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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기득권 세력은 누구인가?
인도는 다양한 집단의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복잡한 사회 구조 속에서 유지되는 국가다. 종교적인 갈등으로 독립 이후 세 나라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렀고, 지역 간 문화적 장벽을 억지로 통합하려다가 끊임없는 소요가 발생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 카스트 제도와 부의 불균등한 분배로 인해 소외 받는 하층민들의 평등을 갈구하는 목소리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전달되어 국가 안보까지 위협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원전부터 유지되어 온 기득권 세력은 크게 변하지 않은 채 21세기 인도는 독특한(?) 발전을 이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기득권 세력은 누구를 말하는 걸까?
종교적으로 힌두교를 신봉하고, 계급적으로 브라만을 위시한 크샤트리아, 바이샤 상위 세 개 카스트에 속해 있으며, 인종적으로 아리안 계열의 범힌디어권 사람들이면서 교육을 받은 중상류층이다. 이들 중에서도 브라만을 위시한 소수의 상류층은 절대 권력의 핵심에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인도 역사에서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갈등 혹은 가진 자들 사이에서의 권력 투쟁의 역사는 현대 인도 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인식의 틀을 제공해 준다. 그 한 예는 다음과 같다.
기원전 6세기경 북인도 보드가야에서 오랜 수행을 거친 젊은 청년이 새로운 종교를 창시했다. 그는 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수행을 통해 득도하면 신처럼 될 수 있다고 설파했다. 당시 제의적인 종교인 브라만교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주장이었다. 그의 이름은 불교를 창시한 가우타마 싯다르타다. 불교의 출현으로 인해 그때까지 종교적 기득권을 갖고 인도 사회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던 브라만의 입지가 좁아지고, 정치적 권력자인 왕과 귀족들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강화되었다.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왕이 불교를 장려한 것도 이런 정치적 계산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빈농과 부족민의 굴레
낙살 반군 세력의 주축을 이루는 빈농과 부족민은 공동 운명체라는 점에서 이견이 없다. 하지만 이들의 지난날을 돌아보면 조금 다른 역사적 상흔을 갖고 있다. 빈농들은 고대부터 주로 평지에서 힌두교 카스트 계급에 노출되어 살던 하층민이었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것은 둘째 치고 신분적으로 도저히 상승 불가능한 수드라에 속해 있거나 불가촉천민이었다. 가난과 신분의 대물림이 인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21세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은 놀라울 정도다.
그러나 부족민의 스토리는 조금 다르다. 이들은 정글이나 산악 혹은 오지에서 씨족 공동체를 이루며 살던 자들로, 힌두교의 영향보다 샤머니즘의 영향이 두드러진 자연친화적 삶을 영위했다. 요즘 서구 환경보호론자나 일부 진보학자들이 주장하는 ‘토착민(Indigenous people)’이 이들을 칭하는 용어이며, 인도에서는 ‘아디바시(Adivasi)’라는 말로 부르고 있다. 고대와 중세에는 알려져 있긴 했지만 접촉이 거의 없어서 독립된 삶을 영위했던 부족민이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통해 본격적으로 힌두 사회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들이 영국인과 힌두교인들 앞에 제 발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거꾸로 발견되었다고 보면 좋을 듯싶다.
영국이 인도를 제국주의의 전초기지로 삼은 18, 19세기는 수탈 경제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산림 개발과 벌목을 빌미로 부족민의 땅을 잠식해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맞부딪쳐 알게 된 사람들이 부족민이다. 이와 함께 이전부터 부족민과 간간이 관계를 맺고 있었던 힌두교 지주와 사업가들은 새로운 농지 확보와 사업 확장을 목적으로 부족민 사회에 접근했다. 소수의 백인 통치자들이 접근하기 힘든 지역에 인도인이 들어가서 개발에 협조한다면 식민 정부로서도 이득이라는 판단을 한 것이다. 결국 두 세력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지역 기득권 측면에서 경쟁 관계에 있던 두 세력이 공통의 목표를 위해 공생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본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영국인과 힌두교인들에게 생업의 터전을 빼앗기고 고유의 문화 전통과 자치권마저 잃어버리게 된 부족민은 하루아침에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힌두교 카스트 사회와 전혀 상관없이 지내던 이들이 힌두 사회에 강제 편입되면서 불가촉천민과 같은 카테고리에 놓이게 되었다. 마치 아메리카 원주민이 백인들에게 자신의 삶의 터전을 빼앗긴 것과 비슷한 과정을 거친 것이다.
