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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 114-10(삼일대로 4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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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 시간 | 하절기(4월 초~10월 말) 09:00 ~ 19:00, 동절기(11월 초~3월 말) 09:00 ~ 18:00, 매주 월요일 휴관 |
때로 한옥은 자신이 품은 역사 이야기만으로도 그 의미가 남다르다.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 조선 시대를 마감하기 전 불처럼 일었다가 스러진 두 인물의 숨결을 한꺼번에 느낄 수 있는 곳이 사적 제257호인 운현궁이다. 비록 아름다운 풍광을 갖기 힘든 것이 도시 한옥의 숙명이지만, 궁궐 목수의 섬세한 손길이 느껴지는 전통 한옥이 서울 한복판에 남아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행운이다. 조선의 처음과 끝을 지킨 다섯 개의 궁궐이 모두 운현궁 주위에 남아 있다. 특히 창덕궁은 대원군 집권 당시 오랜 기간 고종이 머물던 곳으로 운현궁과 인연이 깊어, 함께 보면 의미가 남다를 것이다.
자기 집 빗장까지 빼앗기다
거리에 초점을 맞추고 셔터를 누르려는 순간 도포 자락 하나가 휘익 지나간다. 고개를 들어 보니 머리에 붉은 염색을 한 젊은이다. 무슨 행사라도 있는 것일까? 순간 흥선대원군을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하늘을 조각내며 들어선 고층 빌딩 사이로 유영하듯 걷는 21세기, 그러나 종로는 어쩔 수 없이 역사의 거리다. 숱한 역사를 기억하고 재생한다. 핏발 선 눈빛의 이방원에서 한을 품고 숨을 거둔 대원군까지. 그뿐이랴, 시인 기형도의 주검이 발견된 곳도 여기 어디쯤이다. 어쩌면 역사는 종로 모퉁이 어디쯤에서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에게 언제든 말을 건넬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귀밑으로 쌓이는 자동차 소음을 털어 내며 운현궁으로 가는 길, 흥선대원군 이하응을 떠올린다. 그처럼 권력의 부침이 심했던 사람도 드물다. 세도가의 말 한마디면 왕족이라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던 시절, 그는 세도가의 기생에게까지 절을 해서 손가락질을 받는다. 그러나 그런 어처구니없는 처신이 그에 대한 세도가의 견제 심리를 누그러뜨렸고, 이하응은 조용히 사람을 규합하여 아들 명복을 고종으로 등극시킬 수 있었다.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그가 섭정에 나서면서 운현궁(雲峴宮)은 조선 역사의 중심이 되었다.
운현궁의 역사는 흥선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의 신분이 '새 임금의 친아버지'인 대원군으로 바뀌던 1863년 12월에 시작된다. 몰락한 왕족 이하응의 집은 이즈음 운현궁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운현'은 당시 그곳에 있던 언덕 이름이다. 12월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한겨울이었지만 전혀 다른 세상이 된 그해 겨울, 그는 춥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영광이 내일의 영광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절정기의 운현궁은 지금의 교동초등학교와 삼환기업, 그리고 일본대사관까지를 포함하는 엄청난 규모였지만, 대원군의 몰락과 함께 점차 지금의 모습으로 축소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은 고종 즉위 원년(1864년)에 지어진 노락당과 노안당, 그리고 6년 뒤 지어진 이로당 정도다. 운현궁은 나라의 운명에 따라 소유자도 바뀌어 왔다. 조선이 역사에서 이름을 내린 뒤 정부 소유가 되었던 운현궁은 해방이 되어서야 다시 그의 후손에게 돌아갔다. 서울시는 관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후손에게서 이를 매입하여 1996년까지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권불십년(權不十年). 권력을 가졌던 초기 십 년을 빼면, 그에게 운현궁은 그리 너그럽지 않았다. 운현궁에 연금된 채 살아간 세월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표소를 들어서면 정면으로 보이는 솟을대문에 이런 아픈 사연이 숨겨져 있다. 1990년대 초반까지 이 문은 안과 밖이 바뀐 채 달려 있었다. 문이 거꾸로 달린 까닭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대원군을 감시하던 일본이 대원군의 출입을 봉쇄하기 위해 빗장을 밖으로 둔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의견이다. 자기 집 빗장마저 빼앗겨 버린 우리 역사의 아픈 기억이다. 이 문은 서울시가 보수 공사를 할 때 제 모습을 찾았다. 한때 운현궁에는 고종과 대원군의 전용 문인 경근문과 공근문을 포함하여 네 개의 대문이 있었지만, 지금은 당시 후문으로 쓰던 이 문만이 남아 있다.
