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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여해, 李舜臣시호 | 충무공(忠武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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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여해(汝諧) |
조선왕조 5백 년 동안 충무공(忠武公)이라는 시호를 받은 무장은 이순신을 비롯하여 조영무, 남이, 구인후, 정충신, 이준, 김시민, 이수일, 김응하 등 아홉 명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은 충무공 하면 오직 이순신 장군만을 떠올린다. 대체 그 까닭은 무엇일까?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 사람도 이순신이고,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모하고 숭상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다.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도 이순신이고, 가장 차를 함께 마시고 싶은 사람도 이순신이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에게 참담한 패배를 당했던 왜군 장수 와키사카 야스하루가 후손에게 남긴 말이라고 한다. 이순신은 전란 내내 그처럼 놀라운 전략과 무용으로 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그러다 종국에는 죽음까지도 감추고 퇴각하는 왜군을 섬멸함으로써 남해의 수호신으로 거듭나기에 이른다.
이순신은 전란 내내 당리당략에 빠진 뭇 위정자들로부터 충심을 외면받았지만 좌절하지 않고 흩어진 군기를 바로 세우며 왜군과 맞서 싸웠던 충신이었다. 아울러 그는 삶의 터전을 잃고 방황하던 백성들의 안위를 살폈던 의인이었고, 심지어 어린 왜군 포로에게까지 온정을 베풀었던 인도주의자였다.
오늘날 우리는 《난중일기》를 통해 성웅이 아닌 인간 이순신을 만날 수 있다. 일례로 그는 전장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도원수 권율의 그릇된 일처리를 비난하고, 경상 좌병사 김응서의 잘못된 정세판단을 강하게 비판한다. 또 수시로 자신을 모함하는 전라수사 원균이 음험하고 흉악하다고 표현하는 등 불쾌한 내심을 숨기지 않는다. 절망적인 첫 백의종군과 함께 다가왔던 홀어머니의 부음, 사랑하는 아들 이면의 비보를 접하고는 간장이 끊어지는 듯한 아픔을 토로한다. 그처럼 이순신은 장수로서 어버이로서 수시로 닥쳐오는 불행과 고통을 홀로 오롯이 감내해야 했던 한 명의 고독한 인간이기도 했다.
잠룡 시절
이순신은 1545년(인종 1년) 3월 8일 서울 건천동에서 고고성을 울렸다. 거사였던 이정(李貞)과 초계 변씨(草溪卞氏)의 셋째아들이다. 자는 여해(汝諧), 본관은 덕수(德水). 그의 가문은 6대조부터 사대부의 전통을 이어왔지만 조부 이백록이 조광조가 이끄는 사림파의 별과에 천거 받았다가 기묘사화의 후폭풍으로 벼슬길이 끊어졌다.
어린 시절 이순신은 서울에 살면서 세 살 터울의 서애 유성룡과 어울렸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그가 매우 영특하고 활달해서 아이들과 함께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전쟁놀이를 즐겨했는데, 자라면서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았으며 글씨도 잘 썼다고 회고했다. 장차 뛰어난 무인으로서의 자질이 어렸을 때부터 발휘되었던 것이다. 조카 이분이 남긴 《행록》에는 ‘어려서 놀 때면 늘 전쟁놀이를 하는데 아이들이 반드시 공을 장수로 떠받들었다. 처음에는 두 형을 따라 유학을 배웠는데 재주가 있어 성공할 만했으나 매양 붓을 던지고 군인이 되고 싶어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빈한한 살림 때문이었는지 이순신의 가족은 외가인 충청남도 아산으로 거처를 옮긴다. 현재 지명으로는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이다. 그때부터 이순신은 반가의 자제들이 그랬듯이 과거공부에 전념했다. 하지만 가문에 덧씌워진 굴레 때문에 문과 응시를 포기하고 자질에 어울리는 무과에 응시할 뜻을 품게 된다.
1565년(명종 20년), 20세의 이순신은 상주 방씨(尙州方氏)와 혼인하여 훗날 이회, 이울, 이면 등 아들 셋과 딸 하나를 얻는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572년(선조 5년) 8월, 훈련원별과에 응시했지만 시험 도중 낙마로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여 낙방하고 말았다. 첫 번째의 참담한 실패 이후 절치부심한 그는 4년 뒤인 1576년(선조 9년) 2월, 드디어 31세의 늦은 나이로 식년무과에서 병과로 급제했다. 그때부터 무관 이순신의 파란만장한 관직 생활이 시작된다.