부족민을 보호하고 이들에게 근대적 교육과 의료 혜택을 제공한 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서구 선교사들이다. 이들은 19세기 중반 힌두교 사회에서 포교 활동이 지지부진해지면서 우연히 부족민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부족민에겐 힌두교의 높은 장벽이 없었기에 기독교 포교가 용이한 측면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영국과 미국을 위시한 여러 선교회가 앞다투어 부족민이 있는 지역으로 들어갔다.
대표적인 부족 지역으로 벵골 주의 산탈, 자르칸드, 오리사의 산악 지역, 마하라슈트라와 구자라트 주의 경계인 빌 부족 거주지 등이다. 그래서 현재까지 부족민이 밀집되어 있는 곳에 교회나 성당이 자주 눈에 띈다. 특히 가톨릭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식민 정부와 힌두 지주들의 횡포에 항의하고 저항하는 운동이 일어나긴 했지만 이들의 노력도 부족민의 억압 받는 현실을 바꿀 수 없었다. 그렇게 종속 관계는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인도 정부가 당면한 과제 중의 하나가 국가 통합이었다. 이미 파키스탄을 다른 국가로 떠나보냈기 때문에 남은 인도 땅의 다양한 세력을 하나로 묶는 일은 네루 정부에 있어서 중요한 선행 과제였다. 그럼, 과연 누구를 위한 통합이어야 할까?
네루는 가난하고 무지한 농민들이 다수인 인도에서 이들을 최대한 배려하려면 사회주의 경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믿었고, 의회 민주주의가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경제 문제에 있어서 토지개혁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정부가 추진했던 토지개혁은 몇몇 부농들의 땅이 중농들의 손에까지 나누어지는 성과만을 거둔 채 끝을 맺었다. 예전의 부농들과는 달리 중농들은 기존의 사회적 유대관계를 무시한 채 경제적 이해득실 관점에서 소작 문제를 다루었다. 소작농들은 경제 논리로 인해 예전보다 더 메말라 버린 소작 관계를 경험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다수의 빈농은 어설픈 토지개혁으로 인해 경제적 예속이 가중되는 현실을 맞이했다.
차(茶) 플랜테이션의 임노동자들도 비슷한 예속 관계로 고통받는 것이 전혀 해결되지 않았다. 적은 임금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지 못하니 농장에 돈을 꾸게 되었고, 고리대금 형식인 탓에 순식간에 빚쟁이가 되어 차밭에서의 노동이 빚 갚는 행위가 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렇듯, 서민을 위한다는 취지로 네루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했던 국가통제 경제가 오히려 정부 인가를 받은 소수 특권층의 산업 독점이 진행되어 이들의 전횡이 다수의 농민을 고통에 빠지게 하는 기대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낙살바리 봉기와 반정부 무장투쟁
1967년 3월 서벵골 주의 북부 산악 마을 낙살바리(Naxa bari)에서 대규모 농민 시위가 있었다. 100여 명의 농민이 농기구와 무기를 들고 지주의 집을 습격하여 곡식을 나눠 가지는 사태가 벌어졌고, 석 달이 훌쩍 지나서야 경찰에 의해 가까스로 진압되었다. 1967년의 낙살 봉기는 마오주의 공산당의 조직적인 활동에 의해 일어났다는 점에서 다른 봉기들과 다른 성격을 갖고 있다. 낙살바리 인근의 농민들이나 산악 부족들이 연합하여 반지주, 반정부 투쟁을 이어나가게 된 단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을 낙살 반군(Naxalites)이라 부르는 것이다.
