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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7년, 평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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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20년 4월 11일 |
포상훈격 |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
신민회 이전 독립활동
안태국은 1877년경 평안남도 중화군(中和郡) 지도면(至道面) 상사리(上四里)에서 가난한 농촌 유생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순흥(順興)이고, 호는 동오(東吾)이다. 처 김(金)씨와 사이에 2남 2녀를 두었고, 장남은 러시아령 연해주에서 활동한 안명진(安明鎭)이었다.
안태국은 어려서 고향인 지도면 상사리에 소재한 서당에서 약 7년간 한학을 공부하였다. 청년기에는 고향을 떠나 대도시인 평양으로 이주하여 ‘비단장사’를 하면서 상업에 종사하였다. 대도시의 삶은 쉽지 않았지만 특유의 정직함과 총명함, 남다른 기백과 신의로 협동사(協同社)라는 상회를 설립할 정도로 성공하였다. 또한 평양에 거주하면서 기독교를 접하고 장로회 신도로 교회활동을 하면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 개화사상을 형성하였다.
비교적 평탄한 삶을 살던 안태국은 1907년 3월 평양경무서 경무관 박승훈(朴承薰)에 의해 무고하게 구속되면서 첫 시련을 맞이하였다. 박승훈 경무관은 자신의 요구를 안태국이 부당하다며 받아들이지 않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그를 구속하였다. 안태국이 구속되자 최응두(崔應斗) 등 평양 거주 상인들이 상민공동회(商民共同會)를 조직하고 철시(撤市)각주1) 까지 단행하면서 경무관 처벌과 안태국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 석방운동은 1907년 4월 13일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되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안태국 사건은 1907년 5월 평남재판소로 넘겨졌는데,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그해 9월 서울에서 활동하던 변호사 이건호(李建鎬) ・ 안병찬(安秉瓚) 등이 평남에 변호사출장사무소를 개소하고 변론에 나섰다. 안태국은 약 6개월의 수감생활 후 석방되었지만 사업과 가계는 타격을 입었다. 이에 생계유지를 위해 변론에 나섰던 이건호 ・ 안병찬의 법률사무소에 취업하여 평양 제1출장소 사무원으로 근무하였다.
신민회 가입과 활동
1907년 2월 20일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安昌浩)는 대한매일신보사 주필 양기탁(梁起鐸) 등과 만나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 단체로 신민회(新民會) 창립에 대해 논의하였다. 논의 초기에 양기탁은 국채보상기성회 총무로 애국계몽운동을 이끌고 있었기에 공개 단체로 창립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다음과 같은 이유로 비밀결사 단체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첫째, 일제의 방해와 탄압을 피하면서 국권회복운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둘째, 일제의 법령이나 탄압조치에 의해 해산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셋째, 일제가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강제병합하는 경우에도 독립운동 핵심단체로 역할을 하기 위해서였다. 넷째, 회원의 입회를 제한하고 엄선하여 밀정의 침투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다섯째, 수구파와 그에 동조하는 일부 세력들의 반감과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양기탁(梁起鐸) ・ 전덕기(全德基) ・ 이동휘(李東輝) ・ 이동녕(李東寧) ・ 이갑(李甲) ・ 유동열(柳東說) ・ 안창호 등 7인이 창건위원이 되고, 노백린(盧伯麟) ・ 이승훈(李昇薰) ・ 안태국(安泰國) ・ 최광옥(崔光玉) ・ 이시영(李始榮) ・ 이회영(李會榮) ・ 이상재(李商在) ・ 윤치호(尹致昊) ・ 이강(李剛) ・ 조성환(曺成煥) ・ 김구(金九) ・ 신채호(申采浩) ・ 박은식(朴殷植) ・ 임치정(林蚩正) ・ 이종호(李鍾浩) ・ 주진수(朱鎭洙) 등이 중심이 되어 비밀결사 단체로 신민회(新民會)를 창립하였다.
창립 초기 신민회의 조직을 보면, 회장에 윤치호, 당수에 해당하는 총감독에 양기탁, 총서기에 이동녕, 재무에 전덕기, 국내 동지들이 추천한 신입회원의 자격 심사를 담당하는 집행원에 안창호가 임명되었다. 지방 조직으로 각 도에 총감(道總監)을 두고 각 도별 회원을 지휘하도록 했으며, 의결기관으로 평의원(評議員)을 두었다. 군에는 군감(郡監)을 두고, 의결기관으로서 평의원을 두었다. 군감 밑에는 반(班)을 편성했는데, 회원 60명마다 도반장(都班長)을 두고 20명마다 부반장을 두었으며, 5명마다 반장을 두었다. 5명 단위의 ‘반’조직이 신민회의 기본단위 조직이었다.
