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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간디를 비판할 수 있는가?
20세기 인도의 역사, 정치, 사상을 살펴볼 때 간디(1869~1948)만큼 큰 영향력을 발휘한 인물도 없을 것이다. 그는 인도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에게 지금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다. 한국의 독립운동가 조만식이나 민주화 운동가 함석헌, 1960년대 미국의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같은 인물도 간디의 비폭력 비협조 운동과 시민 불복종 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현재 인도에 통용되고 있는 지폐의 모든 앞표지는 동일한 인물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데, 그 사람이 바로 간디다.
이처럼 간디의 상징적 가치는 인도인들과 인류에게 있어서 매우 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남긴 명언들만 모아도 몇 권의 책으로 편찬할 수 있을 정도다. 필자는 “단순한 삶, 고상한 생각(simple life, high thinking)”이라는 그의 말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의 추모공원인 라즈가트(Raj Ghat)에 새겨져 있는 ‘사회의 7대악(철학 없는 정치, 도덕 없는 경제, 노동 없는 부, 인격 없는 교육, 인간성 없는 과학, 윤리 없는 쾌락, 헌신 없는 종교)’이 현대 사회의 문제를 핵심적으로 지적했다는 점에서 그의 혜안에 놀랄 뿐이다.
이런 간디를 비판하거나 그의 한계를 지적한 동시대 인물들이 얼마나 있었을까? 개인적으로 논문 조사를 하던 중 방대한 분량의 《간디 어록》과 그와 관련된 다른 자료들을 얼마간 살펴본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그의 생전의 행적과 그가 가졌던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 속에서 재미있는 내용들을 발견했다. 그중 한 가지만 먼저 말하면, 모든 인도인이 간디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그와 정치, 사상적으로 대척점에 있었던 지도자들은 간디의 주장에 대한 모순을 발견해 내고 맹렬히 비난했다.
이제 살펴볼 두 사람은 그 부류의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진나(Muhammad A. Jinnah, 1876~1948)와 암베드카르(1891~1956)다. 간디를 포함한 세 명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하나는 직업적 공통점이다. 세 명 다 법학을 전공한 변호사였고, 영국 유학파였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다 영국으로부터 인도를 독립시키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친 애국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너무나도 상이한 출신 배경을 갖고 있었다. 간디는 인도 서부의 구자라트 주의 부유한 상인 카스트에서 태어난 힌두교인이었고, 진나 또한 간디와 같은 구자라트 주의 상인계층이지만 무슬림이었다. 암베드카르는 인도 중서부 마하라슈트라 주의 불가촉천민인 마하르 출신이었다.
암베드카르, 간디에게 맞서다
간디가 보기에 암베드카르는 또 다른 분리주의자였다. 하나의 인도라는 이상 앞에서 무슬림의 독자적 행보를 어떻게 해서라도 막아보려 했던 그에게 달리트의 독자 노선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암베드카르가 1931년 영국과의 제2차 원탁회의에서 주장한 달리트만의 독립된 선거구 요구가 간디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여지자 간디는 극단의 조치를 취하게 된다. 바로 단식투쟁을 한 것이다. 간디는 독립운동을 할 때 고비에 부닥칠 때마다 특유의 방식으로 어려움을 돌파하는 탁월함이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면 바로 단식이다. 영국 정부가 그의 죽음을 담보로 한 투쟁 앞에서 두 손을 드는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자신이 한 단식 투쟁 가운데 이번은 유일하게 영국 정부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암베드카르가 대상이었다. 원탁회의의 결정에 불복한 간디는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기 위해 단식에 들어갔다. 간디의 죽음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비난의 화살을 암베드카르에게 돌렸다. 갑자기 정치적 수세에 몰린 암베드카르는 중대한 결정을 해야 했고, 결국 달리트 독립 선거구 주장을 철회하는 것을 조건으로 간디의 단식을 6일 만에 종식시킬 수 있었다. 아마도 쓰디쓴 독주를 마신 기분이었을 것이다.
