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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에서 만난 타밀 인도인
인도에서 살다 보면 지리적으로 인도와 한국 사이에 위치한 동남아와 중화권(中華圈) 국가들을 한 번쯤 방문할 기회가 생긴다. 특히 항공기가 직항노선이 아닌 중간에 갈아타는 노선인 경우에는 기착지 국가나 최소한 그 도시를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나도 1, 2년에 한 번씩 인도와 한국을 왔다 갔다 하면서 다른 아시아 국가들을 저렴하게 방문하는 특혜를 입었다. 그래서 일부러 항공사들을 달리하며 기착지를 바꿔서 여행하기도 했다. 현재는 식구 수도 늘고 자녀들이 아직 어려서 편하게 빨리 갈 수 있는 직항노선을 선호하게 되어 이전과 같은 여행은 바랄 수 없게 되었지만 말이다.
위에 언급한 방법으로 방문한 나라들 중 특히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는 인도와 관련하여 특별한 감흥을 주었다. 이 두 나라를 수차례 방문했는데 돌아보면 그곳에서 만났던 인도계 말레이시아인, 인도계 싱가포르인들을 떠올리게 된다. 이들 대부분은 타밀어를 쓰는 남인도 출신들이었다. 이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인도의 역사를 공부하다가 알게 된 인도 이민사를 통해서였다. 그와 더불어 인도사를 연구하는 나에게는 당연한 끌림이 있었다. 두 나라의 인구 비율로 보았을 때, 인도계는 두 나라 모두 거의 8퍼센트에 해당한다. 그중 작은 도시국가 싱가포르보다 인구가 많은 말레이시아에 인도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
왜 이렇게 많은 인도인이 동남아에 살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영국의 식민 지배 때문이다. 과거 영국령 식민지였던 나라에는 인도인들이 반드시 무리지어 살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인도 이민자의 수도 현재 전 세계적으로 약 3,000만 명에 이른다. 18세기 중반 다른 나라들보다 인도가 빨리 식민지화되면서 영국의 제국주의 팽창정책호(號)는 돛을 달아 멀리 그리고 빠르게 항해하기에 이르렀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를 포함한 말레이 반도는 그 과정에서 영국 식민지가 되었고, 동남아에서 영국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 부근의 인도차이나 반도는 프랑스가 점령했고,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가 식민지화했기 때문에 영국은 말레이 반도에서 세력을 구축했다.
특히 말레이 반도는 버마와 함께 고무와 사탕수수 산업 등의 노동집약적 산업에 많은 노동자를 필요로 했다. 이미 영국의 지배하에 있었던 인도에서 손쉽게 값싼 노동력을 데리고 와 정착시킨 것이 현재 타밀 인도인들의 동남아 이민사의 시초였다. 시기적으로는 19세기 중반이었다.
이렇게 건너간 이민 1세대가 이제 대를 거듭해 6~8대에 이르러 그 나라 시민으로서 인도인이 된 것이다. 이들은 힌두는 ‘힌두스탄(인도 땅)’에서 살아야 한다는 당시 인도인들의 미신적인 신념을 깨고 인도 땅의 경계, ‘깔리 리버(검은 강)’를 건너 이국 타향에 와 살게 되었다. 이렇게 올 정도라면 나름대로 기구한 인생의 사연들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고향에서 천대받던 하층 계급 출신 중에 신분적 제약을 뛰어넘기 위한 작은 소망을 갖고 온 사람, 소위 동네에서 잘못을 저질러 쫓겨나다시피 하여 제2의 인생을 꿈꾸며 바다를 건너 온 사람, 너무 가난하여 먹고살기 위해 온 사람 등 다양한 사람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이들의 삶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더운 열대 밀림에서 고무나무 수액을 받아내는 일은 매우 고된 일이었다. 수액 성분으로 인해 병이 나는 것은 다반사였으며, 많은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도 이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간직하기 위해 힌두 사원을 세우고 남인도식 음식을 해 먹었으며, 자신들의 언어를 보존하며 살았다.
