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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7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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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31년 |
국적 | 독일 |
대표작 | 《정신현상학》 |
독일 고전 철학의 가장 큰 대표 철학자. 칸트철학을 계승한 독일관념론의 완성자. 신학만을 공부하겠다는 서약을 하고 장학생으로 튀빙겐 대학에 입학했으나 대학에서 이렇다 할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받았고 철학자의 길을 가기 위해 선배 철학자들처럼 가정교사를 했으며, 박봉에 시달려 문교 장관인 괴테에게 보조금을 신청하기도 했다. 하숙집 부인과 불륜에 빠져 아들을 하나 두었고, 그 때문에 그렇게 염원하던 철학 교수직이 박탈된 때도 있었다. 쇼펜하우어와 슐라이어마허와는 견원지간이었다. '나를 이해한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모든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발전하는데, 이는 정·반·합의 변증법적 전개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헤겔, 사랑에 빠지다
헤겔은 1770년(베토벤과 횔덜린이 태어난 해이기도 함)에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수세국 재무관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온유하고 재능 있는 숙녀로서, 아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칠 정도였다. 그러나 헤겔은 13세 때 그처럼 훌륭했던 어머니를 잃어야 했다.
라틴어 학교를 거쳐 김나지움각주1) 에 진학한 헤겔은 그곳에서 레플러 선생을 만났다. 레플러 선생은 헤겔에게 신약성경, 그리스 고전, 셰익스피어 희곡 등을 감명 깊게 가르쳤으며, 또 그의 재능을 인정해주었다. 그뿐만 아니라 셰익스피어 작품집을 선물로 사주기까지 했다. 그런 레플러 선생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헤겔은 일기에 이렇게 써놓았다.
"선생님은 매우 성실하고 공평하셨다. 학생들을 위해서 몸을 바치는 일이 유일한 염원이셨다. 선생님은 몇 번이나 내 곁에 와 앉으셨고, 나도 여러 번 선생님 곁에 가서 앉았다. 이제 선생님은 가시고 없다. 하지만 나는 선생님에 대한 추억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리라."
고향에서 김나지움을 졸업한 헤겔은 그 해 가을에 '온 힘을 다해 신학만 전공할 것이며, 신학과 관계없는 직업에는 나가지 않을 것'을 굳게 서약하고 신학교인 튀빙겐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그러나 이 서약은 철학의 매력에 이끌림으로써 결국 지켜지지 못했다.
헤겔은 그곳에서 동갑내기 횔덜린각주2) 과 5세 아래의 조숙한 천재 소년 셸링각주3) 과 친해졌다. 셸링은 일찍부터 현저하게 두각을 나타냈으며, 선배인 헤겔을 이끌어 나갈 정도였다. 반면 헤겔은 이곳에서 별다른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성적도 철학 과목을 제외하고는 평균점 이하였다. 어쨌거나 학창 시절 헤겔은 이 친구들과 문학 논쟁을 벌이기도 하고, 자유를 표방하는 학생 동맹을 결성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청년기 때 헤겔은 여성들과 친밀한 교제를 자주 갖는 친구들에 대해 "쓸데없이 여자들과 산책이나 하면서 시간을 허비한다"며 나무랐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음악 연주회에 다녀와서는 "아름다운 여자를 바라보는 것은 상당한 즐거움이다"라고 일기에 썼다. 이때 헤겔은 신학과 교수의 딸과 연애 중이었는데, 이 경험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이성 친구와 함께 좁은 길을 거닐 적엔 참으로 즐거웠도다. 사랑하는 여인의 뜨거운 키스를 받았을 적엔 그 세 곱절이나 즐거웠도다."
프랑스혁명을 자축하다
헤겔이 현실에 눈을 뜨게 된 계기는 프랑스혁명이었다. 유럽의 학생들은 그 영향으로 자유와 혁명을 찬양했다. 평소 학우들 사이에서 '노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헤겔이었으나, 그 역시 다른 학생들과 더불어 혁명에 대한 정열을 불태웠다.
어느 봄날 일요일이었다. 정치 클럽의 회원들은 혁명을 일으킨 프랑스 시민을 본받아 튀빙겐 외곽 들판에 모여서 '자유의 나무'를 심어 놓고는 '자유 만세! 루소 만세!'를 외쳤다. 프랑스의 국가 '라 마르세예즈'도 불렀다. 이 군중 속에 헤겔이 끼여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가 매년 프랑스혁명 기념일마다 자축하며 포도주를 마셨다는 일화는 프랑스혁명이 그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튀빙겐 대학의 신학과를 졸업한 그는 목사가 되기를 거부하고, 철학자가 되기 위해 칸트와 피히테 등의 선배들을 본떠서 가정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첫 가정교사 자리는 횔덜린의 소개로 얻었다. 그리고 이미 교수가 된 셸링의 추천으로 철학자들의 메카(어떤 분야의 중심이 되어 사람들의 동경·숭배의 대상이 되는 곳)로 통했던 예나 대학에 시간강사로 초빙되어 갔다. 그러나 워낙 박봉인지라 그는 정기적으로 바이마르의 문교 장관인 괴테에게 보조금 청원서를 내야만 했다.