“인도 국민회의와 간디가 우리에게 해 준 것이 무엇인가?(What did the Congress and Mr. Gandhi do for us?)”라는 유명한 연설을 통해 암베드카르는 상층 카스트 중심의 국민회의와 간디의 정책이 자신과 같은 하층 카스트를 여전히 차별하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간디가 달리트를 ‘하리잔(Harijan, 신의 자녀)’이라 부르면서 하층 카스트에 대한 동정심을 나타냈다. 그러나 암베드카르는 하리잔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 말 속에는 상층 카스트들이 달리트를 배려해야 한다는 온정주의(paternalism)를 내포하고 있었지만 달리트의 차별받는 현실을 반영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암베드카르는 배려를 받는 차원을 넘어 동등한 인권을 지닌 독립된 존재로서의 달리트 운동을 지향했다. 그래서 그는 ‘피억압 계층(the Depressed Classes)’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불가촉천민을 비롯한 유사한 억압 가운데 있는 부족민(tribals)과 노동자 등을 포함시켜 강한 연대를 이루고자 했다. 카스트를 기초로 한 신분 계급의 틀을 확장시켜 억압하는 계층과 대척점에 있는 억압당하는 계층을 표현한 것이다. 이는 카스트 자체를 부정하는 그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암베드카르가 간디에게 맞서 싸웠던 이유는 달리트에 대한 서로의 지향점이 달랐기 때문이다. 간디는 하나의 인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힌두교 내의 카스트 제도를 존속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그 바탕 위에 상층 카스트가 달리트를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실제로 이들을 위한 여러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암베드카르는 카스트 제도의 철폐를 주장했고, 달리트가 독립된 주체로 인정받아야 평등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마치 여전히 차별 받는 흑인 입장에서 보았을 때, 노예무역을 폐지시킨 영국인들이나 미국인들이 자신들이 만민평등을 이룩했다고 떠드는 것을 지켜보며 느꼈을 감정과도 같다. 암베드카르는 바로 간디에게서 동일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독립된 인도의 초대 법무부 장관으로 헌법에 계급 평등을 명기하긴 했지만, 암베드카르는 현실의 두터운 계급 차별에 실망하여 말년에 불교로 개종하는 것으로 인생을 마감했다.
진나의 파키스탄 운동과 간디
자스완트 싱(Jaswant Singh)이라는 저명한 인도국민당(BJP) 중진 정치인이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 파키스탄 건국의 아버지인 무하마드 알리 진나에 대한 평가가 언급된 그의 책이 최근에 출판되면서 힌두교 근본주의 노선을 걷고 있는 인도국민당에서 그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연일 끊이지 않고 있다. 그의 저서 《진나: 인도, 분단, 독립(Jinnah: India, Partition, Independence)》에 의하면, 진나가 인도 분열의 주범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힌두교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인도국민당의 중진 정치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발언을 한 것이다. 이로 인해 자스완트 싱은 당적을 잃게 되었고, 여러 힌두교인들의 공격 대상이 되고 말았다. 솔직히 그의 주장은 역사적으로 보면 그리 잘못된 것이 아님에도 종교가 정치 이념인 자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이처럼 진나는 현대 인도인들 사이에서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다. 20세기 초 간디와 함께 국민회의당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까지 그의 독립된 인도의 비전은 종교적인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세속적 가치가 여러 다양한 종교와 인종 집단들을 하나로 묶어 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의 비전과 현실 사이에는 거리감이 있었다. 300년 무슬림 통치와 200년 영국 통치를 견뎌 오면서 힌두교인들 사이에서는 더 이상 타종교인들에게 통치를 받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의식이 팽배해 있었다. 인도의 독립이 가시화되어 갈수록 힌두 중심의 인도 건설의 꿈도 기정사실화되었다.
진나 입장에서 간디는 인도 독립의 영웅이기 이전에 힌두교인이었다. 그가 소수자, 약자를 끌어안으려 시도하기는 하지만 다수 힌두교인들로 하여금 기득권을 포기하게 하지는 못한다고 생각했다. 진나는 무슬림이 인구 수적으로 네 명 중 한 명꼴로 무시할 수 없는 비중이었음에도 독립된 인도에서 소수자로 살아가야 하는 비참한 상황이 올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며 ‘파키스탄 운동(Pakistan Movement)’을 주도하게 된다. 1940년 그가 선언의 선봉에 있었던 ‘라호르 결의(Lahore Resolution)각주1) ’는 독립과 동시에 무슬림이 다수인 주를 분리하여 새로운 이슬람 국가를 세운다는 것이었다.