인도 지도에서 보면, 낙살바리를 북동쪽 정점으로 해서 남동쪽까지 형성된 낙살 반군 주요 활동지를 확인할 수 있다. 서벵골, 비하르, 자르칸드, 차티스가르, 오리사, 안드라프라데시, 타밀나두 등의 주가 속해 있다. 지역적으로 산악 부족민이 집중되어 있거나, 카스트 하층 농민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2006년 인도 중앙정부 정보국 조사에 의하면, 낙살 반군의 수가 7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들에게 동조하는 무리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으니 7만 명보다 더 많은 지지 세력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2007년에는 인도 수상 만모한 싱(Manmohan Singh)이 카슈미르 이슬람 무장 세력이나 나갈랜드각주1) 무장 독립 세력 등이 아닌 낙살 반군 세력이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가장 큰 문제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정부 차원에서도 심각하게 생각하는 낙살 반군 문제가 근본적인 해결책을 도출해 내지 못한 채 40년 이상 이어져 오고 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기득권의 강한 진이 있기 때문이다. 누천년을 이어온 그 세력, 왕조가 바뀌고 최대 권력자가 바뀌어도 이들은 각자의 지역에 뿌리를 내린 지방 토후 세력이었기에 그 어떤 통치자들도 이들과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굴 황제나 영국 식민지 총독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낙살 반군의 활동이 이런 기득권을 향해 도전장을 내던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들은 무장 투쟁을 선택했을까? 한마디로 무장 투쟁 외에는 해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그들을 대표해 주지 않았고, 정부의 토지개혁은 가진 자의 배를 더 불리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결국 더 이상 사회적으로 비인격적인 대우와 경제적으로 착취받는 악순환을 대물림할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가 그들로 하여금 총을 들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산속으로 숨어 다니면서 정부와 대치하는 불안하고 고단한 삶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반정부권으로 낙인찍히면서 말이다.
그러나 인도 정부가 이들을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은 채 단지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사회악으로 취급해 버리는 정책만 일관적으로 추진하고 있어서 낙살 반군의 꿈이 실현될 날은 요원해 보인다.
힌두 국가 건설을 위해 조직된 RSS
RSS(Rashtriya Swayamsevak Sangh, 국가 자원자 협회)는 1925년 헤드게와르(Hedgewar) 박사가 힌두교 이상사회의 건설을 위해 창설한 단체다. 이 단체가 지원하는 정치 단체로는 힌두 마하사바가 있었다. 인도국민회의당 내에서도 세속주의 이념보다 힌두교 이념을 더 신봉했던 여러 정치인이 마하사바에 소속되어 독립운동을 했을 정도로 힌두교 내에서 강력한 내부 결집력을 갖고 있었다. 또한 동시대 경쟁 관계에 있었던 무슬림 연맹을 견제하는 세력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전 인도인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려면 단합된 힘이 필요했는데 RSS의 힘은 거기에 미치지 못했다. 이들은 비힌두교인들까지 아우르는 간디의 독립 노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대안 세력이 될 때까지 참아야 했다. 그러나 힌두교인들을 결집시킨 독립운동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적어도 무슬림들이 더 이상 인도 땅에서 재기할 수 없을 만큼 그들을 제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RSS에게도 위기가 찾아왔다. 그것이 조직적이든 우발적이든 상관없이 민족의 영웅 간디가 RSS 소속 힌두 광신도에 의해 살해당했기 때문에 RSS는 졸지에 이적단체가 되어 단체의 활동을 금지당했다. 그러나 그 세력이 다시 힘을 받기 시작한 때는 인디라 간디 수상의 철권통치 막바지부터였다. 시기적으로 1980년대부터 조직적 힌두 국가 건설의 바람이 불었고, 국민회의당을 대체할 정치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는 힌두근본주의 노선의 인도국민당을 적극 후원하면서 영향력을 키웠다.