솟을대문 주변에 모인 중국인과 일본인들이 쏟아 내는 알 수 없는 말의 홍수 속에서 당시 조선 조정의 혼란스러운 처지가 페이드인(fade-in)과 페이드아웃(fade-out)을 반복한다. 솟을대문을 사진에 담고, 사람들 틈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서니 노안당(老安堂)이다. 가지런한 지붕 선이 당호(집에 붙인 이름)에 걸맞은 편안함을 준다. 건물 위에 엎드려 반듯하게 고개를 쳐든 지붕의 추녀가 정적인 건물에 율동감을 준다. 화선지 위에 힘차게 뻗은 난 줄기라도 보는 듯하다. 잠시 건물을 둘러본다. 마루를 두른 난간에서 추녀를 받친 부챗살 모양의 서까래까지 궁궐 목수의 섬세한 손길이 느껴진다. 당대 최고의 한옥이었지만, 전체적으로 홑처마(서까래로만 이루어진 처마)에 네모기둥을 쓴 절제미가 돋보인다. 집을 둘러보는 사이 다시 한 무리의 중국 관광객과 일본 관광객이 지나가고, 몇몇 서양인들이 사이사이 셔터를 누른다.
살림집 한옥에 숨은 궁궐 내전의 모습
노안당이라는 당호에서는 아들을 왕으로 등극시킨 늙은 아비의 흡족한 마음이 잘 드러난다. '노인을 편안하게 하는 집'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당호는 『논어(論語)』의 「공치장편(公治長篇)」에 나오는 '老者 安之(노자 안지)'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나 그의 소망과 달리 이곳에서 그의 삶이 편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사랑채에 해당하는 이 건물에서 그는 안동 김씨 등 당대의 세도가를 몰아내고 공평한 인재 등용과 서원 철폐로 이어지는 각종 법률 정비와 개혁 정책을 구상해 자신의 뜻을 펼치기도 했지만, 그를 견제하는 주변 열강과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에 의해 적지 않은 세월을 이곳에서 유폐된 채 살아야 했다. 만년에 눈을 감은 곳도 노안당 큰방 뒤쪽에 딸린 작은방이라고 하니, 그의 30년 정치 인생이 노안당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구석에 자리를 잡아 전망을 확보하지 못한 사랑채의 누마루는 유폐된 채 답답한 세월을 견뎌 냈을 대원군의 분신처럼 느껴져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그는 이곳에 앉아 난을 치며 영광과 좌절을 되새김질했을 것이다. 김동인은 그의 소설 『운현궁의 봄』에서 흥선대원군 이하응을 시대의 풍운아로 그려 내고 있다. 유행에 민감한 신문의 연재소설임을 감안하면, 백성들 사이에 그에 대한 추억이 적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보수적인 국수주의자로 비난받기도 하지만, 인재 등용에서 신분의 차별을 두지 않고, 동학혁명을 두둔하여 백성과 교감하던 보기 드문 지식인이었다. 잠시 툇마루(바깥 기둥 안쪽에 반 칸 크기로 깐 마루)에 앉아 한 시대를 살다 간 거인의 삶을 머리에 그리다 자리에서 일어선다.
중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면, 안채인 노락당(老樂堂)이 나타난다. 평생 고생만 시킨 부인에 대한 대원군의 미안함과 애틋함이 느껴지는 당호다. 어디선가 다듬이질 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드는 것은 뽀얀 기단석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인간적인 애틋함 때문이 아닐까? 노락당은 운현궁의 중심이다. 장차 명성황후가 되는 민씨가 고종과 혼례를 올린 곳도 이곳이다. 왕의 혼례를 이곳에서 치렀다는 사실만으로도 흥선대원군의 기세가 당시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당시 대원군의 위세를 짐작하게 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운현궁의 낙성식(건축물의 완공을 축하하는 의식)에 참석한 고종은 대제학 김병학에게 이날을 기념하여 글을 쓰게 했는데, 김병학은 노락당과 하늘 사이가 1자 5치(약 50cm)밖에 안 된다고 칭송했다고 한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는 그 평범한 진리를 대원군은 감지했을까?
