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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성공회강화성당(사적 제424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250(관청길 22) 강화온수리성공회성당(인천 유형문화재 제52호):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50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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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 시간 | 10:00~18:00 |
성당을 한옥으로 지은 곳이 있다. 성공회강화성당은 사찰 같은 겉모습이 사람을 당황하게 하지만, 내부는 바실리카식 성당을 잘 소화해 내 독특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다. 강화온수리성공회성당은 규모는 매우 작아 소박하지만 전통 건축에 신앙을 무리 없이 담아내 아늑한 건축 공간을 성취해 낸다. 여러 면에서 대비되는 두 성당을 함께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강화도는 역사의 지층이 두터운 곳이다. 선사 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을 이곳에서는 하루에 짚어 볼 수 있다. 역사 기행을 염두에 둔 주말 나들이로 손색이 없다.
성당을 짓기 위해 민초들이 나서다
봄은 아직 오지 않았다. 1906년, 일본이 우리를 몹시 불편하게 하던 그때, 강화도의 한 마을에는 봄을 품은 건물 하나가 제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 신자들이 땅을 내고, 직접 산에 올라가 소나무를 베어다가 손수 지은 스물일곱 칸 성당이다. 당시 민초들이 지은 그 성당을 만나러 가는 당일, 멱살잡이를 하듯 몰아치던 추위도 한발 물러서 자못 봄기운마저 느껴졌다. 강화로 들어서니 도로 주변의 풀과 나무는 눈처럼 하얀 서리를 맞으며 강화의 아침 풍경을 그려 내고 있었다. 봄을 향한 믿음 때문인지 창밖의 그림이 오히려 따뜻하다. 초지대교를 지나 우회전을 하여 줄곧 달려가니 이내 작은 읍내가 나온다. 역사의 고장답게 길이 오밀조밀하다.
안내 입간판을 보고 겨우 차 하나가 들어가는 좁은 길로 들어서니, 꽤 넓은 땅을 차지하고 앉은 강화온수리성공회성당(이하 온수리성당)이 나타난다. 다른 곳에서는 만나기 힘든 독특한 장식을 한 외벽이 눈길을 끈다. 돌을 창 아래까지 쌓아 올리고 윗부분을 기와로 장식하여, 수수한 아름다움이 마음을 훔친다. 그 수수함에는 아마도 당시 어려운 시대를 감내하던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 담겨 있을 터, 그들은 자신들이 애써 올린 하느님의 성전을 우러르며 하느님의 은혜가 이 땅에 내리기를 기도했을 것이다. 그때는 산 밑에 자리했을 성당이지만, 지금은 산을 밀어내고 크게 지은 신식 성당이 산을 대신하고 있다. 온수리성당은 그래서 다소 왜소해 보인다. 하지만 미소를 머금은 입술처럼 유쾌하게 올라간 지붕 선은 그 정도 변화쯤에야 개의할 일이 없다는 듯 온화하다.
건축물 감상이 어느 정도 숨은 건축 정신을 읽어 내는 일이라면, 곁눈질이나마 간단하게 성공회의 내력을 짚어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예수를 교주로 하는 많은 종파 중에 성공회가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16세기 초의 종교개혁이 자리한다. 당시 유럽에는 가톨릭을 변화시키려는 역사의 도도한 흐름이 있었고, 대륙에서 떨어진 섬나라라고는 하지만, 영국 교회 역시 이런 분위기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래서 영국에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갈등이 상존했다. 이 갈등은, 영국 왕 헨리 8세의 이혼이라는 정치적 동력을 얻어 로마 교황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를 세우는 것으로 봉합되었다. 겨우 이혼 때문에? 그렇게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왕조 시대 왕의 혼인 문제는 우리 역사에서도 제일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었다. 하여간 이런 역사적 상황 때문에 성공회의 종교적인 특성은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중간 어디쯤에 위치한다. 가톨릭처럼 교회 건물을 성당이라고 부르지만, 성당 어디에서도 성모상을 볼 수 없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성공회는 19세기 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독특한 탄생 배경 때문에 토착 문화를 존중하고 수용할 줄 아는 이들은 의료와 교육 사업을 통해 민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1898년 온수리에 있는 집 한 채를 구하여 진료소를 열고 주민에게 헌신했는데 이것이 주민의 마음을 움직였고, 이때 성공회를 받아들인 주민들이 성당 건축에 주체적으로 참여하여 결실을 맺게 된 것이 온수리성당이다. 이후 온수리성당은 강화 남부의 신앙 중심지가 되었다.