《정신현상학》을 탈고하다
1806년 헤겔은 예나에서 프랑스 혁명군이 진입하는 것을 보았다. 2층 숙소에서 군대가 예나의 성벽 안에 도착한 날의 광경을 목격한 헤겔은 대학 동창 니트함머에게 편지를 보냈다.
"나는 정찰을 하기 위해 말을 타고 시내를 가로지르고 있는 세계정신(나폴레옹)을 보았네."
헤겔은 나폴레옹이 자유와 민족주의를 전파하는 것으로 보고 처음에는 매우 높이 평가했다. 같은 시대에 살던 베토벤이 나폴레옹을 위해 영웅 교향곡 〈에로이카〉를 작곡한 것과 똑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그 세계정신은 헤겔에게 관대하지 않았다. 그의 집은 약탈당했고, 전쟁의 혼란으로 인해 봉급마저 지급이 중단되었다. 병사들의 약탈이 시작되자 그는 한 병사의 가슴에 달려 있는 훈장을 가리키며 "이렇게 명예로운 훈장을 달고 있는 군인이 그런 짓을 할 수 있는가?"라고 타이르며 포도주 한 병으로 피해를 면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오래 배겨낼 수가 없어 다른 곳으로 피신했다.
이 와중에 헤겔은 자신의 저작 중 알파요 오메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정신현상학》 마지막 부분을 탈고했다. 출판사의 빗발치는 독촉과 전쟁터의 대포 소리를 들으면서 서둘러 원고를 마무리했기 때문에, 마지막 몇 페이지는 충분하게 쓰지 못했다는 말이 전한다.
교수직을 빼앗아간 불륜 사건
37세에는 하숙집 부인과 불륜 관계에 빠져 루트비히라는 아들을 낳았다. 그 부인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고, 남편은 그 무렵 멀리 떠나 있었다. 헤겔의 불륜 관계는 곧 알려졌고, 이 일은 교수 신분으로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대학에 머물 수가 없었다. 직장을 잃고 아버지의 유산마저 바닥을 내버린 헤겔은 곤궁에 빠졌다. 그는 이미 완성해놓은 《정신현상학》에 대한 원고료 문제로 출판사와 심한 말다툼을 벌일 정도로 가난한 상태였다. 다행히 얼마 후 니트함머의 주선으로 밤베르크에서 발행되는 작은 신문의 편집인이 되었다. 그러나 신문이 까다로운 검열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비위가 상한 그는 곧 그만두고 말았다. 그러자 그의 친구가 이번에는 헤겔을 뉘른베르크 고등학교 교장 자리로 옮겨주었다.
1811년 헤겔은 이 도시에 있는 명문 집안의 딸과 결혼하여 자녀 셋을 낳았다. 첫딸은 태어난 지 몇 주 만에 죽었다. 그러나 두 아들은 정상적으로 성장하여 장남은 역사학자가 되었고, 차남은 개신교의 종교 국장을 지냈다. 결혼 전에 낳았던 사생아 루트비히는 고아원에서 지내다가 헤겔의 집에 들어와 함께 살았는데, 이복동생들과 자주 싸우다가 얼마 후 집을 나가버렸다. 나중에 루트비히는 네덜란드의 외인부대에 입대하여 결국 인도네시아에서 전사했다.
헤겔은 결혼 생활을 상당히 만족스러워 했는데, 니트함머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세속적인 목적을 완전히 이룬 셈이 되었네.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직장과 사랑하는 아내를 얻었다는 것으로, 이 세상에서 할 일을 다한 것이기 때문일세. 직업을 갖고, 사랑하는 아내를 얻는 것은 각 개인이 추구해야 할 가장 으뜸가는 행복이 아닌가? 그것 외의 것은 본질적인 주제가 아니네. 작은 항목이거나 주석일 뿐이지."