인도인 디아스포라로 인해 인도 문화가 고대에 힌두교와 불교를 전파한 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현대 동남아 문화의 일부로 정착하게 되었다. 나는 2002년에 말레이시아를 처음으로 방문했는데 아름다운 휴양지로 유명한 페낭 섬에서 며칠 머물렀다. 그때 머물렀던 게스트하우스는 타밀계 인도인 가족이 운영하고 있었다. 카운터를 보고 있던 젊은 타밀 아가씨에게 타밀 인도인으로서의 정체성에 관련된 질문들을 했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은 게스트하우스 주인의 딸이며, 온 가족이 힌두교인이고 가족들끼리는 타밀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가족 중 누구도 인도를 방문한 적은 없다고 했다. 인도는 조상들의 땅이지만 너무 먼 땅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9년이란 세월이 흘러 2011년 여름 온 가족이 델리를 벗어나 휴가차 방문했던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에서 만났던 몇 명의 인도인들과의 대화는 그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동안 양국 모두 경제가 성장한 이유도 있었고, 해외 거주 인도인들에 대한 인도 정부의 관심이 높아져 생긴 결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만났던 한 인도계 택시기사는 이미 인도를 방문했다고 했다. 내가 조상들의 땅 인도에서 무엇을 느꼈냐고 물어보니, “매우 더럽고 사람들이 잘 속여서 다시 가고 싶지 않다”라는 의외의 대답을 했다. 그에게 있어서 인도는 혈통상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존재지만 말레이시아인이라는 시민권이 더 편안하고 실제적인 정체성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한편 동남아에 사는 인도인들 중 그 지역에서 꽤 잘사는 사람도 많이 생겼다. 말레이시아에서 시작한 저가항공사 에어아시아(Air Asia)의 창업자 페르난데스는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축구선수 박지성이 소속된 적이 있는 QPR의 구단주로 한국에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인도계 말레이시아인이라는 점은 성공한 인도인 이민자의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싱가포르 인도인들은 대부분 중산층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반면, 말레이시아는 상황이 좀 다르다. 말레이시아는 이슬람 국가로서 힌두교를 신봉하는 소수 인종 타밀 인도인들에게 관대할 리가 없다.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말레이 인종은 정치, 행정, 군사 방면에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고, 1/4 정도를 차지하는 중국계는 경제, 교육 쪽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들 사이에서 힘겹게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자들이 타밀 인도인들이다. 페르난데스 같은 경우는 결코 흔하지 않다.
아프리카 동부와 남부에서 상권을 쥐고 있는 구자라트 인도인
다른 대륙의 영국령에서도 비슷한 유형의 인도인 이주 사례가 있었다. 이제 아프리카 대륙으로 가 보자.
과거 영국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최남단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동쪽 해안을 따라 짐바브웨, 탄자니아, 소말리아, 우간다, 케냐, 에티오피아 등의 나라들에 특히 인도인이 많이 산다. 아프리카에는 구자라트인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그것은 지리적 이유가 큰 영향을 미쳤다.
서해안에 면한 구자라트가 예로부터 아라비아 해를 타고 동아프리카 지역과 교역을 했던 역사로부터 시작해 영국을 포함한 서구 열강들이 인도에 진출했을 때 케랄라 주의 말라바르 해안과 함께 구자라트의 수라트를 중심으로 16세기부터 본격적인 무역을 했던 것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래서 구자라트인들은 예로부터 상업에 능했다. 해안과 육로를 통해 현재 파키스탄의 신드 지방과 함께 인도를 드나드는 아라비아 상인들과 가장 빨리 교역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동아프리카의 대부분이 영국 지배하에 놓이게 된 19세기 중반에 영국의 철도 건설 붐이 일어났다. 이때 구자라트인들은 아프리카로 많이 이주하여 영국인 철도회사나 영국군에서 하급관리나 군인이 되거나 혹은 농장이나 공사장의 십장 정도의 위치인 중간 관리자가 되어 살아남았다.
물론 비숙련 임노동자각주1) 도 많이 있었다. 이들은 아프리카인들처럼 차별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이때 이들의 불평등한 대우를 개선하고 영국인의 인종차별에 대항하는 운동을 전개했던 인물이 있다. 그가 바로 그 유명한 마하트마 간디다. 간디는 영국에서 법률 공부를 마치고 인도에서 변호사 활동을 하기 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간다. 그곳에서 핍박받는 인도인들을 변호하며 전개했던 비폭력무저항을 기초로 한 불복종 운동은, 이후 20세기 초 인도에서의 반영 독립운동을 위한 중요한 경험적 자산이 되었다.
구자라트인 다음으로 펀자브 출신도 아프리카에서 꽤 많은 수를 차지한다. 또한 20세기 이후 인도인들이 아프리카 대륙의 불어권이나 포르투갈권에도 진출했기 때문에 그곳에서도 인도인 커뮤니티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인도인들은 주로 상업에 종사하면서 지역에서 꽤 성공한 집단으로 성장했다. 물론 그들 중 일부는 고리대금업 등으로 인해 지역 주민과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영향력 있는 집단이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델리 대학교와 네루 대학교뿐만 아니라, 인도 전역의 대학에 아프리카 학생들이 와서 공부하고 있다. 케냐, 우간다, 에티오피아, 콩고, 나이지리아 출신 학생들에게 자신들의 나라에 사는 인도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긍정 반, 부정 반의 반응을 보였다. 고리대금업자로서의 돈만 아는 인도인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있는가 하면, 나름대로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가는 성공한 인도인으로서의 긍정적 이미지도 있었다.
인도 주변국에 흩어져 있는 인도인
이제 인도 주변 국가들로 눈을 돌려 보자.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이민자가 많을 것이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중 대표적인 두 개의 국가가 네팔과 스리랑카다. 먼저 네팔을 살펴보자.