북방의 삭풍을 헤치고
고대하던 무관의 꿈을 이룬 이순신은 그해 12월 함경도의 험준한 요새인 동구비보(董仇非堡)의 권관(權管)으로 발령받았다. 권관이란 당시 변경의 진보(鎭堡)에 두었던 종9품 무관직이었다. 그 무렵 유성룡이 사람을 보내 동개〔櫜鞬, 활집〕를 빌려달라고 하자, “이것은 빌리자는 말인가, 바치라는 말인가.” 하며 거절했다. 그 말을 전해들은 유성룡이 몹시 흡족해 하면서 장차 그를 발탁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산 높고 물 깊은 변방에서 3년의 임기를 채운 그는 1579년(선조 12년) 2월 종8품 봉사(奉事)로 승진하여 서울에 있는 훈련원에 배속된다. 한데 그는 타고난 올곧은 성품 때문에 화를 입는다. 정5품 병조정랑인 서익이 친인척을 승진시키려 하자 극력 반대하다 부임 8개월 만에 충청도절도사의 군관으로 좌천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전력으로 인해 사람들은 이순신을 매우 강직한 인물로 기억하게 된다. 무릇 하급관리가 원리원칙에 충실하면 상사로부터 주목받고 내외의 인정을 받는다. 하지만 고위관리가 되어 같은 모습을 보이면 대개 융통성이 없다는 비난을 받는다. 이순신도 마찬가지였다.
1580년(선조 13년) 7월, 이순신은 종4품의 발포(鉢浦) 수군만호로 파격 승진한다. 발포는 지금의 전남 고흥군 남쪽에 있다. 이때 그는 처음으로 수군 장교로서 남해를 지키게 된다. 한데 이곳에서도 예의 원칙 고수로 인해 파란을 겪게 된다. 전라좌수사 성박이 객사의 오동나무를 베어 거문고를 만들려 하자 관청의 물건을 함부로 쓸 수 없다며 제지했다가 미움을 사게 된 것이다.
그 업보는 이전에 악연을 맺었던 서익이 병기 상태를 점검하는 군기경차관(軍器敬差官)으로 내려오면서 구체화된다. 서익은 발포 병영의 병기 상태가 불량하다고 조정에 보고함으로써 담당자인 이순신을 이전의 벼슬인 종8품 훈련원 봉사로 끌어내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1581년(선조 14) 5월의 일이다.
그 무렵 이조 판서였던 율곡 이이가 그를 불렀지만 냉정하게 거절한다. 아무리 가문의 어른이라도 하급관리가 인사권을 가진 고위관리를 만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하부정관(李下不整冠), 오얏나무 아래서 갓을 고쳐 쓰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런 결벽증 같은 청렴함이 있었기에 훗날의 성웅 이순신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1583년(선조 16년) 10월, 이순신은 다시 강등되어 종9품으로 건원보(乾原堡)의 권관이 되었다. 과거 급제 후 최초의 품계로 돌아왔으니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울화를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담담하게 직무에 임했고, 한 달 만에 여진족의 추장을 생포함으로써 정7품 훈련원 참군(參軍)이 되어 서울로 돌아온다. 한데 그달 15일 아버지 이정이 아산에서 세상을 떠났다. 무슨 까닭인지 이듬해 1월에야 부음을 들은 그는 즉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삼년상을 마친 1585년(선조 18년) 1월, 40세의 나이로 종6품 사복시 주부(主簿)로 복직한 이순신은 부임 16일 만에 유성룡의 천거를 받아 조산보(造山堡) 만호가 되었고, 1년 뒤에는 녹둔도(鹿屯島) 둔전관을 겸직하게 되었다.
