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생 | 1501년 |
---|---|
사망 | 1570년 |
국적 | 한국 |
조선 명종과 선조 때의 유학자이자 명신. 중국 정주학에 기초한 자신의 독창적인 철학 체계를 세움으로써 조선의 통치 이념을 완성했다. 정치보다는 학자 지향형 인물로 한국의 성리학 발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환갑을 바라보는 노학자가 30대에 불과한 젊은 학자 기대승과 8년 동안 편지로 '사단칠정 논쟁'을 한 일화가 유명하다. 말년에는 임명을 받고도 관직에 오르지 않는 등 임명과 사퇴를 반복하고, 50회의 사직서를 제출했다. 사액 서원의 효시가 되었고, 도산서당을 세우고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도산서당은 그가 죽은 후 도산서원이 되었다.
가난한 선비 집안
이황의 증조부 이정은 선산 부사를 지냈고 할아버지 이양과 아버지 이식은 진사를 지냈다. 이로 보아 고관대작을 지낸 명문은 아니지만 그의 가문 역시 양반 집안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아버지는 3남 1녀를 남긴 채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재혼하여 4형제를 얻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퇴계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40세의 나이로 죽고 말았다. 32세였던 퇴계의 어머니는 농사와 길쌈 등으로 7남 1녀의 대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어머니는 혼자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가면서도 자식들의 교육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항상 이렇게 타일렀다.
"글을 외고 짓는 것에만 힘쓸 것이 아니라, 특히 몸가짐과 행동을 성실하게 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과부의 자식들에 대해 가정교육이 부족하여 버릇이 없다고 욕을 하는 법이니, 너희들은 남보다 백 배 이상 노력해서 예의바르게 행동해야 한다."
퇴계는 6세 때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는데,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를 하고 머리를 단정하게 빗고 나서 문 밖에 선 채 전날 배운 것을 외워본 다음 들어가 공부했다. 12세 때에는 숙부인 이우에게 《논어》를 배웠다. 이우는 권근, 이첨, 하윤 등과 함께 《동국사략》(단군 때부터 고려 말기까지의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한 역사서)을 편찬한 사람으로, 병이 들었을지라도 책을 손에서 놓는 일이 없었다. 그는 문장과 시에 능했고, 조카들을 친자식처럼 돌봐주었다. 이 무렵 퇴계는 많은 사람이 주변에서 소란을 피울지라도 벽을 바라보고 앉아 책을 읽거나 사색에 잠겼다.
퇴계의 집에는 많은 장서가 있었는데, 아버지의 첫째 부인의 어머니에게서 받은 것이다. 그녀는 남편이 죽자 사위에게 그 책들을 주며 말했다.
"모름지기 서책이란 글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사사로이 가지고 있을 것이 아니요, 글을 좋아하는 선비의 집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이에 퇴계의 아버지는 살아생전에 자식들을 훈계하며 당부했다.
"나는 밥 먹을 때에도 책이요, 잠잘 때에도 책이요, 앉으면 같이 앉고 가면 같이 가서 어느 때나 책을 품에서 뗀 적이 없다. 너희들도 이와 같이 하여라! 부질없이 허송 세월을 보낸다면 어찌 너희들의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겠느냐?"
도학군자의 첫날밤
19세에는 《성리대전각주1) 》의 일부를 읽었으며, 이듬해에는 《주역》을 읽었다. 이때 잠자고 밥 먹는 일조차 잊어가며 독서와 사색에 매진하는 등 너무 무리한 탓에 소화불량증을 얻어 오랫동안 고생을 해야 했다. 특히 고기만 먹으면 체하여 채식을 즐겼다고 한다.
퇴계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독서에 열중했다. 그가 학문에 몰두할 적에는 천둥이 치는지 벼락이 치는지, 마당에 널어놓은 나락(벼)이 떠내려가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하루 종일 꼿꼿이 앉아 책을 읽었고, 머리가 아프면 꽃들을 바라보면서 시를 지었으며, 의문점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오랫동안 사색에 잠기기도 했다. 그가 어릴 적부터 이런 나날을 보냈기 때문에 혹자는 그를 파리한 샌님이나 혹은 아주 근엄한 스승쯤으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단조로운 생활을 하지도, 또 본능을 지나치게 억제하지도 않았다.
