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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국민족지

통일 과정과 민족 융합

통일과 문화의 공동 창조

중국은 예로부터 하나의 다민족 국가였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2,000여 년 전부터 이미 통일된 다민족국가였다. 중국의 영역, 역사와 문화는 모두 중국의 56개 민족 및 그 조상들이 수천 년의 발전과정에서 함께 개발하고 창조해낸 것이다. 예를 들면, 화하(华夏)족은 가장 먼저 황하 유역의 섬서와 감숙(陕甘) 및 중원 지역을 개척하였고, 동이(东夷)는 가장 먼저 연해 지역을 개척하였다. 그리고 묘족(苗族)과 요족(瑶族)은 제일 먼저 장강(长江), 주강(珠江), 민강(闽江) 유역을, 티베트족(藏族)과 강족(羌族)은 청해와 티베트를, 이족(彝族)과 백족(白族)은 서남 지역을 개척하였다. 만주족(满族)과 시보족(锡伯族), 오원커족(鄂温克族), 어룬춘족(鄂伦春族)의 조상들은 가장 먼저 동북 지구를 개척하였고, 흉노(匈奴), 돌궐(突厥), 몽골(蒙古) 등의 민족은 몽골 초원을 개척하였다. 그리고 여족(黎族)은 해남도를, 고산족(高山族)은 대만을 개척하였다.

중화 문명은 세계상 하나의 독특한 문명으로서 그 역사가 유구하다. 그러한 문명의 기원은 각 민족의 창조와 발명에 기반을 둔다. 예컨대, 한족은 가장 먼저 종이를 발명하고 인쇄술을 개발하였으며 지남침, 화약 등을 발명하였다. 위구르족과 여족은 가장 먼저 목화의 재배와 면방작업을 배웠다. 회족 건축가 역흑질아정(亦黑迭儿丁)은 원대도(元大都, 지금의 북경)를 기획 및 건설함으로써 북경이 세계적인 도시로 부상하는 데 기반을 닦아놓았다. 티베트족이 보존한 고대 불교학의 저명한 저작 『간주이(甘珠尔)』와 『단주이(丹珠尔, 장문 대장경)』는 오늘날 중화 문화의 두 보물로 간주된다. 중국어 표준어 발음 역시 몽골어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수천 년 이래 중화 민족의 단결과 통일은 항상 중원 지역을 중심으로 한족을 주체로 발전 확장된 것이다.

일찍이 전설시대, 즉 지금으로부터 4, 5천 년 이전 각 민족의 조상들은 동아시아 현 중국의 영토에서 생활하였다. 당시 중원의 황하 유역에는 주로 하족(한족의 조상)이 살았고 동북의 회하 유역과 태산 인근에는 동이(东夷)가 있었다. 남방의 장강 유역에는 삼묘(三-苗)가 살았고 서북 지역의 황하와 황수(湟水) 인근에는 강족이 살았으며, 북방의 몽골고원에서는 훈육(荤鬻)이 살았다. 당시 하족과 주위 각 민족은 서로 교류의 관계에 있었다.

문자 기록의 역사에 의하면, 하(기원전 21세기~기원전 16세기), 상(기원전 16세기~기원전 11세기), 주(기원전 11세기~기원전 771년), 춘추(기원전 771~기원전 476년), 전국(기원전 476~기원전 221년)시대에 당시 민족 간의 관계는 더욱 밀접하였다. 황하 유역에는 하, 상과 주족(周族)이 있고 동부에는 이족(夷族), 동북에는 숙진(만주족의 선조), 북방과 서북에는 적(돌궐의 선조), 융(戎), 강(羌), 저(氐), 남방에는 만(蛮), 월(越) 등 민족이 있었다. 이 시기 하족, 주족과 상족을 중심으로 이(夷), 강, 적, 묘와 만(蛮) 등의 종족들을 흡수하여 화하족(华夏族)으로 발전하였으며 연달아 하, 상, 주왕조를 건립하였다. 따라서 국가의 영역은 갈수록 확대되었고 그 속에 포용된 민족 또한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진과 한나라 시기(기원전 221~220년)에 화하족은 기타 여러 민족들을 흡수하여 한족을 형성하였다. 한조(汉朝)의 영역은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오늘날 신강의 여러 민족을 흡수하였으며, 북쪽으로는 장성을 넘어 남흉노를 통일하였고 내몽골을 통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그 행정구역이 5령(현 복건, 광서, 광동성)으로부터 해남도까지 이르렀다.