철학자는 독신이어야 한다는 통념이 헤겔에게는 타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슐라이어마허와 미끄럼틀을 타다
헤겔은 무엇보다 대학교수가 되고 싶어했다. 그 꿈은 마침내 46세 때에 이루어지는데, 먼저 그는 호반(호수가)의 고성(옛 성)에 자리 잡은 하이델베르크 대학 철학과의 정교수가 되었다. 헤겔이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머문 것은 겨우 2년 동안이었고, 첫해의 한 강의에서는 수강생이 4명밖에 안 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다음 해에는 수강생이 70명이 넘는 데다가 헤겔을 숭배한 귀족도 생겨나고 하여 그의 명성은 점점 높아져만 갔다.
그 후 헤겔은 52세로 세상을 떠난 피히테각주4) 의 후임으로 베를린 대학의 교수로 취임했다. 처음에는 베를린에 '지겹도록' 술집이 많다는 점과 꽤 비싼 생계비와 방세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마음이 편안해졌다. 헤겔은 베를린의 사교계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마찬가지로 부인들의 사교계 역시 이 훌륭하고 재기 넘치는 교수를 좋아하게 되어 사랑으로 감싸고 돌보았다.
그렇다고 하여 헤겔이 항상 그렇게 사랑스러웠던 것만은 아니다. 어떤 전기 작가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가 누군가를 미워하기로 일단 마음을 먹으면 철저하게 실행에 옮겼다. 그의 질책 또한 대단히 매서웠다. 그에게 당하는 사람은 사지를 바들바들 떨 정도였다."
그렇다면 과연 그와 불화를 빚은 사람은 누굴까? 먼저 고집 센 쇼펜하우어와 슐라이어마허를 들 수 있다. 헤겔은 다른 동료들과 함께하는 술자리에서는 슐라이어마허와 간단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지만, 그다지 좋은 사이는 아니었다. 사람들은 '이들 두 사람이 어떤 논문에 대해 토론하다가 서로 칼을 빼들고 싸웠다'는 이야기까지 하고 다녔다. 두 사람은 이 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해 사이좋게 함께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고 전한다.
쇼펜하우어, 헤겔에게 앙심을 품다
"칸트 이전의 모든 사상은 칸트로 흘러 들어와 독일관념론이라는 호수에 고여 있다가, 헤겔을 통해 흘러나가 이후 모든 사상의 원천이 되었다."
이 말은 헤겔 철학이 서양철학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단적으로 표현한다. 그런가 하면 이와 반대로 헤겔을 비판하는 쇼펜하우어의 글도 있다.
"천박하고 우둔하고 역겹고 매스껍고 무식한 사기꾼인 헤겔은 뻔뻔스럽고도 어리석은 소리들을 잔뜩 늘어놓았다. 이것을 그의 상업적인 추종자들은 불멸의 진리인 양 나팔을 불어댔으며 바보들은 그것을 진실인 줄로 알아 환호하며 받아들였다."
또 쇼펜하우어는 "모순투성이의 서생(書生, 글만 읽어 세상일에 서투른 선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 30년이란 긴 세월 동안 독일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간주되어 왔지만, 후세에는 헤겔에 대한 진실이 폭로되고야 말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하지만 그의 예언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헤겔에 관한 책들이 쏟아져 나왔고, 전 세계에 헤겔학회가 결성되었으며, 온갖 부류의 헤겔 학도가 생겨났으니 말이다. 나아가 헤겔은 그의 제자인 마르크스를 통해 현재 몇몇 나라의 체제 수립에까지 관여했다. 그의 사상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쇼펜하우어의 도가 지나친 분노의 글은 헤겔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 사이에 이러한 견원 관계가 시작된 원인은 쇼펜하우어를 강사로 채용하는 시험의 심사위원장이었던 헤겔이 그를 떨어뜨린 데에 있었다. 이 일은 물론 헤겔의 개인감정에 따른 결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낙방의 원인이 헤겔에게 있다고 간주한 쇼펜하우어는 대학교수로서 헤겔과 경쟁하려 하지만, 참패를 당하고 만다.
자신의 철학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후세에는 반드시 내 기념비가 건립될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하던 신출내기 시간 강사 쇼펜하우어는, 자기의 강의 시간을 헤겔의 강의와 같은 시간대로 옮겨 개설한 것이다. 그런데 예상과는 반대로 헤겔의 강의실에는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학생들이 몰려들었으나, 그의 강의실에는 겨우 서너 명밖에 없었다. 비통한 심정으로 한 학기를 마친 후 쇼펜하우어는 강의를 중단해야 했다. 왜냐하면 이번에도 그의 청중이란 텅 빈 의자들뿐이었기 때문이다.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쇼펜하우어는 그 후로 10여 년 동안 유럽 여행으로 시간을 보냈고, 결국 교수직은 그에게서 멀어져 갔다.