그와 관련한 이야기가 하나 전하는데, 그는 20세 때 장가를 들었다. 이때 이미 그는 상당히 높은 학식을 지닌 청년으로 소문이 나 있던 까닭에 장모는 딸의 첫날밤이 여간 염려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도학군자에게 딸을 시집보냈으니 아내를 거들떠보지도 않을까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튿날 신방에서 나오는 딸을 붙들고 은근히 물어보았다.
"신랑이 귀여워해주더냐?"
"말도 마이소. 개입디더!"
물론 이 이야기는 민간에서 우스개로 전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도학자인 채 본능을 억제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해준다.
벼슬과 학문 사이에서
23세 때 서울로 올라와 태학(太學,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때는 기묘사화각주2) 의 피 바람 속에 조광조가 사형을 당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로, 유생들은 사기가 떨어져 도학을 기피하고 문학만 숭상하는 풍조가 유행했다. 그러다 보니 퇴계의 도학 공부는 유생들의 비웃음을 샀다. 그러나 퇴계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24세에 과거에 응시하는데, 세 차례나 연거푸 낙방했다. 그러나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여 3년 후에는 진사시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생원시에는 차석으로 합격했다. 그러나 그 해에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2년 후인 1530년, 30세에 재혼했다.
4년 후에는 대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종9품)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의 관리 생활은 순탄하지 못했다. 세도가 김안로각주3) 가 같은 고향 사람(김안로의 땅이 퇴계의 전 아내 허씨의 고향인 영천군에 있었다 하여 동향인이라 했음)이라 하여 퇴계를 불렀으나 찾아가지 않은 탓에 김안로의 미움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퇴계는 이와 상관없이 여러 관직으로 승진되어 발령받았으나 건강을 이유로 사양했다. 그는 일찍부터 학문 연구에만 뜻을 두었다. 그러나 집이 워낙 가난한 데다 어머니와 형의 권고도 있고 하여 과거에 응시했던 것인데, 이 점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그는 간혹 속세를 떠나서 독서를 즐기며 성현의 도(道)를 찾고 싶은 심정을 토로하곤 했다.
45세 되던 해에 둘째 부인 권씨마저 잃고, 그 다음해 1546년에는 마을 동쪽에 양진암(養眞菴)을 지어 그곳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이때 스스로 호를 '퇴계'라 했다. 조정에서 여러 관직을 내렸으나 대부분 사양하고, 대신에 단양 군수 자리를 희망했다. 그러나 단양군이 감사가 된 그의 형의 관할 아래로 들어갔기 때문에 부임한 지 9개월 만에 풍기 군수로 다시 발령받았다. 이때 백운동서원에 사액(임금이 사당, 서원 등에 이름을 지어주는 일)해줄 것을 청해 허락받았는데, 이것이 사액 서원(書院, 조선 중기 이후 유명한 학자를 제사지내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세운 일종의 사설 교육기관)의 효시가 되었다. 1548년에는 퇴계의 서쪽 양지바른 곳에 한서암(寒栖菴)이라는 집을 짓고, 그곳에서 조용한 은둔 생활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독서와 사색으로 나날을 보냈다. 49세 때는 병을 이유로 경상도 감사에게 사직원을 냈다. 3개월 동안 세 번이나 올렸어도 회답이 없자 행장을 꾸려 가지고 귀향했다. 다음 해에는 허락 없이 직책을 버렸다 하여 2계급 강등 처분까지 받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벼슬살이를 하는 것보다 오히려 학술에 몰두하는 편이 더 좋았던 것이다. 개인적인 정서가 그것을 선호하기도 했지만, '사화(士禍)'라는 유혈 사태가 계속되었던 당시의 환경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노대가, 젊은 학자 기대승과 논쟁을 하다
학문이 깊고 덕행이 높은 퇴계에게 제자들이 몰려들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그러나 아무리 제자가 많아도 싫어하거나 물리치지 않았다. 또 제자 대하기를 마치 벗을 대하는 것처럼 했다. 어린 제자라 할지라도 함부로 이름을 부른다거나 하대를 하지 않았고, 보내고 맞을 때에는 항상 공손히 대했다. 그리고 언제나 제자들의 아버지나 형제의 안부를 물었다. 제자들이 먼 길을 떠날 때에는 술을 대접하여 보내기도 했다. 퇴계 역시 젊어서 술을 많이 마셨으나 한 번 과음하여 말에서 떨어진 뒤로는 두 잔 이상 마시지 않았다. 문인들에게도 그의 벗인 정지운각주4) 과 김인후각주5) 가 술로 건강을 해쳐 일찍 죽었다고 한탄하며, 과음하지 않도록 타일렀다.