수나라와 당나라 시기(581~907년)에 이르러 중원 왕조의 영역은 한층 더 확장되었다. 수, 당 두 왕조 모두 한족과 소수민족이 연합하여 건립한 정권이다. 수조는 주로 한족과 선비족(鲜卑族)의 연합정권으로서, 조정(朝廷)에서 선비족 대신(大臣)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았으며, 수조의 황후들 중에도 선비인들이 많았다. 당조 초기 중앙정부의 관원들 중 절반 정도가 모두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었다. 당조 후기에 이르러 당조 군대 중의 고급 장교들은 그 절반 이상이 거란, 돌궐, 위구르, 고려 등 소수민족들이었다. 당조 정부는 북방 소수민족의 기병에 의존해 북쪽으로 흑룡강과 바이칼 호에 이르는 지역, 서쪽으로 파이카십 호와 중앙아시아 양하 유역을 통제하였다. 오늘날 중국의 영역에서 티베트를 제외한 기타 지역 및 민족들은 모두 당나라의 구성원으로 되었다.

원나라 시기(1271~1368년)에 이르러 그 영역은 “한, 당조 영역을 중심으로 더 확장되었고, 구성원들도 한, 당나라 시기보다 더 증가되었다(有汉唐之地而加大, 有汉唐之民而加多)”고 한다. 티베트의 티베트족을 포함한 모든 민족은 모두 하나의 중앙정권 내에 통일되었다. 청나라 시기(1644~1911년)에 이르러 기존의 통일된 국면은 더욱 공고해졌다.

역사상의 민족 융합

수천 년 이래 중화 민족의 밀접한 교류, 단결 및 통일의 과정은 여러 민족의 대융합이 이루어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여러 민족은 이동, 잡거, 통혼 등 여러 가지 형식을 통해 문화상에서는 서로 학습하고 혈통상에서는 서로 혼합되어 서로가 서로를 포함하는 관계를 형성하였다. 그럼으로써 각 민족, 지역 간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중화 민족의 공통된 문화와 심리적 특징을 형성해냈다.

중국의 주체 민족인 한족의 형성은 여러 민족이 대융합한 결과이다. 진나라 초기 중국은 화하, 동이, 북적, 서융, 백월 등 5대 민족 집단이 있었다. 고서에는 “주나라 문왕은 서이인이다(周文王西夷之人也)”라고 적혀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나라 사람은 원래 화하족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혹자의 고증에 의하면, “순은 동이인이고 공자의 제자 관중도 오랑캐이다(舜为东夷之人, 孔子的弟子管仲名夷吾, 也是夷人)”라고 했다. 당시 적인(狄人)부락은 대부분 황하 이북에 분산되었으며 화하인과 통혼한 기록도 많이 있다. 예컨대, 진(晋)나라의 국군인 중이(重耳)의 어머니가 바로 적인이었다. 남방의 오나라와 월나라에도 많은 월인들이 있었다. 진나라가 통일된 후 중원 지역에 흩어져 있던 이, 적, 융, 월 등 민족은 대부분 화하족으로 융합되었다.

한나라 이후 특히 소수민족들이 중원 지역으로 진입했을 때, 그들은 대규모적으로 한족 집단에 융합되었다. 예를 들면, 서진(西晋) 말기에 선비, 갈, 저, 흉노 등 5개 소수민족은 중원에 진입하여 각기 열 몇 개의 국가를 건립하였다. 이를 역사상에서 5호 16국(317~439년)이라고 한다. 100여 년이 지난 뒤 이러한 소수민족은 한족이라는 큰 민족의 물결 속으로 융합되었다. 지금까지 한족 성씨 가운데는 여전히 흉노의 성씨인 “호연(呼延)”이 보존되어 있다.