드디어 1991년 북인도의 힌두교 성지인 아요디아각주2) 에서 한 가지 사건이 발생했다. 무굴 제국 초기에 세워진 이슬람 사원인 바브리 마스지드(Babri Masjid)가 RSS의 청년전위 조직 바즈랑 달(Bajrang Dal)의 선동과 힌두 광신도들에 의해 훼파된 것이다. 주동자들의 주장은 바브리 마스지드가 힌두 신 라마각주3) 의 출생지 아요디아에 있던 힌두 사원을 헐고 그 자리에 세운 이슬람 사원이기에 원래대로 복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현재까지 결론이 나지 않은 채 선거철만 되면 정치인들의 종교적 색깔론의 단골 메뉴로 등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뿐만 아니라, 2002년에 있었던 구자라트 주의 고드라 열차 방화사건으로 인해 자행된 무슬림 학살, 2008년 오리사 주의 칸다말에서 있었던 기독교인 학살 등은 RSS와 관련 단체들이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사건들이다. 이러한 일들은 인도국민당의 일인자였던 아드바니(L. K. Advani)를 위시한 당의 정치인들이 힌두교인들로 하여금 종교공동체주의를 조장한 결과이기도 했다.
특히 21세기 현대 인도에서 매스 미디어, 교육, 정치, 경제, 문화 등을 이용해 조직적으로 인도의 힌두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나카지마 다케시가 《인도의 시대》에서 힌두내셔널리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지적한 내용이 큰 시사점을 던져 준다.
힌두내셔널리스트가 교묘한 점은, 힌두교적 가치의 회복을 주장하거나 누구나 혹할 만한 활동을 전개할 뿐만 아니라 그 상황에 맞추어 비난의 타깃으로 삼을 수 있는 명확한 적을 (음으로 양으로) 제시하여 자기들이야말로 진정한 피해자라는 사실을 호소한다는 데에 있다. 지금처럼 윤리규범에서 이탈한 사회를 만들어 내고 힌두의 ‘다르마’를 오염시킨 자로서 무슬림, 기독교인, 세속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 구 식민통치자, 파키스탄, 외국자본 등을 상황에 맞추어 거론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야말로 현재의 인도에 온갖 곤경을 초래했으며 힌두가 누릴 수 있는 질서와 권리를 저해한 장본인들이라고 감정적으로 호소한다.
간디의 죽음과 종교공동체주의
간디의 죽음을 예로 들어 보자. 1948년 1월 30일,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가 힌두근본주의 단체 RSS 소속의 한 청년의 흉탄에 맞아 쓰러졌다. 독립된 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온 국민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간디는 그렇게 허망하게 인생을 마감했다. 역사적으로 우연의 일치일까? 이듬해 서울에서 민족의 지도자이자 독립 영웅이었던 김구 선생도 반공주의자였던 안두희 소위의 총에 맞아 유명을 달리했다. 하나의 조국을 만들기 위해 말년까지 사투를 벌이다 결국 두 동강 난 조국의 반쪽짜리 독립 앞에서 참담한 눈물을 흘렸던 간디와 김구는 각자의 조국, 인도와 한국에서 뜻을 달리하는 근본주의자들의 손에 의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해방 공간의 서울은 그야말로 좌우 대립으로 인해 극도의 혼란상을 보이고 있었고, 그 대립을 종식시키고 하나 된 민족국가 수립을 외친다는 것은 일면 당연하면서도, 다른 일면으로 매우 위험한 시도임에 틀림없었다. 그것은 흑백논리가 지배하는 사회 풍토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노선이었기 때문이다. 김구는 아군이 아니라면 적이 되는 시대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간디의 죽음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화장과 장례행렬은 인산인해를 이루는 조문객으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거의 신적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정도로 절대적 영향력을 발휘하던 간디의 죽음 앞에 모든 인도인은 슬퍼했다. 간디를 살해한 자는 RSS에 속한 힌두근본주의자였다. 간디 자신이 철저히 힌두교인으로 살아왔지만, RSS의 눈에 간디는 정통 힌두의 가치를 국가적으로 수행하지 않는 회색주의자쯤으로 비쳤을 수 있다. 무슬림들을 한시민으로 끌어안으려 했던 간디의 행동 앞에서 그들은 분노와 서운함이 앞섰다. 독립된 인도가 무슬림들로 인해 영토가 잘려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나무라거나 책임을 묻지 않고 오히려 감싸 안으려 했던 태도는 힌두 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RSS들에게는 반역적인 행동으로 비쳤을 것이다.