북인도 주요 주들(우타라칸드, U. P., 비하르, 서벵골 주 등)과 국경을 맞대고 자연스럽게 교류가 진행되면서 인도와 네팔은 무비자, 무여권으로도 방문할 수 있기 때문에 양국의 교류는 오늘날도 매우 활발하다.
네팔 내의 인도인들의 이민의 역사는 딱히 언제부터였는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힌두교와 불교를 위시한 종교적, 지리적인 유대 등이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 온 것으로 미루어 이민의 역사도 매우 길다고 할 수 있다.
나 역시 네팔을 7, 8회 방문했는데, 2010년 여름 잠시 동안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를 방문했을 때의 일을 이야기하겠다. 그곳에서 인도 국적의 네팔인 부부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들은 서벵골 주의 산악 지역 다르질링 근처 칼림퐁 출신으로 딸을 인도인 학교에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인도인 학교가 지역에서 선망의 대상이 될 만큼 높은 교육 수준을 자랑한다고 했다. 부모들의 재정 기부도 많아서 한번은 학교에 도둑이 들어 컴퓨터실의 컴퓨터 수십 대가 도난당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학부모들이 서로 기부하여 그만큼의 컴퓨터를 다시 들여놓았다고 한다. 네팔인들에게 그 인도인 학교는 엄청난 재력가들이 자녀를 보내는 학교로 인식되었다.
실제로 내가 네팔을 방문할 때마다 듣는 이야기지만, 상대적으로 순수한 산악 지역 출신 네팔인들과는 달리 북인도 평지 출신 인도인들이 더 영악한 면모를 갖고 있다. 그래서 상업에 있어서 지역 네팔 상권의 상당 부분을 인도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듯하다. 이에 대해 네팔인들의 불만도 상당하다. 자신들의 땅에서 외부인인 인도인에게 무시를 당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부류의 사람뿐만 아니라, 비하르나 U. P. 주에서 건너온 가난한 임노동자들도 상당수 존재한다. 이들은 네팔에서도 고향 땅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가립 록(가난한 자들)’인 것이다.
‘인도의 눈물’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실론 섬 스리랑카로 가 보자. 스리랑카의 주요 인종은 신할레어를 쓰는 신할레인이고, 대부분이 소승불교를 믿는 불교 신자다. 인접한 인도의 타밀나두 주에서 이민 온 타밀인들이 스리랑카 북부를 중심으로 큰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의 대부분은 영국 식민지 시대 실론에 차 재배가 본격화되었던 19세기 중반부터 이주해 온 타밀 노동자들의 후손이다. 대부분 타밀어를 쓰며 힌두교를 신봉한다. 스리랑카에서 타밀인들의 지위는 그다지 높지 않다.
원주민 신할레인들에게는 타밀인들이 인종부터 언어와 종교가 다른 외래인이기 때문에 불편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신할레인들 사이에서 스리랑카 타밀인들 뒤에는 거대 국가 인도가 있고, 인도의 타밀인들이 있기에 자칫 이들에게 기득권을 빼앗기게 되면 신할레인들의 지위가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퍼져 있는 듯하다.
이렇듯 타밀인들과 신할레인들 사이에는 뚜렷한 경계선이 존재한다. 스리랑카 정부로부터 타밀인들은 여러 차별 대우를 받기도 한다. 또한 최근까지 지루하게 진행되어 온 타밀 반군(일명 ‘타밀 호랑이’)의 근거지인 자프나가 정부군에 의해 탈환되고 반군 지도자도 사살됨으로써 겉으로 드러나는 반군 테러가 사라진 지 채 몇 년 되지 않았다. 그때까지 정부와 타밀 반군의 군사적 대치는 두 인종 간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UN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중재하기도 했지만, 해결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아 결국 정부군의 대대적인 공습으로 반군 세력이 와해되기에 이른 것이다.
여기서 타밀 반군과 관련된 인도 현대사에서 중요한 사건을 소개하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1991년 당시 라지브 간디 수상의 죽음이다. 그때 한창 총선 유세차 타밀나두를 방문 중이던 라지브 간디가 유세 현장에서 한 여인의 자살폭탄테러로 현장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나중에 경찰 조사로 알게 된 사실은 그것이 스리랑카 타밀 반군의 소행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라지브 간디가 타밀 반군의 활동에 반하는 발언과 정책을 폈던 것이 그가 이들의 테러의 표적이 된 주된 이유였다. 타국 땅에서 그 나라 국적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영원한 2등 시민으로 살아가야 하는 타밀인들의 애환이 결국 그들로 하여금 총을 들고 정부에 대항하는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타밀 반군은 존재하지 않지만 이들이 흘리는 눈물은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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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는 수천 년 동안 갖가지 문화를 받아들이고, 흡수하고 발전시키며 세계 문화의 용광로 역할을 해왔다. 여러 얼굴을 가진 인도의 참모습은 어디까지일까? 인도 전문가가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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