여진족의 금나라(1115~1234년)가 황하 유역을 점령한 후 “몇백 만”의 여진군들이 하남으로 이주하였으나, 결국 모두 한족으로 동화되었다. 원래 동북에 거주하고 있던 원래의 만주족들도 청조가 건립된 후 대부분 관내로 들어갔으며, 청조 말기에 이르러서는 만주족 문자와 언어를 버리고 모두 한어, 한문을 사용하였고 심지어 음식, 거주 등 방면에서도 모두 한족 관습을 따랐다.

중원으로 들어간 소수민족들 가운데서 일부 민족들은 주동적으로 한족의 문화에 동화되었다. 예를 들어, 선비족인 북위 효문제(471~499년)는 선비족으로 하여금 한어를 배우고 한족 복식을 따르도록 하였으며, 한족 성씨로 고치고 한족과 통혼하는 것을 격려하였다. 이를 통해 선비인과 한족의 융합을 촉진하였다. 또한 일부분 소수민족 통치자들은 한화를 반대하였다. 예를 들어, 김세종은 “한족 성씨로 바꾸거나 남방 사람들의 의복을 착용하는 것을 엄격히 금하였고, 이 규정을 어기였을 경우 호되게 처리한다(禁女直不得改称汉姓, 学南人服装, 犯者抵罪)”고 규정하였다.

청태종 역시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린 적이 있다.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전통을 버리고 한족을 모방하며”, “다른 나라의 복식을 모방하고 머리를 묶으며, 발을 동이는 사람은 큰 벌을 받는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만주족과 한족이 통혼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만주족이 상업과 농업에 종사하는 것을 반대했으며, 심지어 동북 3성을 봉쇄하여 한족들이 그곳을 개간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하지만 민족의 융합은 역사 발전과정에서의 필연적 추세이자 하나의 진보적인 현상이다. 특히 중원 지역의 한족보다 사회경제 발전수준이 낮은 소수민족이 한족문화가 농후한 황하 유역에 진입하게 되면 결국 한족문화에 융합될 것임이 틀림없었다. 엥겔스(Engels)는 “문명 수준이 낮은 정복자들도 대부분의 경우 자신들이 정복한 나라의 비교적 높은 경제적 수준에 적응해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정복한 인민들에 의해 동화되거나 심지어 대다수 사람들은 정복한 나라의 언어를 사용하였다”고 말하였다. 중국 역사에서 중원에 진입한 소수민족 통치자들의 경우 모두 이러한 문화 융합의 결과를 가져왔다.

원대의 몽골족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원나라 통치자들은 일찍이 민족 격리정책을 엄격히 실행하였다. 어느 학자가 단언하기를, “원조는 몽골주의를 신봉하였으며 한문화와 한인은 존중을 받지 못했다”고 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몽골 통치자들은 통치의 수요를 위해, 1233년 연경(燕京)에 국자학(国子学)을 세우고 몽골 자제들로 하여금 한어와 한문을 배우게 하였다. 구비라이(忽必烈)는 왕자와 가까운 신하들의 자제들에게 한족의 유가를 배울 것을 요구하였고, 황자는 모두 이중 언어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어느 학자의 고증에 따르면, 원조 과거(科举)의 전후 16과에서는 1,139명의 진사를 채용하였는데, 그중 몽골족이 300여 명이나 되었다. 사실 한문의 경적에 몰두하고 시험에 몰두한 몽골의 자제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원나라 조정은 또 공자를 대성 문선왕으로 봉했고, 굴원(屈塬)을 충절 청렬공(忠节 清烈公)으로 봉했으며, 류종원(柳宗元)을 문혜 소령공(文惠 昭灵公)으로, 두보(杜甫)를 문정(文贞)으로 봉하였다. 이를 통해서도 원나라 시기에도 유학을 숭상했음을 알 수 있다. 원 왕조 말년, 많은 몽골인들이 이미 한족 성씨로 개명했고, 한족의 풍속관습을 따랐다. 원조가 멸망한 후 몽골인의 계급적 우세가 사라지자 대부분 몽골인은 빠른 속도로 한족에 융합되었다.