또한 신민회의 조직은 종선으로만 이어지게 해서 당사자 2인 이상은 회원을 서로 알지 못하게 했고, 횡선으로는 누가 회원인지 전혀 모르게 하였다. 이에 따라 각 도의 책임자인 총감을 임명하였는데, 서울 총감에 전덕기 ・ 이동녕, 함경남북도 총감에 이동휘, 평안북도 총감에 이승훈, 평안남도 총감 안태국, 황해도 총감에 김구, 경상남북도 대표에 김진호(金鎭浩), 충청남북도 대표에 최익(崔益), 강원도 대표에 주진수(朱鎭洙), 기타지역 대표에 김도희(金道熙) 등이 임명되었다.
법률사무소에 취업하여 활동을 시작한 9월경 안태국은 안창호의 권유를 받아 신민회 창립회원으로 가입하고 평안남도 총감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신민회 창립회원으로 권유받을 수 있었던 것은 평양에서 기독교인으로 활동한 것이 인연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평안남도의 신민회는 평양이 이에 속해 있고, 기독교의 중심지였기 서울 다음으로 막강하였다. 안태국이 평안남도 신민회를 책임졌다는 것은 그가 이 지역에서 확고한 기반을 가지고 국권회복운동을 이끌 수 있는 인물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더욱이 시기에 따라 각도의 총감은 변동되기도 하였지만 평안남도 총감은 신민회 창립부터 해체기까지 변함없이 안태국이 담당하였다.
신민회의 주요활동과 내용
신민회는 창립할 때부터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국권을 회복하여 자유 독립국을 세우고, 그 정치 체제는 공화정체(共和政體)로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국권을 회복할 수 있는 ‘실력 양성’에 온 힘을 쏟아야 하고, 실력 양성은 국민을 새롭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민주주의 기초하여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으며, 국가의 부강은 국민의 부강에서 나온다는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실력 양성은 신민(新民)에 의한 민력 양성(民力養成)을 의미하였다. 신민은 반드시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하는 ‘자신(自新)’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자신은 사회 ・ 국가 ・ 국민의 모든 부분에서 수행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신민회는 ‘자신’을 위한 방법으로 ‘첫째, 신문 ・ 잡지와 서적을 펴내어 국민의 지식을 계발한다. 둘째, 각지에 계몽운동가들을 파견하여 국민의 정신을 각성시킨다. 셋째, 우수한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한다. 넷째, 각지 학교의 교육 방침을 지도한다. 다섯째, 실업가에게 권고하여 영업 방침을 지도한다. 여섯째, 신민회 회원끼리 힘을 더해 실업장을 건설하여 실업계의 모범을 만든다. 일곱째, 국외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전쟁에 대비한다. 여덟째, 국외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창건한다.’는 8가지 사업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실력이 배양되면 신민회가 앞장서고 ‘자신’한 국민이 ‘통일연합’하여 비폭력 또는 무력의 각종 방법으로 일제히 궐기하여 국권을 회복하고 자유 문명국을 수립한다는 것이다.
신민회가 ‘자신’을 위해 열심히 했던 활동 중에 하나가 계몽 강연과 학회 활동이었다. 신민회의 모든 회원과 간부들이 전국 각지에서 적극 참여하였고, 광범위하게 활동하였다. 당시 알려졌던 학회로는 안악군면학회(安岳郡勉學會) ・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 ・ 평양청년권장회(平壤靑年勸奬會) ・ 연학회(練學會) ・ 동제회(同濟會) ・ 서북학회 등이 대표적이었다. 안태국도 「서우학회(西友學會)」, 그 뒤를 이은 「서북학회(西北學會)」 등에 가입해서 통상회와 토론회 ・ 강연회 ・ 친목회 등을 개최하였다. 이러한 계몽 강연회를 통해 고취한 것은 애국주의, 국권 회복, 민권 사상, 신사상 ・ 신지식 ・ 신산업의 계몽, 구습 타파, 교육구국운동과 학교 설립의 고취, 자발적 의무 교육 실시, 학회 활동의 고취, 민지(民志)의 단합 고취, 실력 양성 호소 등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세력을 배양 조직화하였다.
또한 신민회 기관지 역할을 하는 『대한매일신보』 평양지사장의 일도 도맡았다. 이는 신문 보급 등을 통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고 국권회복운동 세력을 조직하고 확대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평양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창립하였다. 자본은 평안북도 총감 이승훈이 조달하였다. 태극서관은 애국계몽운동에 필요한 도서의 공급과 출판을 위한 서점의 형태를 취했지만, 내면으로는 신민회의 자금조달과 연락기관을 겸하였다.