1559년, 드디어 고봉 기대승각주6) 과 '사단칠정 논쟁(四端七情論爭)'이 시작되었다. 이는 8년 동안에 걸쳐 전개된 것으로, 당시의 정체된 학문 풍토에 참신한 기풍을 일으켜 우리나라 성리학의 독특한 발전을 가져오게 했다. 사단칠정 논쟁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논쟁으로, 이황은 사단(四端)각주7) 이란 '사물의 이(理)에 해당하는 마음의 본연지성(本然之性)에서 발현되는 것'이고, 칠정(七情)각주8) 이란 '사물의 기(氣)에 해당하는 마음의 기질지성(氣質之性)에서 발현되는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기대승이 "사단 역시 기에 의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여 두 사람 사이에 8년간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퇴계는 성균관의 으뜸 벼슬인 정3품의 당상관직 대사성까지 지낸 59세의 노대가였고, 고봉은 겨우 과거에 급제한 33세의 소장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퇴계는 고봉의 이론을 신중히 검토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발견할 때마다 고쳐나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1560년 도산서당을 세우고 후학 지도에 열중했다. 그리고 1568년 임금에게 '성학십도'를 지어 올렸다. '성학십도'는 퇴계 이황이 성리학의 핵심 내용을 간략히 설명한 10개의 도표로 17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선조에게 군왕으로서 알아야 할 학문의 요체를 그림으로 정리하여 올린 것이다. 퇴계가 일생을 두고 최대의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으로, 선조는 이것을 10폭의 병풍으로 만들어두고 보았다 한다.
퇴계의 말년 관직 생활은 '문서상의 임명과 사퇴'가 계속되었다. 52세부터 70세까지 18년 동안 50회의 사직서를 제출했고, 특히 정3품 이상의 벼슬은 실제로 받아들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는 학자의 최고 영예인 양관대제학각주9) 을 제수받았으나 그의 나이 이미 70세였으므로 낙향하기로 결심했다. 선조의 간절한 권유를 뿌리치고 귀향하는데 수백 명의 후배와 제자가 몰려나와 눈물로 이별했다. 그의 움직임 하나, 말 한마디가 제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절주(節酒)와 투호
퇴계는 평생에 걸쳐 두 가지를 실천했다. 하나는 자신의 건강을 위해 매일 아침 측간에서 이를 마주쳤다. 측간에 앉아 아래, 윗니를 힘껏 부딪쳐서 턱에 힘주기를 적어도 50번 이상씩 반복했다. 이 운동은 이를 튼튼하게 해주는 것은 물론 아래의 항문을 포함하여 전신운동이 된다고 한다. 또 하나는 투호(일정한 거리에 놓아둔 항아리에 화살을 던져 집어넣는 놀이)를 했는데, 자신은 물론 제자들에게도 열심히 하도록 권했다. 퇴계는 이 놀이를 통해서 두 가지 효과를 거두었다. 첫째, 투호는 온몸의 균형을 잡고 거리를 정확히 측정해야만 그 적중률이 높다. 몸이 흐트러지면 결코 잘 맞힐 수가 없다. 둘째, 투호는 정신력을 집중해야 한다. 무슨 일이든지 정신력의 집중이 중요하겠지만, 투호야말로 잡념이 생겨 정신이 산란해지면 결코 명중시킬 수가 없다.