유럽 교회 양식을 성공적으로 담아내다
성당을 바라보고 있자니 안타까운 마음이 그지없다. 산 아래 다소곳이 앉은 성당의 아담한 이미지는 상상만으로도 포근하다. 산을 밀어내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 그래도 성공회강화성당(이하 강화성당)보다는 나은 편이다. 강화성당은 산꼭대기를 차지하고 있어 유럽의 성이나 수도원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건물이라면 모를까, 산꼭대기에 납작하게 엎드린 한옥은 도무지 낯설기만 하다. 어쨌든 강화성당이 마을 중심의 산꼭대기에 자리 잡고 세상의 중심이고자 하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면, 산 밑에 자리 잡았던 온수리성당은 훨씬 겸손하다. 겨우 나지막한 종탑을 세워 중심성을 확보했을 뿐이다. 원래 종탑은 성당 안에 세우지만, 온수리성당은 문간채를 따로 만들고, 문간채의 가운데 칸을 높여 종탑을 대신했다. 성당 아래 사제관의 지붕과 뜰에는 아직 잔설이 남아 을씨년스럽다. 성당을 지을 때 같이 지은 사제관은 ㄷ자 모양으로 여느 한옥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겉모습을 하고 있지만, 내부는 서양인인 사제의 생활에 맞게 개조되었다고 한다. 사제관의 내부 모습이 궁금했지만 사적인 공간을 침입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발길을 돌려 성당으로 향했다.
온수리성당은 현관문을 떡하니 한옥의 옆구리에 만들어 놓았다. 주로 건물의 넓은 벽면 쪽을 이용하는 전통 건축물과 달라서 이상할 만도 하지만, 이미 성당 건물에 익숙해진 탓인지 전체적으로 아담한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크게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여니 다행히 문이 열린다. 은은한 창호지 문으로 둘러싸인 자그마한 전실이 호기심을 일으켜 안으로 들어서니, 창호지 문 위에서 역대 관할 사제들이 줄지어 사각 액자로 얼굴을 내민 채 낯선 손님을 맞는다. 불발기 문(문의 중간에 얇은 창호지를 붙여 빛이 통하도록 한 문) 형식으로 만들어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마음이 다소곳해진다. 문 하나의 차이지만, 건물 밖에서의 마음과 달리 차분하다. 딱히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위안이라고 할까? 그러면서도 명쾌한 종교적 의미를 육감으로 전해 준다. 건물을 세로로 이용하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서면 두 줄로 길게 늘어선 기둥이 방문객의 눈길을 자연스럽게 제단으로 이끈다. 순간 마음을 추슬러 다잡게 된다. 제단을 이루는 세 개의 단(壇)은 '하느님, 예수님, 성령이 하나'라는 기독교의 삼위일체 교리를 떠올리게 한다. 벽에 딱 붙은 낯선 모습의 제단이 눈길을 잡는다. 제사장만이 하느님과 소통하던 시대가 있었다. 요즘은 사제가 신도를 마주 보며 예배를 집전하지만, 옛날에는 제사장인 사제가 벽을 향해 서서 신과 소통하는 동안 신도들은 제삼자가 되어 뒤에서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그 전통의 흔적이다. 성당에 들어선 이의 시선을 인도하는 열두 개의 기둥은 예수의 12사도를 상징한다. 영원성과 연속성을 상징하는 열주(列柱, 일렬로 늘어선 기둥)는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 가득 엄숙함을 채운다. 가운데 두 줄로 늘어선 고주(高柱, 길이를 길게 하여 높이 만든 기둥)를 이용하여 바실리카 양식의 종교적 장치를 성공적으로 흡수하고 있다. 밖에서 보면 그다지 높지 않은 건물이지만, 안에서 보는 천장은 한옥의 대청처럼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난 연등천장이어서 충분히 높다. 그래서 높이를 통해 경건함을 끌어내는 유럽의 전통을 충분히 담아낸다. 경건함이 마음을 억누르지 않고 아늑해서 좋다. 문득 성당에 다니고 싶어진다.
마당을 이해 못한 건축, 강화성당
온수리성당에서 바닷가로 난 해안 도로를 따라 15km 정도 달려가면, 강화성당이 나온다. 2층 한옥으로 지은 성당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사찰처럼 지었다는데 도대체 그런 건물에 어떻게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담아냈을까? 처음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궁금증이 꼬리를 문다. 그리고 도착하면, 힘껏 입을 벌리면서 소리를 지를지도 모르겠다. 단청을 입은 성당의 모습이라니! 비록 낯선 모습이기는 하나 그만큼 흥미를 일으키기에도 충분하다.