간디가 죽음을 맞기 바로 몇 달 전 1947년 8월 15일 해방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며 델리의 붉은 성에서 네루 수상이 역사적인 독립 선언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그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펀자브와 벵골 지방을 중심으로 대규모 유혈사태가 일어났었다. 무슬림은 힌두나 시크교도를 폭행, 살해, 강간, 약탈했고, 반대로 힌두나 시크교도들도 무슬림을 동일하게 대했다. 통계에 의하면, 대략 1,000만 명이 피난을 갔으나 그 이동 과정에서 약 50만 명이 목숨을 잃거나 행방불명되었다. 실로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동포끼리 살육전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간디는 같은 국민끼리 더 이상 증오하지 말고 서로 이웃으로 받아들일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이미 갈라진 영토와 마음을 가진 힌두근본주의자들은 간디를 더 이상 자기편으로 인식하지 않고 현실 정치의 커튼 뒤편으로 던져 버렸다.
이상사회를 추구하는 양 극단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낙살 반군과 RSS 사이에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 의아해할 수 있을 듯하다. 나는 관련성 차원보다 두 개의 각기 다른 성격의 집단이 가지는 공통점에 주목하게 된다. 한쪽은 누대에 걸쳐 이어져 온 착취의 사슬을 끊고 반노예적인 삶을 청산하기 위해 마오주의자(Maoists)가 되어 폭력 혁명을 꿈꾸는 이상주의자들이 된 반면, 다른 한쪽은 힌두교 근본주의 노선을 통해 전 인도가 힌두 국가로 거듭나기를 조직적이고 총체적인 관점에서 노력하는 이상주의자들이다. 둘 모두 양 극단의 중심에 서 있다는 점과 현실적이지 않은 이상주의에 근거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두 집단이 한 나라에 공존하면서 겪게 되는 충돌과 긴장은 점점 고조될 것이다.
이 양 극단의 어디에도 확실하게 속해 있지 않으면서 양 집단에 실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세력은 누구일까? 바로 인도의 신중산층이다. 여기에는 하층민 출신이면서 고급 교육이나 경제적 부를 축적하여 중산층에 편입된 사람들부터 정통 상층 카스트 출신이면서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살아가는 중산층까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해당된다. 인도는 절대 빈곤과 착취로 벼랑 끝에 서서 목숨을 담보로 싸우는 민초와 힌두적인 것만이 인도적인 것이라는 망상으로 자신의 기득권과 헤게모니를 놓으려 하지 않는 종교공동체주의에 물든 자들의 화해가 필요하다.
그래서 인도인들은 종교적 자유를 담보한 세속주의 가치와 계급차별을 전근대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평등사상을 갖춘 이들의 노력이 무엇보다 절실한 시기를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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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는 수천 년 동안 갖가지 문화를 받아들이고, 흡수하고 발전시키며 세계 문화의 용광로 역할을 해왔다. 여러 얼굴을 가진 인도의 참모습은 어디까지일까? 인도 전문가가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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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낙살 반군과 RSS의 다른 공통점 – 또 다른 인도를 만나다, 공영수, 평단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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