녹둔도는 두만강 하구에 있는 섬으로 여진족의 침입이 빈번한 조선의 최전방이었다. 1586년 가을 녹둔도에 여진족의 일단이 쳐들어와 병사 11명을 죽이고 병사와 백성 160여 명을 납치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이순신은 병력의 열세로 잠시 후퇴했다가 경흥부사 이경록과 함께 여진족 진영을 급습하여 60여 명을 구출해 왔다. 그런데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이일이 사건의 책임을 물어 두 사람을 모두 백의종군에 처했다. 당사자들로서는 억울한 면이 없지 않았지만 최고지휘관의 결정이었으므로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조선 최고의 장수로 손꼽히던 이일은 그런 여진족의 발호를 용납할 수 없었던지 1588년(선조 21년) 1월 2,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여진족의 근거지를 급습하여 200여 채의 가옥을 불사르고 380여 명을 사살했다. 이때 이순신도 함께 참여하여 전공을 세움으로써 백의종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이듬해부터 관운이 트인 이순신은 탄탄대로를 걸었다. 1589년(선조 22년) 2월 전라도순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조방장과 선전관을 역임했고, 12월에는 정읍현감에 제수되었다. 하지만 1590년(선조 23년) 7월 유성룡의 천거를 받아 종3품인 고사리진(高沙里鎭) 병마첨절제사로 승진했지만 삼사의 반대로 취소되었고, 다시 평안도 만포진 병마첨절제사에 제수되었다가 취소되는 해프닝을 겪었다. 유성룡은 이순신을 요직에 임명하여 병란에 대비하고자 했지만 모든 인사를 남인의 세 불리기로 이해하던 서인 신료들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유성룡은 이에 굴하지 않고 재차 국왕 선조를 설득하여 1591년 2월 이순신을 종4품의 진도군수에 임명했고, 그가 현지에 부임하기도 전에 종3품의 가리포(加里浦) 수군첨절제사에 임명한 다음, 2월 13일에는 정3품의 전라 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했다. 백의종군에서 벗어난 지 불과 4년 만에 조선 수군의 핵심 지휘관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이순신의 초고속 승진 배경에는 고조되고 있던 왜란의 징후를 감지한 유성룡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다. 벼슬길에 올랐을 때부터 철저하게 원리원칙을 고수하고 비리를 용납하지 않았던 이순신이 이런 변칙 인사를 순순히 받아들인 것 역시 시시각각 닥쳐오는 전란에 대한 위기의식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나이 46세, 임진왜란 발발 14개월 전이었다.
임진왜란, 준비된 승리
1592년(선조 25년) 4월 13일, 부산포 앞바다에 수천수만의 검은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향후 7년 동안 조선 강토를 폐허로 만든 임진왜란의 서막이었다. 그때부터 최신식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 20만 명이 바다를 건너 몰려들기 시작했다.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군 선봉대는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던 신립 장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북쪽으로 쾌속 진군했다.
그 결과 전쟁 발발 보름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고, 겁에 질린 선조 일행은 도성을 버리고 역시 쾌속 도주하여 6월 22일 압록강변에 있는 의주에까지 이르렀다. 그 뒤를 따라 왜군은 개성과 평양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왔다. 곧 조선을 점령하고 장차 압록강을 넘어 요동까지 치고 올라갈 기세였다. 그렇지만 모든 일이 계획대로 순순하게 진행될 리 없다. 허수아비 같이 무너지기만 하던 조선 군대에도 준비된 인물 이순신이 있었던 것이다.
전라 좌수사로 부임한 이래 거북선을 비롯한 각종 군선을 제작하고 화포를 정비하며 정예수군 양성에 부심했던 이순신은 6월 16일 옥포해전의 첫 승전보를 띄워 육전의 연패로 상심해 있던 선조를 기쁘게 했다. 이후 그는 남해를 거쳐 전라도 지역으로 진공하려던 왜군을 낱낱이 격파함으로써 전황을 미궁 속에 몰아넣었다.
그 때문에 보급이 끊어진 왜군은 육지를 통해 곡창인 전라도 지역을 점령하려 했지만 7월 8일 권율과 황진이 지키던 이치 전투에서 패배하고, 10월 중순 김시민이 지휘하는 1차 진주성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속전속결로 조선을 점령하려던 전략에 커다란 차질을 빚게 된다.
남해에서 펼쳐진 이순신 부대의 활약상은 수많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다루었을 정도로 널리 알려졌지만, 실상 그의 승리는 신출귀몰한 계책이나 엄청난 화력의 위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육전의 거듭된 패전을 감안하여 무리하게 싸우지 않고 해안의 요지를 사수하면서 각종 정보를 활용하여 반드시 승리할 수 있는 전장으로 적을 끌어들였다.
7년 동안의 전쟁기간 동안 그가 공세를 취한 것은 부산포해전과 노량해전 등 불과 몇몇 해전에 불과했다. 이런 전략의 이면에는 만일 조선 수군이 남해에서 1패라도 당하는 순간 조선의 운명이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원균이 칠천량에서 대패했을 때 조선 수군은 대부분의 전선을 잃고 군사마저 뿔뿔이 흩어져 절멸상태가 되었고, 곡창지대인 전라도 일대가 무인지경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순신이 임진년의 첫 전투인 옥포 해전부터 계유년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까지 거둔 연승 행진은 멸망 일보직전의 조선을 지탱해준 궁극의 버팀목이었다. 임진왜란의 3대첩으로 손꼽히는 한산도대첩 역시 이런 절박감과 이순신의 철두철미한 용병술이 빚어낸 당연한 승리였다.