이러한 까닭에 퇴계는 첫째는 몸의 건강을 위해, 둘째는 정신 집중을 위해 투호를 생활 속에 도입했던 것이다. 퇴계는 글을 배우러 오는 사람에게 먼저 투호를 해보도록 시켰다. 그 솜씨를 보고 건강을 짐작해보는 한편, 또 학문을 할 수 있는 덕이나 집중력을 가늠해보았던 것이다.
1570년 11월 9일, 퇴계는 종갓집 제사에 참석했다가 감기에 걸린 것이 악화되어 자리에 누웠다. 12월 3일에는 제자를 시켜 남에게 빌려온 책을 돌려보내고, 4일에는 형의 아들 영에게 유서를 받아쓰게 했다. 나라에서 하사하는 예장[왕실의 종친·공신(功臣)·종1품 이상의 문·무신이 죽었을 때 나라에서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준 일. 참찬·판서 등의 벼슬을 지낸 이도 대상이 될 수 있었고, 왕의 특별한 명령에 따라 예장을 받을 수도 있었다]은 사양할 것이며, 비석도 세우지 말고 자그마한 돌에 그저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쓰도록 했다. 일설에는 그가 명정(銘旌, 죽은 사람의 관직과 성명을 적어 영전 앞에 세워놓는 깃발)에 '처사이공지구(處士李公之柩)'라고만 쓰라고 했다고 한다. 그가 깨끗한 몸을 남기고자 하는 뜻이 여기에 담겨 있는데, 뒷날 지리산 밑에 사는 남명 조식이 이 말을 듣고 "할 벼슬을 다하고 나서 처사라니……. 진짜 처사는 나지"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물론 이 말도 새겨볼 만하긴 하다. 그렇다고 하여 퇴계의 일생과 그가 추구한 참뜻이 손상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5일에는 관을 짜라 명하고, 8일 아침에 평소 아끼던 매화 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저녁 5시경에 부축을 받아 일어나 앉은 채로 숨을 거두었다.
철학 속으로
퇴계의 주리론(主理論)에 따르면 이(理)야말로 천지 만물을 생성하고, 주재하는 본원이다.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라고 하는 그의 주장에 의해 촉발된 것이 그 유명한 '사단칠정 논쟁'이다. "사단 역시 기에 의해 발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기대승과의 논쟁을 통해, 그는 "사단은 이(理)가 발하여 기(氣)가 그것을 탄 것이요, 칠정은 기(氣)가 발하여 이(理)가 그것을 탄 것이다"로 입장을 정리한다. 이 논쟁으로 말미암아 이황의 사상은 상당한 체계를 갖추게 되고, 나아가 조선의 성리학 자체가 한 차원 높아졌다고 평가받았다.
그의 이(理)일원론은 사회·윤리관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예컨대 "군주와 신하가 있기 이전에 이미 군신의 이치가 있었다"는 식으로, 봉건적 윤리 규범을 거부할 수 없는 하늘의 법칙, 즉 천리(天理)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당시 봉건적인 중앙집권제에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 것이라 하겠다. 어떻든 한국을 대표하기에 충분한 그의 사상은 오늘날 동양은 물론이고, 전 세계에 걸쳐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글
출처
세상을 바꾼 철학자 30인의 알려지지 않은 철학 이야기를 통해 세계철학사의 흐름을 읽다. 철학자의 사상보다는 삶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그들의 삶 역시 평범한 인간과 다..펼쳐보기
철학가
추천항목백과사전 본문 인쇄하기 레이어
[Daum백과] 이황 – 위대한 철학자들은 철학적으로 살았을까, 강성률, 평단문화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