같은 성공회 성당이지만 강화성당은 입구부터 온수리성당과 전혀 다른 이미지다. 성당으로 진입하려면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향교의 제례 공간을 연상시킨다. 공연히 옷매무새를 만지작거리며 계단을 오른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니 또 다른 문이 바짝 붙어서 사람을 가로막는다. 예상하지 못한 건축적 변화는 마음에 큰 울림을 주기도 하지만, 이 경우는 당혹스러움에 가까운 느낌을 받는다. 문 안의 문이라는 낯선 구도는 도무지 혼란스럽다. 문을 연이어 설치한 까닭이 무엇일까? 당시 건축을 주도하던 외국인 사제가 향교나 서원의 대문과 중문에 해당하는 외삼문과 내삼문을 흉내 낸 것은 아닐까? 잠시 문을 보고 생각에 잠겨 보지만 정확한 답을 찾지 못한다. 생각은 생각대로 열어 두고 두 번째 문을 지나 성당 앞으로 향한다. 성당 2층 처마 밑에는 '天主聖殿(천주성전)'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고, 기둥에는 나란히 주련(柱聯, 긴 널빤지에 써서 기둥에 걸어 둔 글귀)까지 달려 있어 건물을 세로로 이용한 것을 뺀다면 흡사 절집 같다. 당시 사제들이 조선인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는 대체로 실패한 듯 보인다. 안타깝게도 성당을 마주할 때 경건함보다는 답답함이 앞선다. 마당다운 마당이 없어서다. 한국의 건축은 마당을 중심으로 하여 건물을 배치한다. 통도사처럼 건물이 많은 곳도 마당을 매개로 하여 다양한 축과 비례를 만들고, 이를 통해 전체적인 아름다움과 경건함을 성취해 낸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런 아름다움을 느낄 수가 없다.
서양에는 마당이라는 공간이 없으니, 성당 건축을 주도한 주교나 사제가 이를 고려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쳐서야 문이 이어진 이 독특한 건축 체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성당 건물 안에 있어야 할 종탑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사찰의 일주문(기둥이 문 양쪽에 하나씩인 문으로 사찰 경내를 들어갈 때 만나는 첫 번째 문)과 불이문(본전에 이르는 마지막 문으로 범종각과 이웃한다)을 모사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문 한쪽에 종을 달아 놓은 것을 보면 사찰의 범종각을 모방한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건축은 건물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당시 건축을 주도한 외국인 주교가 건물과 그 둘레를 하나로 인식하는 조선의 건축을 이해하지 못하여 건축을 단지 건물로만 인식했던 것이다. 우리는 건물을 짓게 되면 건물에 딸린 마당을 함께 감안하여 공간감을 찾는다. 그리하여 건물을 볼 때 건물만 보는 것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서 마당을 함께 보는데, 이 때문에 건물과 그 주변의 형세를 함께 볼 수밖에 없다. 그들은 이 마당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연달아 설치된 두 개의 문채는 이들을 마당에 연계시키지 못해 답답하고 부자연스럽다. 한옥에서 마당은 건축의 선험적인 형식에 해당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종교 건축이 주는 감동은 어디에서 오는가?
강화성당의 겉모습은 온수리성당과 많이 다르다. 전체적으로 사찰의 대웅전처럼 2층이고 단청까지 칠해져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다. 다행히 2층으로 포개진 두 개의 팔작지붕이 사뿐히 날아오르며 만든 리듬감이 사람을 제압하는 힘을 한결 누그러뜨리고 마음에 작은 여백을 만들어 준다. 사찰과 비슷하지만, 담벼락을 붉은 벽돌로 쌓아 사찰이 주는 느낌과 많이 다르고 포가 보이지 않는다. 포는 사찰 지붕 밑에서 뾰족하게 사방으로 튀어나온 부재인데, 이 포를 없애고 대신 거기에 유리창을 달았다. 이렇게 하여 강화성당은 사찰에서 조금 벗어난 모습이다. 이 유리창은 성당의 겉모습을 사찰과 구분해 주는 구실 말고도, 성당 내부를 유럽 성당 분위기로 유도하는 데 기여한다. 강화성당 역시 건물을 길게 사용하여 성당에 들어서는 사람의 시선을 제단으로 모으도록 했지만,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더 강하다. 내부가 온수리성당보다 훨씬 높고 전체적으로 더 엄숙하기 때문이다. 제단의 크기도 크고 제단의 영역 구분도 명확하여, 제단은 신도가 함부로 올라설 수 없는 곳이라는 종교적 권위를 명확히 선언한다. 그 권위를 마주한 이들에게 2층 유리창에서 어두운 실내로 쏟아지는 햇빛은 신을 향한 무한한 신심을 일으키도록 유도했을 것이다. 구원을 위해 무릎을 꿇은 이들에게 이 광경은 큰 울림으로 다가왔으리라. 성공회를 받아들인 조선인은 이 울림에서 엄혹한 시대의 고통을 감내하는 힘을 얻지 않았을까?