23전 23승의 연승신화
임진왜란 개전 당시 남해에는 경상좌수사 박홍, 경상우수사 원균, 전라좌수사 이순신,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포진하고 있었고 전함은 250척 정도였다. 그런데 왜군이 내침해오자 경상좌수사 박홍은 휘하의 전선을 모두 침몰시키고 도주했다. 그 때문에 경상도 지역에 원균의 전함 4척만 남자 조정에서는 수군과 전함을 온전히 보전하고 있던 전라도 수군에게 남해안 방어를 기대하면서 이순신에게 지휘권을 주었다.
대임을 맡은 이순신은 그해 5월 4일부터 8일 동안 옥포, 합포, 적진포에서 적선 37척을 격파했다. 5월 29일부터 벌어진 2차 해전에서는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과 함께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 등지에서 적선 72척을 침몰시키고 88명의 왜병을 사살했다.
7월 8일에는 이억기와 함께 전함 90척을 이끌고 출동하여 노량에서 원균과 합류한 다음 견내량에 정박 중인 왜군 함대를 한산도 앞바다로 끌어들였다. 이때 그는 학익진을 펼쳐 층각선 7척, 대선 28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파괴했다. 이순신은 여세를 몰아 9일부터 11일 새벽까지 안골포에 있는 적선을 맹폭했다. 그 결과 조선군은 적선 100여 척을 격파하고 왜군 250명을 죽이는 등 개전 이래 최대의 승전을 거두었다. 이른바 한산도대첩이었다.
이순신이 이끄는 연합함대는 9월 1일 적선 470여 척이 주둔하고 있던 부산포를 기습하여 적선 100여 척을 파괴했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왜군은 육지로 급히 대피한 다음 총포를 쏘면서 맹렬히 대항했다.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독도만호 정운을 비롯해 6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했다.
이와 같은 연승의 배경에는 이순신의 뛰어난 지휘력과 주력선인 판옥선의 견고함, 강력한 화포가 있었다. 그렇듯 조선 수군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뒤이어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보급에 큰 타격을 입은 왜군의 공세가 크게 무뎌질 수밖에 없었다.
조정에서는 이런 이순신의 활약상을 크게 치하하면서 1593년 8월 그를 삼도수군통제사로 제수했다. 그 결과 조선 수군 전체를 통솔하게 된 이순신은 섬으로 이어진 남해의 지리적 특성을 십분 이용하여 방어 전략을 펼쳤다.
그 와중에 이순신은 백성들에게 농사를 가르쳐 곡식을 저축하고, 고기잡이와 소금 생산을 독려했다. 그리하여 군대에는 군량이 풍족해졌고, 남쪽 백성들도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이순신의 마음가짐은 오늘날 전해지는 그의 두 자루 장검에 새겨진 명문으로 대변된다.
‘三尺誓天 山河動色(삼척서천 산하동색) 一揮掃蕩 血染山河(일휘소탕 혈염산하)’
곧 ‘석 자의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떨고,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왜적의 피가 강산을 물들이리라.’ 이것이야말로 적을 대하는 장수의 위용이었다.
바야흐로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명나라와 일본 간에 화의교섭이 진행되던 1597년(선조 30년) 1월, 이순신은 갑자기 파직되어 서울로 압송된 뒤 가혹한 국문을 받는다. 이중첩자 요시라의 정보를 바탕으로 바다를 건너오는 가토 기요마사를 요격하라는 왕명을 어겼다는 혐의였다.
전장에서 일선의 장수는 군왕의 잘못된 명령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전통적인 군략이 깡그리 무시된 상황이었다. 어쩌면 그의 진정한 적은 왜군이 아니라 정권욕에 사로잡힌 정치모리배들의 파당논리였는지도 모른다.
그때에는 오랜 후원자인 유성룡도 힘을 잃은 상태였다. 천행으로 병조 판서 정탁의 비호가 있어 간신히 풀려난 이순신은 권율의 막하로 백의종군을 명받는다. 생애 두 번째 겪는 백의종군이었다. 그런 가운데 망외의 비보가 전해졌다. 어머니의 부음이었다. 상심한 이순신은 권율에게 나흘 동안 말미를 얻어 고향으로 달려가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다. 그 시기의 《난중일기》는 당시 인간 이순신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를 절절하게 보여준다.