신민회가 강연회 및 학회활동 만큼 중요시 했던 것은 학교설립이었다. 지역에 중학교를 세워서 소학교 출신 청년들에게 중등 교육을 시킴으로써 고급 신지식을 습득한 민족 간부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전국 각지마다 중학교를 설립할 수 없어 중요 지역에 모범이 될 만한 일명 ‘모범 중학’을 다수 설립하였다. 이는 ‘모범 중학’을 보고 동일한 종류의 중학교를 자발적으로 설립하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이 ‘모범 중학’은 사범교육을 실시하여 교사를 양성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이 전국 각지에 흩어져 학교를 세우고 청소년들에게 국권회복에 적합한 신교육을 시켜서, 교육구국운동이 전국적으로 파급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목적으로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 ・ 신안학교(新安學校), 평양의 대성학교(大成學校), 강화 등지의 보창학교(普昌學校), 의주의 양실학교(養實學校), 납청정(納淸亭)의 가명학교(嘉明學校), 안주의 협성안흥학교(協成安興學校), 선천의 신흥학교(新興學校), 곽산의 흥양학교(興襄學校), 영흥의 명륜학교(明倫學校), 경성의 경성학교(鏡城學校), 안악의 양산학교(楊山學校) ・ 안악군면학회사범강습소, 서울의 협성학교(協成學校) 등이 설립되었다. 이 중에서도 1908년 9월 안창호가 평양에 설립한 대성학교와 강화의 보창학교가 가장 유명하였는데, 안태국은 대성학교의 육성을 위해 후원회장격인 찬무원으로 지원을 하였다.
신민회가 학교 교육에 힘쓴 것은 국권회복운동의 핵심 주체가 청년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청년운동을 독립시켜 전개하였으며,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를 중심으로 전개하였다. 청년학우회는 신민회 중앙본부에 의해 1909년 8월 신민회의 합법적인 외곽 단체로서 조직되었으며, 중앙총회 외에 한성연회(漢城聯會) ・ 평양연회 ・ 의주연회 ・ 안주연회 등 지방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이때 안태국은 청년학우회 중앙 총무로 청년학우회의 창립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그 해 12월에 이완용을 저격하여 중상을 입힌 ‘이재명 의거’가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었다고 하여 일제에 의해 구속되었다. 이후 석방된 후에는 평안남도 총감 겸 발기위원으로서 청년학우회 중앙총회와 평양연회의 강화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신민회 해체와 해외활동 그리고 순국
신민회는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처단의거가 일어난 후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안중근 의거에 일제는 발악적으로 안창호 등 신민회 간부들을 예비 검속하였다. 이에 1910년 3월 양기탁의 집에서 전국 간부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다음의 사항들이 결정되었다.
‘첫째, 독립군기지는 일제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청국령 만주 일대에 설치하되, 후일 독립군의 국내 진입에 가장 편리한 지대를 최적지로서 선정한다. 둘째, 최적지가 선정되면 자금을 모아 일정 면적의 토지를 구입, 이에 필요한 자금은 국내에서 신민회 조직을 통해 비밀리에 모금한다. 또한 이주민에게도 어느 정도의 자금을 휴대하도록 한다. 셋째, 토지를 구입하면 국내에서 애국적 인사들과 애국 청년들을 계획적으로 단체 이주시켜 신영토로서의 신한민촌(新韓民村)을 건설한다. 넷째, 새로 건설된 신한민촌에는 민단(民團)을 조직하고 학교와 교회, 기타 문화시설을 세우는 한편, 무엇보다 특히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문무쌍전교육(文武雙全敎育)을 실시해 사관(士官)을 양성한다. 다섯째, 무관학교에서 독립군 사관이 양성되면, 이들과 이주 애국 청년들을 중심으로 강력한 독립군을 창건한다. 독립군 장교는 현대적 장교 훈련과 전략전술을 습득한 무관학교 출신 사관으로 편성하며, 병사들 역시 모두 무관학교에서 현대 군사교육과 전략전술을 익히는 정병주의(精兵主義) 군사훈련을 채택한다. 여섯째, 강력한 독립군이 양성되면 최적의 기회를 포착, 독립전쟁을 일으켜 국내에 진입한다.’ 등이었다.
즉, ‘독립전쟁전략’을 채택하고,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기지 창건운동을 위해 일제에 구금되었던 간부들을 망명시켜 독립운동 근거지를 해외에 건설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1910년 4월 안창호 ・ 이갑(李甲) ・ 유동열(柳東說) ・ 신채호(申采浩) ・ 김희선(金羲善) ・ 이종호(李鍾浩) ・ 김지간(金志侃) 등이 망명길에 올랐다.
1910년 12월 중앙총감 양기탁의 집에서 다시 전국 간부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간부회의에는 중앙총감 양기탁, 평안남도 총감 안태국, 평안북도 총감 이승훈, 황해도 총감 김구, 강원도 총감 주진수와 이동녕, 김도희 등이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각도 대표들은 자기 지구에 돌아가 서간도에 세울 독립군 기지 건설의 이주민 모집사업을 시작함과 동시에 그 군자금으로 평남 ・ 평북 ・ 황해는 각 15만원, 강원은 10만원, 경기와 충청 ・ 경상 ・ 전라는 20만원의 군자금을 15일 이내에 준비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안태국은 평양으로 돌아온 뒤 15만원의 군자금과 이주민 모집사업을 실행하였다.