어쨌거나 학생들이 헤겔에게로 몰려들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헤겔의 강의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고, 그는 학생들이 감동할 만큼 뛰어난 달변가도 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의 강의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어떤 힘이 있었다. 강의에 충실했던 한 학생은 스승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운 없이 몸을 움츠리고 앉아서, 커다란 노트를 앞뒤로 넘기고 위아래로 훑으면서 그는 무엇인가를 찾았다. 끊임없는 헛기침과 잔기침은 말의 흐름을 계속 방해했다. 금속성을 띤 억센 사투리는 기괴하고 이상한 중량감을 주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깊은 존경심을 불러일으켰고, 그에게 경외감을 품도록 만들었다. 도저히 해석해낼 수 없어 보이는 것들의 밑바탕을 저 위압적인 정신이 훌륭하게 파헤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목소리는 차츰 커지고 눈은 청중들 너머로 날카롭게 번득이며, 뿌리 깊은 확신의 섬광이 소리 없이 타오르며 빛을 내뿜었다."
나를 이해한 사람은 누구인가
헤겔은 자신의 심오한 철학 덕분에 대학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의 강의실은 발 들여놓을 틈이 없이 청중들로 꽉 들어찼는데, 학생들뿐만 아니라 육군 소령·대령, 추밀고문관[樞密顧問官, 군정(軍政)에 관한 주요한 기밀을 관장하는 관리]까지 왔다. 그의 철학은 프로이센각주5) 국가의 정신적인 형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마침내 헤겔은 '프로이센의 국가 철학자'로 공인되어 독일철학의 태두로 군림했다. 그의 제자들도 여러 대학의 교수직에 임명됨으로써 헤겔학파는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1829년에는 베를린 대학의 총장에 취임하여 약 1년 동안 재임하기도 했다.
헤겔은 서자 루트비히가 죽은 해인 1831년, 베를린 전 지역에 맹위를 떨치던 급성 콜레라로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숨을 거두려고 할 무렵에 그는 "나의 학생 중에서 나를 이해한 사람은 단 한 명이다"고 말했다. 그러나 잠시 사이를 두고 진정 마지막 말로, "아니! 이 한 사람도 나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어"라고 덧붙였다.
헤겔은 그의 희망대로 지금 베를린에 있는 피히테의 묘 옆에 잠들어 있다.
철학 속으로
헤겔이 보았을 때, 칸트철학은 주관적인 관념론에 지나지 않았다. 가령 시간·공간은 우리 인간의 직관 형식이고, 인식 역시 우리의 감성에 의해 받아들여진 재료에 우리 자신 속에서 우러나오는 오성이 자발적으로 작동함으로써 성립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사물 자체(물자체)는 인간이 알 수 없는, 신비한 어떤 것으로 치부되고 말았다.
그러나 헤겔은 칸트가 제쳐놓은 대상(사물)들을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여기서부터 객관적 관념론을 향한 길이 트인다. 종국적으로 헤겔은 피히테의 주관적 관념론과 셸링의 객관적 관념론을 종합하여 절대적 관념론을 완성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의 사고가 세계정신 자체의 사고다. 이 세계정신은 사물들을 생각함으로써 사물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이 세계정신 안에서 사고와 존재와 진리는 일치한다.
헤겔에게 세계의 역사는 세계정신의 자기 전개 과정에 불과하다. 세계정신의 목적은 자유 의식의 진보이며,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세계정신은 개인을 도구로 사용한다. 각 개인들은 자신의 개인적 목적을 위해 행동하며 권력을 확장해간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세계정신에 의해 이용되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교활한 절대 이성의 장난[이성(理性)의 교지(狡智). 이성의 교활한 지혜, 심하게 말하면 사기놀음]에 의하여, 개인은 자신의 모든 정열을 바쳐 그것이 추구하는 역사의 필연 과정에 들러리를 서준다. 그 때문에 자기의 역할이 끝나자마자 역사의 무대에서 홀연히 사라지고, 세계정신은 새로운 전진을 계속해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개인이나 민족은 세계사적 이성에 합치되는 방향으로 움직일 뿐이므로, 적어도 어떤 시점에서의 역사적 사건은 바로 그 순간을 지배하는 필연 자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헤겔은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요,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헤겔철학은 매우 혁명적이었다. 그러나 관념론적 색채로 인해 그 실현에 많은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또한 프랑스혁명을 환영하는가 하면 당시의 프로이센 군주제를 옹호하는 등 정치적으로도 이중적인 태도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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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철학자 30인의 알려지지 않은 철학 이야기를 통해 세계철학사의 흐름을 읽다. 철학자의 사상보다는 삶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그들의 삶 역시 평범한 인간과 다..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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