한나라 이후 대대로 서역의 많은 승려와 상인, 군인들이 중원으로 들어 왔다. 학자들은 문헌으로 고증할 수 있는 130여 명의 구술자에 대하여 전문적으로 연구하였으며 그들이 모두 한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중에는 신강의 투루판인(吐鲁番人), 화전인(和田人), 길목살이인(吉木萨尔人), 파미르 고원의 서부(葱玲西)에서 온 우즈베키스탄인(乌兹别克斯坦人), 아랍인(阿拉伯人)과 페르시아인(波斯人) 등이 포함되었다. 고대의 문헌에는 많은 서역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중원에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면, 한령제 시기 팔도(八度)라는 대월씨인(大月氏人)이 “수백 명 대월씨인을 거느리고 한조에 귀화하였다.” 또 당조의 섬서(陕西)성 예천현(醴泉县) 북쪽에 있는 “온숙령이라는 산의 명칭은 한나라 시기 온숙국인(温宿国人, 지금의 신강 아커쑤)이 그곳에서 농사짓고 방목함에 따라 지어진 이름이다(有山名温宿岭者, 本因汉时得温宿国人, 令居此地田牧, 因以为名)”라고 한다.

당조의 우전국(于阗国, 현재의 신강 화전)은 5,000명의 군대를 중원으로 파견하여 “안사의 난”을 평정하는 데 협조한 적이 있었는데, 그 뒤로 군인들이 우전국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은 없었다. 참전한 후로 그들은 이미 중원에 융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조의 장군 위지경덕(尉迟敬德)은 우진인으로서 당시 한족 민간 중의 문신(门神)으로 그 명성을 날려 왔다.

수천 년 이래 한족이 소수민족에 융합되고 또 한족과 소수민족이 서로 융합되었다는 기록들이 많다. 예를 들면, 진시황은 50만 명의 중원인을 거느리고 당시의 남월에 진입했는데, 그중 많은 사람들이 월인에 융합되었다. 수조 말기, 중원에 반란이 일어나 수많은 한족이 북으로 도망가거나 포로가 되어 막북 돌궐족의 노예가 되었다. 그리하여 당조가 건립된 후 당태종은 초원에 사람을 파견하여 화폐와 비단으로 수만 명의 한인을 찾아왔다.

회홀, 토번, 속특(粟特), 돌궐 등과 같은 민족의 많은 상인과 사절들이 중원에 와서 한족 여자와 결혼한 뒤 아내를 본 지방으로 데려갔다는 기록들도 많다. 예를 들면, 정관 3년에 당조 정부는 장안에서의 한 차례를 조사를 통해 한족 여성을 아내로 맞이한 호객(胡客, 서역지구의 상인)이 천여 명이나 됨을 발견했다. 또한 일부분의 한족들이 소수민족에 의해 강탈 혹은 점령당한 뒤 소수민족에 의해 동화된 사례도 있다. 예컨대, 당조의 하서주랑(河西走廊)이 토번에 의해 반세기 넘어 점령된 이래로 당지의 한족들은 모두 토번의 복장을 착용하였다. 명대 왕건의 「양주행(凉州行)」은 한족 부녀자들을 강탈당한 후의 상황을 반영하였다.

凉州四边沙浩浩, 汉家无人开旧道
边头州县尽胡兵, 将军别筑防秋城
万里人家皆已没, 年年旌旗发西京
多来中国收妇女, 一半生男为汉语

양주의 주변이 황량하니 개척하려는 한인들이 없고,
또한 양주의 각 현이 오랑캐 병사들에게 점령되었으니,
장군은 다른 곳에 성을 세워 서역을 방어하거늘,
양주의 주변에는 인가가 없지만,
관청에서는 해마다 병사들은 파견하여 서경으로 보낸다.
중원에 들어온 오랑캐들은 많은 한족 부녀자들을 겁탈하였고,
그들의 후대들은 반수가 한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몇천 년 이래 한족이든 소수민족이든지를 막론하고 서로 간의 혈통적 융합은 종래로 단절된 적이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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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민 집필자 소개

회족, 역사학 석사, 민족학 박사, 중앙민족대학 민족학과 사회학학원 교수, 중국민족학회 부회장, 중국세계민족학회 부회장, 민족학과 민족사의 교학과 연구 진행, 『회흘사』(1991), 『자치통감-..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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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민족지 | 저자양성민 | cp명한국학술정보 도서 소개

중국을 이루는 56개 소수민족은 각 민족이 자체의 독특한 문화와 역사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몇천 년 동안 밀접한 문화교류와 문화융합을 이루고 있다. 중국 56개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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