신민회 중앙본부는 두 차례의 간부회의 결과에 따라 1910년 12월부터 선발대인 이동녕 ・ 이회영 등이 비밀리에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한 단체 이주를 준비하고, 1911년 봄에 대대적인 단체 이주를 실행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일제가 1910년 11월 ‘안명근 사건’(안악사건)을 기회로 1911년 1월 안악군을 중심으로 신민회 황해도지회와 중앙본부의 간부들을 검거하였고, 그 조사과정에서 간도에 독립군기지 ・ 무관학교 설립계획을 포착하여 신민회 간부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안태국은 이로 말미암아 양기탁 ・ 주진수 ・ 김도희 ・ 임치정(林蚩正) ・ 고정화(高貞華) 등과 함께 체포되어 1911년 7월 22일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일제는 독립운동세력을 강력한 서북지방부터 해체하고자 이른바 ‘데라우치(寺內) 총독 암살음모 사건’을 조작하여 전국에 걸쳐서 신민회 간부급 애국자 600~700명을 일시에 체포하였다. 이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1911년 10월 처음으로 ‘신민회’라는 국권회복운동 ‘비밀결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일제는 조직의 실체를 밝혀내기 위해 회원들에게 전대미문의 살인적 고문만행을 자행하였다.
안태국은 당시 복역 중에 신민회 회원으로 지목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하고 재기소되었다. 그는 공판 중에 정확한 기억과 물증까지 제시하면서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사건’이 날조된 것임을 논리정연하게 폭로하여 일제 재판부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1912년 9월 28일 안태국은 양기탁 ・ 윤치호 ・ 임치정 ・ 이승훈 ・ 유동열 등과 함께 신민회 사건(‘105인 사건’)의 최고형인 10년 징역의 언도를 다시 받고, 모두 12년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가 해체되었지만 신민회 회원들 중에서 일부는 1911년 이른 봄 만주 봉천성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신한민촌을 건설하고 ‘신민회가 흥국(興國)한다’는 뜻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건설하였다. 이 무관학교는 만주 군벌의 탄압을 피하기 위해 처음에는 신흥강습소로 불렀다가 뒤에 신흥무관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1913년에는 이동휘 등이 왕청현 나자구(汪淸縣羅子溝)에 동림무관학교(東林武官學校)를, 밀산현 봉밀산자(密山縣蜂蜜山子)에 밀산무관학교(密山武官學校)를 설립하였다. 신민회는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되는 어려움 속에서도 세 개의 무관학교와 독립군기지를 창건하여 투쟁을 이어나갔다.
안태국은 1915년 2월 13일 투옥된 모든 인사들과 함께 투옥된 지 5년 만에 풀려났다. 가혹한 고문과 열악한 감옥 생활에 몸은 모두 상처투성이였고, 왼쪽 눈은 절반이 감긴 거의 실명 상태였으며, 입도 왼쪽으로 돌아가서 거의 폐인 노인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는 1916년 가족들을 이끌고 북간도 혼춘(琿春)으로 이주하여 새 근거지를 마련하고 독립운동을 다시 시작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혼춘지방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어서 이명순(李明淳) ・ 이광택(李光澤) ・ 황병길(黃炳吉) ・ 고일섭(高一燮) ・ 김정규(金正奎) ・ 김한익(金漢益) 등 후배 동지들과 함께 한민회(韓民會)를 창립하고, 그 산하에 결사대원을 모집하여 한민회 독립군을 창설하는데 노력하였다. 한민회군(韓民會軍)은 청산리전투에도 참가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몸담고 있던 안창호의 초청을 받은 안태국은 1920년 3월 25일 동지 이보(李輔)와 함께 상하이에 도착하여 옛 동지들을 다시 만났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러시아령 연해주 동포들과 독립운동의 상황을 군사 ・ 외교 ・ 자치 ・ 재정 ・ 교통 등 5가지로 나누어 보고하였다. 임시정부 내의 요직을 고사하고 분열되어가는 북간도 동포들과 연해주 동포들의 민심을 대동단결시켜 이 지역 독립운동의 강화발전에 헌신할 뜻을 밝혔다. 결국 안창호가 이를 받아들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파원으로 임명하여 파견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안태국은 장도에 오르기 전에 갑자기 장티푸스에 걸려서 1920년 4월 11일 적십자 병원에서 애석하게도 46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1920년 4월 14일 상하이 정안사로(靜安寺路) 외국인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1~2안태국 선생 운구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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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안태국 – 국가보훈부 독립운동가, 국가보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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