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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다른 표기 언어 동의어 불법을 넓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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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602년
사망 664년
국적 중국
대표작 《대당서역기》

삼장법사로 널리 알려진 중국 당나라 때의 승려, 불교학자, 여행가. 본명은 진위(陣褘)다. 불교 경전의 원전을 연구하기 위해 육지로 서역을 거쳐 인도에 갔다. 중인도 날란다 사에 이르러 계현 법사에게서 배우고 여러 명사들을 방문했으며, 불교 유적지를 참배했다. 17여 년 동안 두루 다니다가 브라만어 경전을 가지고 중국 장안에 들어와 경론[불교의 삼장(三藏), 세 가지 불교서적 경장, 율장, 논장 가운데 경장과 논장을 이르는 말] 75부를 번역해내니, 모두 1,335권이었다. 저서에는 인도, 네팔,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지의 고대 역사와 지리, 고고학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는 여행견문기 《대당서역기》가 있다. 명나라 때 오승은이 쓴 《서유기》에서 현장은 삼장법사로 등장한다.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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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기》의 삼장법사

인도에서 중국으로 들어온 불교 사상은 위진 시대를 거쳐 수나라, 당나라에 이르러 그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에 따라 여러 종파가 생겨났는데, 가장 유력했던 종파는 법상종, 화엄종, 천태종 등 불학의 정통 교파다. 현장은 바로 법상종각주1) 의 창시자로서 일반인들에게도 《서유기》를 통해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물론 《서유기》는 기담 소설이지만, 적어도 현장이 불경을 구하기 위해 여행했다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이제 소설 속의 현장이 아니라, 학술 사상 속의 진정한 현장을 만나보자.

현장은 지금의 허난성 뤄양 사람으로 수나라 초대 황제 때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국학 박사를 지냈고, 아버지는 후베이성 장링 현장을 지내다가 수나라가 망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은거했다.

현장은 어려서부터 독서와 사색을 즐겨 아이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13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죽었고, 그 후 둘째 형 장첩 법사를 따라 뤄양의 정토사로 옮겨 살았다. 이때부터 그는 불교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고, 몇 년 후 사미승[막 출가하여 십계(十戒)를 받기는 했으나, 아직 수행을 쌓지 않은 소년 승려]이 되어 불법을 넓히는 데 힘을 쏟았다. 그러나 지식욕이 왕성한 현장은 어느 한 종파와 교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각지로 다니며 견문을 넓히고자 했다. 중국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는 동안 수많은 고승(高僧)을 만났고, 유명한 절도 찾았으며, 여러 종파의 경전도 많이 읽었다. 그의 시야도 자연 넓어지고 불교에 대한 조예도 깊어져 명망이 점점 높아졌다. 이 무렵 누군가가 그를 큰 절인 장안사의 주지로 천거했으나 즉시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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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고 인도로 향하다

현장은 몇 년을 두루 다니면서 불교 경전이 많이 부족하고 사상적 계통 역시 제대로 서 있지 않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더구나 경전을 번역하는 일도 체계가 없음을 깨달았다. 번역자들이 직접 인도에 간 적도 없을 뿐 아니라, 범문[梵文, 고대 인도에서 쓴 문자 중 하나인 범자(梵字)로 기록된 글을 말하며, 보통 불경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을 잘 몰랐기 때문에 불법의 해석이 여러 갈래였다. 그 때문에 현장은 이렇게 생각했다.

'혹시 우리는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식으로 어느 일부분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방법은 오직 하나, 직접 인도에 가서 알아보는 수밖에 없다.'

당시 인도를 여행한다는 것은 하늘에 오르는 것만큼이나 힘들고 어려웠다. 오직 자기의 두 발로 맹수가 우글거리는 고산준령(高山峻嶺)을 넘어야 하고, 불볕이 내리쬐는 드넓은 사막을 건너야 했다.