노락당은 운현궁의 중심 건물답게 현재 운현궁의 건물 중 제일 화려하다. 기둥 위에 풀 무늬를 살린 익공(기둥 위에 장식을 겸해 넣은 작은 부재)을 장식해 넣어 집을 화려하게 꾸몄다. 익공을 넣어 올라간 건물 높이와 곧고 굵은 기둥에서 풍기는 위세 때문에 건물이 훨씬 힘차게 다가온다. 건물 높이가 올라가면서 지붕을 겹처마로 늘였기 때문에 처마가 깊고 그윽하다. 겹처마는 작은 서까래인 부연을 둥근 서까래 위에 덧붙여 지붕을 길게 낸 처마인데, 서까래만 쓴 홑처마와 달리 민가에서 감히 쓰지 못했던 귀한 것이다. 쪽마루(기둥 밖 처마 밑에 달린 좁은 마루)를 받친 아기기둥들도 8각으로 된 돌기둥이어서 그 독특함이 시선을 잡는다.
운현궁은 언뜻 보면 고급스러운 사대부의 한옥을 연상시키지만, 건물 내부에 만들어진 복도는 궁궐 내전의 그것과 같다. 이곳의 창과 문도 내전처럼 다양하고 화려해 단조로운 생활 공간에 생동감을 준다. 복도에 서면 밖에서 들어오는 햇살이 창호지에 걸려 우아한 빛깔로 살아나는데, 이 특별한 이미지가 발길을 쉽게 옮기지 못하게 한다. 궁궐 내전의 창과 문이 잦은 사건 사고로 제 모습을 잃은 것을 생각하면, 이곳은 궁궐 창호(창과 문을 한꺼번에 이르는 말)의 원형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도 하다. 이런 문창살을 눈여겨 감상하는 것도 운현궁 나들이를 풍부하게 해 줄 것이다.
끝나지 않은 이야기, 대원군과 명성황후
운현궁에서 제일 깊은 곳에 위치하는 건물은 이로당(二老堂)이다. 부대부인(대원군 부인) 민씨는 이로당이 지어진 후 내내 이곳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로당은 노락당과 함께 안채 구실을 하던 건물로, 노락당과는 복도로 이어져 있다. 이것도 여느 한옥에서는 보기 힘든 운현궁만의 특징이다. 건물 중앙에 ㅁ자형 마당을 두고 그 한가운데 굴뚝을 세워 중심성을 강조했다. 우리에게 굴뚝이 여근을 의미한다고 보면, 안채의 중심에 굴뚝을 세워 집의 중심으로 삼은 것은 후손이 귀하던 당시 왕가의 처지를 애석히 여긴 때문이 아닐까? 지붕의 합각에 그려진 박쥐가 그런 생각에 확신을 더한다. 박쥐는 다산(多産) 다복(多福)을 뜻하는 동물이다. 대대손손 왕가의 번창을 기리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운현궁을 한 바퀴 다 돌아보고 다시 솟을대문 쪽으로 방향을 잡자 이로당 앞의 커다란 석지(石池, 돌로 만든 작은 연못)가 눈에 들어온다. 아마도 부대부인은 돌을 깎아 만든 저 연못 안에 물을 가두고 연꽃을 띄웠을 것이다. 아무나 누릴 수 있는 사치가 아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시대를 살던 여인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이기도 했다. 어쩌면 명성황후는 그 한계를 넘어서고 싶었을지 모른다. 명성황후의 간절함을 느껴서일까? 푸른 하늘을 보는 순간 머리로 떨어지는 햇볕이 몹시 뜨겁다는 것을 깨달았다. 흥선대원군의 파란 많은 생을 좇다 보니 놓쳤던 것들, 그러니까 지금껏 보이지 않던 건물 주변의 사소한 물건들이 그때서야 하나하나 눈길 속으로 들어온다. 바닥에 깔린 마사토, 누군가 흘리고 간 부채, 석지와 나란히 놓인 해시계 받침대, 건물을 가르고 선 담장, 그리고 담장 안에 하나씩 쌓아 올린 작은 사괴석(네모난 돌)들까지. 착시를 교정하기 위해 밑에서부터 돌의 크기를 줄여 가며 쌓은 담장의 고급스러움이 공연히 감탄사를 자아낸다. 모든 것이 정교하고 입체적으로 눈에 잡힌다. 어쩌면 석지보다도 명성황후가 먼저 의식 안으로 밀고 들어왔을지도 모른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이 뜨거워진 햇볕을 피해 뒷마당으로 급하게 걸음을 옮긴다. 그늘 속에서 나이가 지긋한 노부인 한 명이 무언가를 우물거리며 책을 읽고 있다. 다시 돌아온 21세기, 도시의 작은 공원 운현궁. 담장 밑 화단에 전시된 괴석들도 말을 걸기 시작한다. 생각 없이 보면 그저 돌조각이지만, 거기에 뜻을 담자면 우주를 담을 수도 있다. 괴석을 보고 있자니 상상력이 풍부했던 대원군의 예술가적인 면모가 새삼스럽다.