사실 세속주의(secularism)각주2) 를 자신의 정치 모토로 하고 있었던 그에게 파키스탄을 세우는 것은 의아한 결정이었다. 그래서 아예사 잘랄(Ayesha Jalal) 같은 역사학자는 그의 파키스탄 운동은 사실 분리가 확정되었던 1947년 초까지 영국 정부와 인도 지도자들로부터 협상을 유리하게 전개하기 위한 전략이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요컨대, 진나는 파키스탄이 인도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협상 과정에서 무슬림이 독립된 인도에서 힌두교인들과 동등한 지위와 대우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면서 마지막 결정으로 파키스탄을 선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파키스탄 건국 과정에서 진나는 소수 집단인 기독교인, 파시교인, 달리트 등의 지지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 노력했고, 이들이 새 국가에서 차별 받지 않게 하기 위해 언론이나 대국민담화 등을 통해 파키스탄은 세속적 가치를 중시하는 공화국이 될 것임을 거듭 강조하기도 했다.
그의 파키스탄 운동은 간디와의 한판 승부였다. 무엇을 위한 승부였을까? 바로 누가 소수 집단을 대변할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승부였다. 진나는 힌두교 기득권층에게 지속적인 차별과 무시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파키스탄이라는 신생국이 낙원이 되어 주기를 바랐다. 간디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을 그가 이루어낸 것이다.
현대 파키스탄은 건국의 아버지 진나의 꿈과 이념을 헌법에도 명시하고 있지만, 현실 정치와 사회 속에서 얼마나 계승되고 있는지는 사실 미지수다.
반브라만주의와 카스트 철폐를 외친 페리야르
페리야르(Periyar, 1879~1973)는 남인도 카나다어를 쓰는 부유한 상인 계층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남인도 드라비다 인종각주3) 의 우수성을 내세우며 북인도 아리안 인종 중심의 독립운동과 국가 통합 시도에 반대했던 인물이다. 그는 힌디어 보이콧 운동과 드라비다스탄(Dravidastan) 운동을 한 점에서 유명하지만, 동시에 간디와 다른 사회개혁 노선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인물이다.
1924년 간디와 손을 잡고 카스트 철폐 운동을 추진했던 페리야르는 간디가 자신과 다른 온건주의 정책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매우 실망하게 된다. 간디는 카스트 제도를 없애기보다 기존 제도권 내에서 인본주의에 입각한 사회 변화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간디는 카르마(Karma), 곧 업보(業報)를 믿었으며, 불가촉천민이 자신의 전생의 업보에 따른 결과로 태어났다는 힌두교의 일반적인 해석에 찬성했다. 단지 간디의 차이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촉천민에게 인간적인 대접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페리야르는 그런 면에서 진일보한 인물이었다. 북인도 아리안 브라만에 의해 인도 인구의 다수가 차별을 받고 있으며 카스트의 굴레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카스트 제도를 완전히 철폐하고 브라만주의와 싸워야 함을 역설했다. 페리야르의 주장에 의하면, 간디가 주장한 가진 자의 온정주의가 사회적 약자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제도의 변화 없이 단지 사회적 동정심만으로는 절대 뿌리 깊은 브라만의 기득권과 하층 카스트에 대한 착취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드라비다 민족주의와 맞물려 특히 남인도에서 큰 세력을 형성했다.
암베드카르가 불가촉천민을 대변하는 인물이고, 진나가 소수 종교 집단 무슬림을 대표한다면, 페리야르는 남인도 드라비다인들의 주장을 담아내는 인물이었다. 이들은 각기 다른 출신 배경을 갖고 있었고, 각각 자신이 속한 집단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쳤다. 힌두교 가치와 사회 통합이라는 두 가지 대의명분 앞에 타협이 불가능했던 간디의 주장과 이들의 주장이 일치되는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차이점을 가지면서 이들은 간디와 다른 노선을 걸으며 비판 세력이 되었다.
이처럼 인도의 현대 독립운동사에서 간디주의뿐만 아니라 여러 노선을 함께 고려해서 본다면 총체적인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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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는 수천 년 동안 갖가지 문화를 받아들이고, 흡수하고 발전시키며 세계 문화의 용광로 역할을 해왔다. 여러 얼굴을 가진 인도의 참모습은 어디까지일까? 인도 전문가가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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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간디의 라이벌, 진나와 암베드카르, 페리야르 – 또 다른 인도를 만나다, 공영수, 평단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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