'그러나 내가 지옥에 들어가지 않으면 누가 들어갈 것인가? 하물며 법현각주2) 도 인도에 다녀왔거늘. 나는 목숨을 걸고 인도에 가서 불법을 배워 중토의 백성을 깨우치겠노라.'

현장은 굳게 결심하고 곧 인도에 갈 준비를 했다. 그러나 당나라가 갓 건국되어 불안정한 때인지라, 나라에서는 백성들이 국경을 못 넘도록 통제했다. 여러 방법을 모색하던 그에게 마침내 기회가 왔다. 629년(당태종 3) 여러 차례의 큰 서리로 농작물에 엄청난 피해가 오자, 나라에서는 백성들에게 소산(疏散, 특정 지역에 밀집한 주민이나 건조물을 분산시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현장은 이 틈을 타서 난민 속에 끼어 몰래 관문을 넘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정부는 체포령을 내렸다. 자신을 쫓아오는 추격병 때문에 현장은 낮에는 숨고, 밤에만 길을 걸었다. 국경도시 간쑤성 과저우에 이르러서야 추격병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일망무제(一望無際)의 끝없는 사막이 앞을 가로막았다. 무수한 고난과 위험을 거쳐 드디어 현장은 서역각주3) 에 도착했다. 현장은 서역의 여러 작은 나라에 한동안 머물렀다. 이 나라들은 모두 불교의 영향을 받은지라,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인도로 가는 고승에게 진심으로 존경의 뜻을 표시했다. 왕들이 성문에 직접 나와 현장을 환영하고, 그를 위해 성대한 잔치도 베풀었다. 그중에서도 고창국각주4) 의 왕이 가장 열성적이었다.

고창국의 왕 국문태는 경건한 불교신자였으며, 당나라의 문물을 흠모했다. 그는 현장을 억지로 성 안으로 모셔와 10여 일이 넘도록 놔주질 않았다. 떠날 것을 고집하는 현장에게 강제적인 방법도 쓰고, 회유책도 썼다. 그러나 단식으로 대항하며 극도로 몸이 쇠약해진 현장을 차마 더는 붙잡을 수 없었다. 결국 왕은 현장에게 많은 말과 법의와 여비를 주고, 전국의 대신과 고승을 데리고 10여 리를 쫓아오며 눈물로 배웅했다.

앞서간 사람들을 볼 수 없다

현장은 1년 후인 630년 겨울, 비로소 인도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는 먼저 여러 곳의 성지를 참배하고 마지막으로 석가가 수도하던 곳에 이르렀다. 그는 50척(약 15미터) 조금 넘는 보리수 아래에 섰다. 1000년 전에 한 성인(석가모니)이 나타나 중생을 위해 홀로 적막한 황혼을 수없이 맞고 보냈음을 생각하니, 무한한 감개를 억누를 길 없어 목 놓아 울었다. 현장은 '앞서간 사람들을 볼 수 없고, 뒤따라올 사람을 만날 수 없음'에 대해 슬퍼하고, 또 불법이 점점 쇠퇴해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통곡했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승려들도 따라서 울음을 터뜨렸다. 현장은 이 성스러운 곳을 차마 떠나지 못해 9일 동안 머물다가 10일째 되는 날, 목적지인 날란다 사로 향했다.

현장은 이곳에서 계현 법사에게 유가론각주5) 을 배웠다. 계현 법사는 106세의 고령으로 심한 풍토병을 앓고 있었는데, 극심한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몇 번이나 자살로 해탈을 구하려 했다. 그러한 그도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온 현장에게 감동하여 5년간 불경을 해설해주었다. 계현 법사에게서 심오한 불법의 경지를 배운 현장은 인도를 두루 다니며 견문을 넓히고, 다시 날란다 사로 돌아와 불경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이 인도 전체에 퍼지자 유명한 승려들이 앞다투어 찾아와 현장과 변론을 벌였다. 그러나 모두 그의 의견에 굴복했다. 이 무렵 현장은 귀국하기로 결심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날란다 사의 승려들이 모두 놀라며 만류했다.