강화성당이 더 유명세를 타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온수리성당에 마음이 간다. 두 개의 건물은 많은 면에서 대비된다. 강화 남부의 신앙 중심지였던 온수리성당은 일반 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건축된 반면, 강화 북부의 신앙 중심지였던 강화성당은 1900년에 성공회 영국 교회의 지원하에 외국인 사제가 주도하여 지어졌다. 때문에 궁궐 목수까지 동원되었고, 그런 만큼 권위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에 걸맞은 외부 시설을 갖출 수 있었다. 사찰의 일주문과 불이문을 본뜬 두 개의 문과 종각까지 설치했지만, 이것이 농익지 못해 성당과 하나로 어울리지 못하고 겉돈다. 이에 비해 온수리성당은 강화성당처럼 요란하게 전통을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한옥이 가지는 내밀한 아름다움을 매우 효과적으로 흡수하여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편안한 감동을 준다. 건축이 주는 감동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새삼 생각하게 한다.
두 성당을 모두 '바실리카식 성당'으로 평가한다. 바실리카는 로마의 공회당(公會堂)이다.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 교인들은 자신들이 모이는 장소로 바실리카를 이용했고, 결국 바실리카에 신앙을 덧입혀 지은 성당이 바실리카식 성당이다. 강화성당은 비교적 여기에 충실하게 지어졌다. 그러나 온수리성당은 어디를 보아도 딱히 바실리카 양식이라고 할 만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전실과 후실을 만들고 실내의 천장을 높게 하여 수직성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 바실리카 양식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다. 특히 고주를 이용하여 천장을 높이는 방법은 사찰과 궁궐 건축에서 흔히 써 왔기 때문에 이를 바실리카 양식으로 보기보다는 한옥에 신앙을 투사한 새로운 양식으로 봐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한옥식 성당'이라고 하면 어떨까. 한옥식 성당이 '바실리카식 성당'처럼 하나의 양식(樣式)으로 발전하기 전 성장을 멈추어 버린 듯하여 못내 안타깝다.
성공회는 성당을 우리 건축 방식으로 지어 왔다. 우리 문화를 존중하는 이런 태도는 해방 이후까지 계속되었다. 장식성이 강할 수밖에 없는 종교 건물이지만, 권위적인 두리기둥(둥근 기둥)을 포기하고 민가에서나 쓰는 네모기둥만을 쓸 정도로 낮은 자세로 조심스럽게 한국 문화를 흡수하며 신앙의 터전을 일구어 온 것이다. 그러나 성공회의 이런 노력이 이제 더는 계속되지 않는다. 전통 건축을 신앙으로 해석하는 노력이 다시 한번 시도되었으면 하고 제단 앞에 서서 기도하며 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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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에서 조선까지, 한 번에 역사 읽기
온수리성당에서 엎어지면 닿을 만한 곳에 전등사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 중 하나다. 삼랑성을 지나면 이어지는 산길이 꽤나 운치 있다. 이 아름다운 길을 지나면 전등사의 대웅전(보물 제178호)과 약사전(보물 제179호)을 만날 수 있다. 특히 대웅전의 추녀 밑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인이 쪼그리고 앉아 사람을 맞는다. 이 나신(裸身)은 대웅전을 짓던 목수가 깎아 걸었다. 대웅전을 지을 당시 인근 주막의 주모에게 마음을 빼앗긴 목수는 품값을 모두 가져다주며 사랑을 키웠다. 그런데 웬걸, 주모는 재산을 모두 가지고 달아나 버렸다. 그러자 목수는 달아난 주모를 인형으로 만들어 그곳에서 업보를 풀도록 했다고 한다. 온수리성당과 전등사가 가까우니 전등사를 보고 강화성당으로 이동하는 것이 좋다. 어차피 역사의 밀도가 높은 강화에서 역사 기행과 건축 기행을 나누는 일은 부질없어 보인다. 단군의 얼이 깃든 마니산, 청동기 시대 우리 조상들의 정서(情緖)가 묻힌 고인돌, 사십 년 가깝게 이어진 몽고 항쟁으로 사무치는 고려궁지, 그리고 신미양요, 병인양요 등 개국의 혼란이 깃든 유적 모두를 강화도에서 만날 수 있다.
마니산 → (18분) → 강화온수리성공회성당 → (6분) → 전등사 → (12분) → 초지진 → (36분) → 성공회강화성당 → (2분) → 고려궁지 → (13분) → 고인돌 유적(강화지석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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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토지주택공사에 들어가면서 '집'이라는 공간에 빠져들었다. 현재 한옥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고, 다양한 활동으로 한옥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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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성공회강화성당과 강화온수리성공회성당 – 이야기를 따라가는 한옥 여행, 이상현, 시공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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