙니다. 낭만이라는 말은 처음부터 부정적이었습니다.

로맨틱이든, 로만티쉬든, 호망띠끄든, 낭만을 가리키는 말의 어원은 ‘로망(roman)’으로 12~13세기 중세 유럽에서 발생한 통속소설을 가리킵니다. 대체로 용감한 기사와 아름다운 귀부인의 사랑 이야기가 무용담과 함께 어우러졌는데요. 기사와 귀족 아가씨도 신분의 벽을 넘기 힘든데 하물며 귀부인, 그것도 주군의 부인과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대표적으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꼽을 수 있지요. 한마디로 금지된 사랑입니다. 그런데도 기사는 귀부인을 헌신을 다해 섬세하게 보살피며 사랑하는 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이로부터 나온 것이 ‘기사도 정신’이며, 후에 ‘젠틀맨의 매너’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로망은 예나 지금이나 르포르타주가 아니라 판타지입니다. 중세 유럽은 종교의 억압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쟁으로 개인의 육체와 정신 모두 속박을 받는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사회가 엄격해도, 아니 엄격할수록 인간은 어떤 방법으로든 열정과 감성을 해소할 숨구멍을 찾아내려 하기 마련입니다. 그 숨구멍이 중세 유럽에서는 돈키호테가 그처럼 열광했던, 무용담과 용감한 기사와 아름다운 귀부인의 사랑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로망에서 나온 말이 ‘로맨스(romance)’입니다.

로망을 읽으면서 혹은 보면서 로맨스 꿈꾸기, 지금까지도 인류가 반복하는 대표적인 판타지라고 할 수 있지요. 이런 이유로 ‘낭만적 사랑은 12세기 유럽에서 발명된 것’이라고 하는데요. ‘발명’이라는 어휘선택이 의미심장합니다. 낭만적 사랑을 발명된 것이라고까지 말하는 이유는 로망이 등장하기 전인 12세기 이전에는 사랑을 남녀만의 것으로 여기지 않았고,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평균수명이 40세가 되지 않았고 그나마 질병과 가난, 전쟁에 시달리느라 하루하루가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던 시대에 남녀의 사랑은 오히려 공동체를 위협하는 감정이었을 겁니다. 견우와 직녀가 불륜 커플이 아니라 엄연한 부부인데도 옥황상제가 헤어지게 한 이유가 둘이 서로 너무 사랑해서 자신의 본분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었을 정도니까요.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신분과 성별에 따라 정해진 운명을 살아야 했고, 또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시대에 이에 저항하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는 그야말로 획기적인 발명품이었습니다. 발명가는 주로 유랑시인들이었겠지요. 이렇게 현실에서는 공동체에 부정당하고 상상의 이야기 속에만 존재하던 사랑이 비로소 개인의 삶으로 들어와 당당히 실행할 수 있게 된 것은 서양에서는 19세기, 우리나라에서는 20세기에 이르러서입니다. 그 시점은 개인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갖게 된 것과 일치합니다.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자유’를 얻기까지 인류의 투쟁이 얼마나 길고 혹독했는지는 지난 역사를 통해 알려진 대로지요. 그러니 사랑을 할 때는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는 이 사랑이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이자 수천 년에 걸친 투쟁 끝에 얻어낸 산물이라는 사실을. 동시에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뿐 아니라 용기가 없다면 진실로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진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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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선경 집필자 소개

1970년 전북 부안 출생, 1993년부터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글을 쓰고 있으며, 2011년부터 매일 아침 KBS 클래식 FM [출발 FM과 함께]에서 [문득 묻다], [그가 말했다] 등의 글로..펼쳐보기

출처

문득, 묻다: 세 번째 이야기
문득, 묻다: 세 번째 이야기 | 저자유선경 | cp명지식너머 도서 소개

과학, 신화, 예술 분야의 보다 깊이 있는 이야기 전개로 독자들의 지적 갈증을 채워준다. 책에는 길 위에서, 혹은 집에서, 그리고 하늘과 풍경을 바라보면서 문득 궁금해..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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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01. 길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색은 얼마나 될까? 노을은 왜 붉을까? 찰나는 얼마 동안일까? 안개일까, 스모그일까? 석탄과 석유는 원래 무엇이었을까? 누가 신호등을 발명했을까? 기차처럼 영혼에도 속도가 있을까? 소음은 어떤 영향을 끼칠까? 별을 보고 사랑과 영원을 맹세해도 좋을까? 별도 소리를 낼까? 견우와 직녀 사이에 놓인 거리는 얼마일까? 인간이 만든 물건 중 가장 멀리 날아간 것은 무엇일까? 우주에서 내가 보일까? 왜 가면 쓰는 것을 금지할까? 기상을 언제부터 연구하기 시작했을까?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릴까? 사이렌은 무엇을 의미할까? 나비가 바다를 건널 수 있을까? 비가 내리면 새의 깃털이 무거워져 떨어지지 않을까? 다리 없는 새가 있을까? 집시는 어쩌다 거리를 떠돌게 되었을까? 여자는 왜 수요일 오후 3시에 제일 못생겨 보일까? 지름신의 아버지는 누구일까? 바라만 봐도 아기가 생기는 나무는 무엇일까? 고가공원은 어떻게 등장했을까? 안개일까, 구름일까? 인간은 꼭 지상에서만 살아야 할까? 인류 최고의 발명품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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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인류 최고의 발명품은 무엇일까문득, 묻다: 세 번째 이야기, 유선경, 지식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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