"현장법사님! 이곳은 부처의 탄생지입니다. 반면에 중국은 불법의 진리를 중히 여기지도 않고, 사람들의 도량(度量)도 좁으려니와 기후 또한 춥지 않습니까?"

이에 현장은 정색하며 말했다.

"몇 천 년의 오랜 문화 전통을 갖고 있는 중국은 인의와 도덕을 중히 여길 줄 알고, 또한 대승불교각주6) 를 믿고 있습니다.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은 불경을 가지고 돌아가 중국에 불법을 넓히고자 함에 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계현 법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승불법을 베풀다

당시 인도에는 많은 나라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계일왕각주7) 의 세력이 가장 컸는데, 일찍이 그는 현장을 초청한 일이 있었다. 계일왕은 만조의 대신들을 거느린 채, 양편에 횃불을 늘어세웠다. 그러고는 한 걸음마다 쇠북을 울리며 기세도 당당하게 현장을 맞이했다. 현장이 가까이 오자 계일왕은 즉시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했다.

다음날 계일왕은 현장을 궁중으로 모셔 불경을 강독하게 하는 한편, 무수한 사신들을 인도 각지로 보내어 명승과 학자들을 곡녀성에 모이도록 했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왕은 현장과 함께 갠지스 강을 거슬러 올라가 곡녀성에 도달했다. 갠지스 강의 남쪽 강변에는 왕의 수십만 군대가 늘어서 있었으며, 강 위에는 1만 척의 군함이 현장을 환영했다. 또한 이들이 터뜨리는 북소리와 나팔소리가 천지와 함께 조화되니, 그야말로 역사상 보기 드문 장관이었다.

이 곡녀성 대회에 18개국의 왕과 승려 3,000여 명, 바라문[브라만. 인도의 사성(四姓) 가운데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승려 계급] 2,000여 명과 기타 종교의 학자들, 날란다 사에서 파견된 승려 1,000여 명 등 도합 7,000여 명의 관중이 참가했다. 그들은 코끼리를 타거나 혹은 가마를 타고, 혹은 걸어서 몰려와 수십 리 길을 꽉 메웠다. 개회일이 되자 회장 가운데 보좌[옥좌(玉座). 불교에서는 부처가 앉는 자리를 일컫는데, 보통 높고 귀한 자리를 칭함]를 설치하고, 왕이 여러 국왕과 대신들을 동반하고 땅에 무릎을 꿇은 채 제자의 예를 갖추어 말했다.

"현장 대법사님! 보좌에 오르시어 대승불법을 베풀어주시옵소서."

현장은 만인이 보는 가운데 보좌에 올라 불법을 베풀었다. 현장의 불법 강론이 끝난 후, 왕은 날란다 사의 명현 법사에게 청중을 향해 다시 한 번 읽도록 하고, 한 편은 필사하여 회장 입구에 걸어놓게 했다. 그리고 그 위에 다음과 같이 썼다.

'누구든지 이 글 가운데서 한 자라도 진리에 맞지 않는 말을 지적해내는 사람이 있다면, 현장의 목을 베어 사죄하겠다.'

이렇게 18일 동안 걸어놓았으나, 누구 한 사람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곡녀성 대회 이후, 왕은 다시 발라야가 성에서 75일 동안 보시대회(신도들이 승려에게 청하여 불경을 읽거나 불교 행사를 하도록 함)를 열어 현장을 환송했다. 이 대회에 참가한 승려와 민중이 50여 만에 달했으니 이것으로 대회의 성황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일개 유학생이 외국에서 이러한 존경과 숭앙을 받는 경우는 매우 드물 것이다.

금의환향

현장의 귀국 광경은 16년 전 겨우 말 한 필을 타고 몰래 빠져나오던 때와는 딴판이었다. 불경을 실은 마필 수만도 22필이었다. 당태종각주8) 은 현장의 귀국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뻐서 주변의 작은 나라들에 명을 내려 길가에서 그를 호위하도록 했다. 대열이 지날 때마다 관내의 관리와 백성들은 향불을 들고 현장을 맞이했다.

