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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

다른 표기 언어 동의어 내 위에 어떤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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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05년
사망 1980년
국적 프랑스
대표작 《존재와 무》, 《공산주의와 평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제창했다. 노벨상이 서구 작가들에게 편향되어 있다고 비판하며 1964년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절했다. 2세 때 아버지를 여의지만, '이 세상에 좋은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오히려 축복으로 여겼다. 이미 9세 때 문학 서적 500여 권을 구입하여 읽기 시작했다. 파리 사범대학을 나와 교사 생활을 하는 동안 평생의 동반자 보부아르를 만났다. 제2차 세계대전 때 군복무를 하면서 소설을 썼고,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난 후부터 레지스탕스 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실존주의 문학가 카뮈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프랑스 대통령 드골은 '사르트르 자신이 프랑스다'라고 말한 바 있다.

사르트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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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아버지란 없다

사르트르는 철학, 문학, 예술, 정치, 사회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가장 왕성한 지성의 힘을 발휘한 불세출의 거장이었다. 특히 1964년에 자전적 소설 《말》을 써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었으나 그는 이 최고의 명예와 그에 따라오는 5만 달러의 상금을 거부했다. 노벨상이 서구 작가들에게 치우침으로써 그 공정성을 잃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러나 이 일은 그의 명성을 드높인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흔히 20세기 프랑스의 지성을 말할 때, 사르트르는 항상 그 중심에 서 있다.

사르트르는 파리에서 태어났다. 2세 때 해군 기술 장교였던 아버지를 잃었지만, 그는 아버지 없는 어린 시절을 오히려 축복이었다고 말했다.

"좋은 아버지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만일 나의 아버지가 오래 살았다면 그는 내 머리 위에 군림하며 나를 억압했을 것이다.……나는 내 위의 어떤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죽은 뒤 사르트르는 외가로 갔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원시림의 성자'로 유명한 슈바이처 박사의 큰아버지였다. 6세 때에는 독일어 교사였던 외할아버지가 파리에 외국어연구소를 설립하여 그곳으로 이사했기 때문에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외할아버지는 사르트르를 몹시 귀여워했고, 그에게 문학에 대한 호기심을 심어주었다. 굉장한 독서가였던 외할아버지의 커다란 서재 안에서 사르트르는 마음껏 책을 꺼내 보았다. 책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다. 9세가 되자 센 강가의 헌 책방을 뒤져 모험소설을 비롯한 문학 서적을 500여 권이나 구입하여 읽어나갔다.

11세 때 어머니가 재혼하여 의붓아버지 밑에서 살았는데, 그의 작품 가운데 유난히 자유를 주제로 한 것이 많은 까닭은 이러한 개인적인 체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조금이라도 떠들며 장난을 치면 "애야, 조용히 해라. 여기는 우리 집이 아니야!" 한다거나 혹은 "그것은 만지지 마라! 우리 것이 아니니까" 하고 억압했던 것이다.

계약결혼을 해볼까요?

중고등학교를 마친 사르트르는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전후 프랑스 지성계를 이끈 아롱각주1) , 메를로퐁티각주2) 를 만났다. 이 무렵 그의 관심을 끈 카미유라는 미녀가 있었다. 그녀는 자기 마음에 드는 남자친구라면 누구든지 가리지 않고 잠자리를 같이하며, 알몸으로 난롯가에 앉아 니체를 읽곤 했다. 사르트르는 그녀를 악(?)의 구렁텅이에서 구출하기 위해 설득도 하고 편지도 써서 보냈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얼마 후 어떤 연출가와 결혼해버렸다. 그녀와의 기묘한 연애 소동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사르트르는 학생과 교수 들을 멸시했으며 강의를 잘 듣지도 않았다. 또 단벌옷에 슬리퍼를 끌고 다녔으며, 주정뱅이로 보일 정도로 술을 많이 마셨다. 22세에 《어느 패배》라는 소설을 썼으나 출판을 거절당했다. 원래 문학을 지망했던 그가 철학으로 방향을 튼 데에는 두 가지 계기가 있었다. 어느 날 숙제를 하기 위해 베르그송각주3) 의 책을 읽었던 것과 아롱이 후설(현상학의 창시자인 독일의 철학자)을 소개해준 것이다.

파리 고등사범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사르트르는 교사 자격시험에 실패했다. 그러나 1년간 더 공부한 끝에 이듬해에는 수석으로 합격했다. 이때 사르트르는 보부아르각주4) 를 만난다. 두 사람은 곧 문학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서로 통하게 되었다. 어느 날 함께 영화 관람을 마친 후, 사르트르는 그녀에게 "2년 동안 계약결혼을 해볼까요?" 하고 제안한다. 보부아르가 이 제안에 찬성함으로써 '일생 동안 서로에게 얽매이지 않고 생의 반려자가 된다'는 자유롭고도 유별난 동거 관계가 시작되었다.