이로당의 담장 너머에는 이로당과 함께 지어진 영로당(永老堂)이 남아 있다. 영로당은 '운니동 김승현가'라는 이름으로 서울시 민속문화재 제19호로 등재되어 있다. 기왕이면 같이 돌아보고 싶어서 문을 두드리고 한참을 기다렸지만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덕성여자대학교 교정에 있는 서양식 건물 양관(洋館)도 당시 운현궁에 속한 건물이었다. 현재 운현궁의 모습은 아주 제한적으로만 남아 있어 당시 역사를 촘촘히 읽어 내기가 쉽지 않고, 여러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며 만들어 내는 건축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 하늘 아래 제대로 지어진 전통 한옥이 이렇게 남아 있다는 것은 분명 큰 축복이다. 돌아가기 위해 매표소 마당으로 나가니 마당 한편에서 작은 소동을 벌이고 있다. 아마도 궁중 의상 패션쇼를 하려는 듯하다. 돌아갈 곳이 멀지 않다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지만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운현궁을 나섰다. 운현궁을 방문할 때 시간을 맞춘다면 다양한 공연을 볼 수 있다는 것도 21세기 운현궁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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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으로 이어지는 건축이야기
운현궁에서 제일 가까운 창덕궁에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경복궁, 경희궁, 경운궁(덕수궁), 창경궁이 있다. 대원군이 국운을 걸고 다시 지은 경복궁도 중요하지만, 창덕궁은 대원군이 집권했을 당시 고종이 오랜 기간 머물던 곳이라는 점에서 운현궁과 좀 더 밀접한 곳이다. 창덕궁 안에는 조선 사대부들의 집을 본떠 지은 연경당이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한옥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시간을 내어 꼭 볼만한 곳이다. 덕수궁과 창경궁도 근대사의 중심지였다는 점에서 함께 돌아볼 만하다.
또한 궁궐을 돌아보면서 빠뜨릴 수 없는 곳이 종묘와 사직이다. 사직은 경복궁 우측(전통 건축에서 좌측과 우측은 건물을 등지고 섰을 때를 기준으로 한다)에 있는데,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농업을 나라의 기본으로 여기던 조선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곳이었다. 경복궁 좌측에 있는 종묘는 왕의 조상을 받드는 곳이니 역시 꼭 필요한 곳이었다. 종묘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창덕궁과 함께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에 뽑히는 영광을 얻었다.
운현궁 → (10분) → 창덕궁 → (5분) → 경복궁 → (4분) → 경희궁 → (8분) → 덕수궁 → (17분) → 창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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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서울시립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토지주택공사에 들어가면서 '집'이라는 공간에 빠져들었다. 현재 한옥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고, 다양한 활동으로 한옥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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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운현궁 – 이야기를 따라가는 한옥 여행, 이상현, 시공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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