장안에 도착한 현장은 18만 자에 달하는 《대당서역기》를 쓰는 한편, 대규모의 불교 경전 번역 사업을 벌였다. 이 사업의 규모는 역사상 가장 웅대했다. 현장은 정해진 진도를 다 마치지 못하면 삼경(밤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 때까지 계속했다. 잠시 눈을 붙여 쉰 후, 오경(새벽 3시에서 5시 사이)에 다시 일어나 브라만어로 된 불경에 붉은 글씨로 구두점을 찍어 번역 준비를 했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 곧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몸을 돌보지 않고 공부에 열중한 데다 불경을 구하기 위해 인도로 갈 때 많은 풍상을 겪은 탓에, 현장은 냉병(冷病)을 얻고 말았다. 더욱이 고된 경전 번역 사업으로 인해 병세는 날로 위독해져 갔다. 그런데도 그는 병든 몸을 이끌면서 《반야경》 전체를 번역하고, 계속하여 《대보적경》을 번역하려 했다. 그러나 몇 줄 진행하지 못하고 영영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62세였다.

현장은 불경 번역 외에 외교상에서도 커다란 공적을 세웠다. 그의 뛰어난 변론과 해박한 지식은 인도 전체를 흔들어놓고도 남았다. 계일왕은 그의 불법 강의를 들은 후부터 사신을 장안으로 보내어 조공을 바칠 정도였다. 이것은 중국과 인도 사이에 이루어진 외교 관계의 시작일 뿐 아니라 유학생으로서 이만한 외교 성과를 올린 경우는 아마 동서고금을 통해서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철학 속으로

현장은 '아(我, 나의 존재)와 법(法, 불경)은 의식이 변화해서 나타난 것에 불과하며, 모두 진실한 존재가 아니므로 아집(我執, 나의 존재에 집착하는 일)과 법집(法執, 경전에 집착하는 일)을 깨뜨려야만 성불(成佛, 부처가 되는 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우리가 부처(佛)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먼저 우리의 마음은 선과 악, 그 중간 상태인 무기(無記)의 인자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 세 가지 인자가 아식[我識, 물질은 오관(五官)에 의해 우리의 의식에 들어오는데, 다시 그 의식을 거쳐 도달하게 되는 단계. 즉 물질과 정신의 세계가 서로 교류하며 나타나는 단계]을 통과하여 나타난 것이 나(我)의 인격이다. 즉 선을 나타내면 선인이 되고, 악을 나타내면 악인이 된다. 그럼에도 이 선인과 악인은 보통 사람에 불과한데, 부처의 경지란 모든 선악을 초월하는 진여(眞如, 우주 만물의 실체로서 지극히 현실적이고도 평등하며 차별이 없는 절대적 진리)의 경지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가운데 있는 선악의 인자를 없애야만 진여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

다만 선종에서 말하는 돈오(頓悟)가 장식(藏識, 가장 저차원의 단계로 물질의 씨앗)의 단계에서 갑자기 이 씨앗을 변화시켜 부처의 경지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데 반해, 모든 사물은 오직 식(識)에 의해 나타난다는 유식론에서는 불교도들의 점진적인 수양에 의해서 이 단계까지 올라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악의 인자를 점점 없애가다 보면 우리 속에 선의 인자만 남게 되고, 다시 이 선의 인자까지 없애 나가다보면 마침내 부처의 경지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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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률 집필자 소개

전남 영광 출생. 전남대학교 철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전북대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광주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교내에서 윤리교육과 학과장, 학생생활연구..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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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철학자들은 철학적으로 살았을까
위대한 철학자들은 철학적으로 살았을까 | 저자강성률 | cp명평단문화사 전체항목 도서 소개

세상을 바꾼 철학자 30인의 알려지지 않은 철학 이야기를 통해 세계철학사의 흐름을 읽다. 철학자의 사상보다는 삶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그들의 삶 역시 평범한 인간과 다..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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