사르트르는 삶의 수단으로서 (그의 표현에 따르면) '지긋지긋한 교사'를 지망했다. 고등학교의 철학 교사로 발령을 받은 그는 학생들을 열심히 가르쳤다. 그러나 교장이나 동료, 학부모들과 접촉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같은 해에 보부아르가 마르세유에 있는 리세(프랑스의 국립 중등교육기관. 바칼로레아[대학 입학 자격]를 획득하기 위한 준비교육을 시킨다)로 부임하자 둘은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이때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에게 정식으로 결혼을 하자고 제안한다. 결혼을 하면 같은 도시로 발령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부아르가 거절한다. 결국 두 사람은 방학 때 유럽의 여러 나라를 함께 여행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32세 되던 해 10월에 사르트르는 파리의 고등학교로 옮겨갔다. 먼저 이곳으로 옮겨온 보부아르와 같은 호텔에 투숙하면서 그는 "이제 우리는 파리에서 함께 살게 되었소. 기차를 타고 가서 만난다든지, 역에서 서성거리는 일이 없게 되었소" 하며 좋아했다. 그러나 그들은 각자의 방에서 지냈다. 공동생활의 이점을 모두 취하되, 거기서 오는 불편함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레지스탕스 운동과 공산주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사르트르는 이등병으로 소집되어 알자스 지방에 배치되었다. 기상반원이었던 그는 매우 한가하여 소설을 쓸 수 있었다. 그러나 1940년에 마지노선각주5) 을 지키고 있던 그는 독일군의 파리 입성 후에 포로가 되었다. 다행히 이듬해 3월에 자신의 눈이 사시인 점을 이용해 억류된 민간인들 틈에 끼어 그들과 같이 석방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즉시 독일군을 겨냥한 레지스탕스각주6) 운동에 참여했다. '아우슈비츠각주7) '가 집단 학살의 악마적인 비인간성을 상징한다면, '레지스탕스'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주체적인 인간이고자 하는 결단과 투쟁을 상징한다. 그리고 사르트르는 바로 이 레지스탕스의 중심에 선 철학자였다.

사르트르는 이 와중에서도 1943년 《존재와 무》를 출간했다. 이 책은 출간된 지 13년 만에 46판이라고 하는, 철학 서적으로는 그 유례가 없는 대기록을 세우며 그를 단번에 위대한 철학자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전쟁이 끝난 후 교사직을 그만둔 그는 자유문필가로 활동했다. 메를로퐁티, 아롱 등과 함께 잡지 〈현대〉를 창간하여 실존주의 사상을 전개하면서 소설이나 희곡, 평론 등을 발표했다. 또한 '민주주의와 혁명'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공산주의 진영과 협조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저서 《공산주의와 평화》에서는 공산주의를 '평화의 기수'라고까지 강조했다. 이 무렵 오랫동안 교제해왔던 카뮈, 메를로퐁티 등과는 사이가 벌어진다.

1956년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와 함께 구소련과 중공을 방문하지만 그 해 가을, 헝가리에서 반공 의거각주8) 가 일어나자 그것을 지지하며 구소련의 개입을 비판했다. 이후 구소련에서 스탈린 격하 운동각주9) 이 벌어지자 사르트르는 다시 공산당과의 관계를 회복한다. 하지만 끝내 공산당에 입당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두 가지 이유에서 공산당에 들어가지 않았다. 첫째, 내가 부르주아 출신이기 때문이다. 둘째, 비판의 자유를 잃고 싶지 않아서인데, 공산주의는 비판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프랑스다

사르트르는 드골각주10) 정권이 들어선 이후 그 독재적 성격에 반대하며 반정부 입장을 고수했다. 그리하여 1958년 프랑스 보호령인 알제리에서 독립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알제리를 지지하는 투쟁에 가담했다. 그런데 가담한 모든 사람이 체포되었으나 그만은 제외되었다. 어떤 장관이 드골 대통령에게 그 이유를 묻자, 대통령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사르트르 자신이 프랑스이기 때문이지."

사르트르는 작은 키에 사팔뜨기이긴 했으나 익살 등으로 사람들을 곧잘 웃겼다. 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고 그 의도를 잘 파악했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었다. 또 자기가 옳다는 확신을 가지고 싸울 때는 자신의 모든 것, 곧 생명까지도 걸고 투쟁했다. 그는 전통적인 결혼제도를 반대하여 계약결혼을 했으며, 두 사람만의 자유를 위해 자녀를 갖지 않았다. 사유재산제도를 반대하여 호텔에서 잠을 자고, 카페에서 일했으며,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다'는 신조 때문에 그는 1946년에 집을 사서 1962년까지 사는 동안 커다란 심리적 고통을 느꼈다고 한다.

오른쪽 눈의 시력은 이미 3세 때 상실했으나 1975년에 왼쪽 눈마저 시력이 떨어져 독서는 물론 집필도 못하게 되었다. 1980년 4월 15일, 5년 전부터 앓아온 폐기종으로 사망했을 때, 그의 나이는 75세였다.

철학 속으로

사르트르에 따르면 옛날부터 철학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해오던 존재란 사실 신적인 것도, 지고(至高, 가장 높은)의 초월자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창조되지도 않고 존재 이유도 없는 그것은 무의미한 것, 다시 말해 구토를 일으키는 것일 뿐이다.

인간 역시 우연하게 이 세상에 던져졌을 뿐이다. 그는 어떠한 사명이나 의의를 갖지 못한 채 태어났기 때문에 그만큼 자유롭기도 하다. 인간은 좋건 싫건, 항상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인간이란 자유가 선고된 존재, 선택이 강요된 존재다.

따라서 자신의 선택으로 스스로를 만들어나가는 실존(인간)은 자기의 존재 방식에 책임을 져야 한다. 나의 행위는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즉시 영향을 미치므로 나의 선택은 인류의 전체 이상과 합치해야 하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극단적 자유의 개념을 제시했다는 점, 급진적인 허무주의자이자 무신론자라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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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률 집필자 소개

전남 영광 출생. 전남대학교 철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전북대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광주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교내에서 윤리교육과 학과장, 학생생활연구..펼쳐보기

출처

위대한 철학자들은 철학적으로 살았을까
위대한 철학자들은 철학적으로 살았을까 | 저자강성률 | cp명평단문화사 전체항목 도서 소개

세상을 바꾼 철학자 30인의 알려지지 않은 철학 이야기를 통해 세계철학사의 흐름을 읽다. 철학자의 사상보다는 삶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그들의 삶 역시 평범한 인간과 다..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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