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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2년 11월 5일, 황해도 안악(安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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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미상 |
관련 사건 | 3・1운동 |
주요활동 | 1919년 3월 황해도 안악군 독립만세운동 계획 주도 |
포상훈격 |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 |
관련 인물/단체 | 천도교 |
1872년 11월 5일 1919년 3・1운동 당시 황해도 안악군(安岳郡) 은홍면(銀紅面) 운곡리(雲谷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김승주(金昇周)이다. 천도교 안악대교구장(安岳大敎區長)을 맡고 있으면서 1919년 3월 안악군 독립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독립 선언 후 교주 손병희(孫秉熙) 등 천도교 지도부는 독립 만세 시위의 전국적인 확산을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천도교인 8,000여 명이 산재한 황해도 각 지역에도 이러한 계획이 전달되었다. 소식을 접한 신천군(信川郡) 교구장 최흥숙(崔興淑)은 3월 2일 교인 김재선(金在先)에게 민족대표 33인의 독립 선언과 만세 운동 상황을 송화군(松禾郡) 교구에 전달하라고 지시하였다. 김재선은 송화교구에 찾아가 교구장 손두순(孫斗淳)에게 이를 전달하였다. 이때 손두순을 불러 서울의 만세 운동 상황을 이야기하였고, 손두순은 이를 사람들에게 전파하였다.
천도교 교구장들의 역할로 황해도 각지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안악군에서는 11일 은홍면 온정리(溫井里)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나 시위 군중이 헌병주재소를 습격하다가 일본 군경의 총격으로 사망하거나 다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1919년 5월 22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8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한국 민족이 독립을 희망하여 독립 운동을 한 것은 정의 인도에 맞는 것이며, 구미(歐美) 사람도 한국의 독립을 찬성하는데 일본이 이에 찬성하지 않는 것은 천리를 거역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상고하였지만, 6월 30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출감 후에는 천도교 활동에 매진하였다. 1922년 천도교 중앙총부 종의원(宗議院) 종의사(宗議事)로 활동하였다. 손병희의 사망 후 교주로 임명된 박인호(朴寅浩)의 인정 여부를 둘러싼 천도교단 내부 대립에서 박인호를 인정하는 교인대회파(敎人大會派, 소위 천도교 중립파)에 소속되었다. 교인대회파는 교단 지도자들의 강한 정치지향성에 불만을 품고 천도교가 순수한 종교적 결사체로 운영되기를 원하는 입장이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천도교는 3파(신파, 구파, 중립파)로 분열되자 중립파(천도교 사리원파)에서 활동하면서 천도교의 통합에 일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집필자 : 이주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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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판결문(김승주 외)」, 고등법원 형사부, 1919.6.30
- ・ 『매일신보』 1922.4.15
- ・ 『조선중앙일보』 1935.2.18, 4.6
- ・ 김정인, 「1910~25년간 천도교 세력의 동향과 민족운동」, 『한국사론』 32,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1994
출처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인명사전으로>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하여 그동안 축적된 연구기반 위에서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사전적으로 종합, 정리하기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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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김승주 –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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