‘16일 병자. 흐리고 비가 내렸다. 배를 끌어 중방포에 옮겨 대고 영구를 상여에 실어 본가로 돌아왔다. 마을을 바라보고 통곡하니 찢어지는 마음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집에 이르러 빈소를 차렸다. 비가 크게 퍼부었다. 남쪽으로 떠날 일도 급박했다. 부르짖어 통곡하며 속히 죽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으리라
1597년, 명나라와 일본의 화의가 결렬되면서 잠정 휴전 중이던 전쟁이 재개되었다. 대규모의 왜군이 다시 바다를 건너 조선으로 몰려들었다. 정유재란이었다. 그해 7월,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참패하면서 완전히 궤멸되었다. 기세가 오른 왜군은 8월 들어 남원과 전주를 함락하고 장차 서울 진공을 노렸다. 그러자 겁에 질린 선조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순신을 재차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당시 조선 수군에 남아있는 전함은 불과 12척, 뿔뿔이 흩어졌던 군사 수백을 모아 간신히 전단을 꾸렸지만 실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조정에서는 그런 이순신에게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서 육군을 지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이순신은 감연히 남아있는 전력만으로 적을 막아내겠다는 장계를 올린다.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그런 다음 이리저리 수소문해보니 1척의 전함이 더 있었다. 그리하여 불과 13척의 낡은 전함으로 이순신은 무한도전의 일전을 준비했다. 그 무모한 명량해전 전야, 그는 붓을 들어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라 쓴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으리라.’
운명의 9월 16일, 이순신은 우는 바다 명량(鳴梁)에서 생사를 도외시한 분전으로 겁에 질린 부하들을 독려함으로써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둔다. 그렇게 조선 수군은 왜군의 서해안 진출을 틀어막음으로써 전쟁의 일대 전기를 이끌어낸다.
이런 불세출의 승장 이순신에게 당도한 것은 ‘통곡(痛哭)’이란 두 글자가 쓰인 편지였다. 그해 10월 사랑하는 셋째아들 이면이 고향을 급습한 왜군과 싸우다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그날 52세의 아버지 이순신의 영혼은 천참만륙 찢어졌다. 그날의 《난중일기》를 읽어보자.
'14일 신미. 맑았다. ……저녁에 사람이 천안에서 와서 집안 편지를 전했다. 열어보기도 전에 몸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어지러웠다. 정신없이 뜯어보니 겉봉에 ‘통곡’ 두 글자가 쓰여 있는 것을 보고 면이 전사한 것을 알았다.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고 통곡했다. 하늘은 어찌 이렇게 어질지 않단 말인가. 내가 죽고 네가 살아야 마땅한 이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다니 어찌 이렇게도 어그러진 이치가 있느냐. 천지가 캄캄하고 밝은 해도 빛을 잃었다.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해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두지 않은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지금 내가 살아있은들 장차 누구에게 의지한단 말이냐. 부르짖으며 슬퍼할 뿐이다. 하룻밤을 보내기가 한 해 같다.'
어쩌면 편지의 겉봉을 뜯어본 그날부터 이순신은 세상 사람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하늘은 왜 이토록 잔인하고 무심한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 자신을 밀어 넣고 있는가. 그 모든 것의 원흉은 왜적인가, 하늘인가. 1598년(선조 31년) 11월 19일 이순신은 철수하려는 왜군을 노량 앞바다에서 막아섰다. 그리고 적탄에 맞아 치열한 53년의 생을 접었다. 그와 함께 7년 동안 이 땅을 피로 물들였던 잔혹한 전쟁도 끝났다.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들은 선조는 관원을 보내 조상하고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가 남긴 《난중일기》는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76호로 지정되었고, 2013년 6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실록에서는 그의 죽음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그의 단충(丹忠)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쳤고, 의를 위하여 목숨을 끊었다. 비록 옛날의 양장이라 한들 이에 더할 수 있겠는가. 애석하다. 조정에서 사람을 쓰는 것이 그 마땅함을 모르고, 순신으로 하여금 그 재주를 다 펼치지 못하게 했구나. 병신년, 정유년 사이 통제사를 바꾸지 않았던들 어찌 한산도의 패몰을 초래하여 양호 지방이 적의 소굴이 되었겠는가. 그 애석함을 한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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