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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다른 표기 언어 동의어 인간의 본성은 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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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BC 372
사망 BC 289
국적 중국

추(鄒)나라의 유교 사상가. 맹자가 살던 전국시대는 학자와 문화인 등이 자기의 학설이나 주장을 자유롭게 발표하여 논쟁하고 토론하는 백가쟁명의 최전성기였다. 또 이 시기는 제자백가들이 등장하여 학문적으로 중흥기를 이루었다. 일찍이 공자를 본받아 배우려 하고, 공자의 손자인 자사에게 가르침을 받아 공자의 학통을 이어받았다. 편모슬하에서 자란 점이라든지 많은 제자를 둔 점 등 공자와 비슷한 면이 많지만, 공자와 달리 맹자는 말썽꾸러기였고 그의 제자는 주로 왕과 권력자 등이었다. 성선설과 왕도정치론, 정전제의 실시를 주장했고, 사서 가운데 한 권인 《맹자》는 맹자의 어록을 모은 것으로 후세에 편찬되었다. 맹자의 어머니는 맹모삼천지교와 단기지교로 맹자 못지않게 유명하다.

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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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성이 뛰어난 맹자

맹자의 가정환경은 공자와 유사했다. 맹자도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했다. 그러나 조숙했던 공자와는 달리 맹자는 말썽꾸러기였다. 특히 모방성이 강해 주위 지방의 습속을 곧잘 흉내냈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가 세 번 이사다니며 가르쳤다고 하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가 유명하다. 《열녀전》에 그에 관한 내용이 있다.

맹자가 어렸을 때 그의 집은 공동묘지 근처에 있었다. 그가 무덤을 만들고 발로 달공(장례 절차의 제일 마지막 의식으로, 관을 내린 다음 흙을 덮고 땅을 다질 때 부르는 노래)하는 흉내를 내는 놀이를 하므로 맹자 어머니는 "이곳은 아이를 기를 만한 데가 못 된다"며 시장 근처로 이사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물건을 사고파는 장사꾼의 흉내를 내는 놀이를 하는 것이 아닌가? 이에 맹모는 "이곳도 아이를 교육할 만한 곳이 못 된다"고 하여 이번에는 학교 근처로 이사했다. 이곳에서는 놀이를 하되, 제기(祭器)를 차려놓고 어른에게 인사하거나 겸손하게 양보하는 예절을 다하는지라, 이때에 맹모는 비로소 마음을 놓고 "이곳이야말로 자식을 가르칠 만한 곳이구나" 하고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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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모가 모성 교육의 사표(師表, 학식과 인격이 높아 세상 사람의 모범이 되는 일이나 그런 사람)로서 후세에 길이 빛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이 밖에도 맹모의 유명한 이야기가 몇 가지 더 있다. 맹자가 어렸을 때 나가 놀다가 이웃집에서 돼지 잡는 것을 보고와 어머니에게 "돼지는 왜 잡습니까?" 하고 물었다. 맹모는 무심코 "너를 먹이려고 그런다"고 대답하는데, 사실 고기를 사다 먹일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 맹모는 크게 후회하여 말하기를 "내 듣건대 예전에는 태교도 있었다는데, 이 아이가 무엇을 알려고 묻거늘 내가 거짓말을 한다면 이것은 불신을 가르치는 결과가 된다"고 하고, 결국 그 돼지고기를 사다 먹였다.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의 교육을 위해 이사를 세 번 했다는 내용의 〈맹모교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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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에게 최고의 스승은?

맹자는 본래 노나라 사람이었으나 나중에 추나라 땅(지금의 산둥성 쩌우)으로 옮겨와 추나라 사람이 되었다. 그는 학교에 나가며 열심히 공부했다. 몇 년 후 선생님이 그를 불러서 "너는 내게서 배울 것을 다 배웠으니 이제부터 학교에 나올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 뒤로 맹자는 노나라의 취푸로 가서 자사각주1) 의 문하에 들어가 배우기 시작했다. 맹자는 공자가 태어난 곳에서 6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일찍이 그를 사숙각주2) 하고 그와 같은 성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고 전한다.

얼마 후 맹자는 말타기를 배우다가 넘어져 팔을 다쳤다. 어머니를 뵌 지도 오래되어 고향으로 갔다. 길쌈을 하던 중인 어머니는 맹자에게 공부가 얼마나 성취되었느냐고 물었다. 맹자가 별로 나아진 바가 없다고 대답하자, 맹모는 칼을 들고 길쌈하던 것을 끊으며 말했다.

"네가 공부를 하다가 중단하는 것은 내가 이 칼로 여태까지 애써서 짜던 이 길쌈을 끊는 것과 같다."

맹자는 어머니의 말을 들은 후 크게 깨닫고,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공부하며 쉴 줄을 몰랐다. 이것이 맹모의 단기지교(斷機之敎)다. 즉, 학업을 중간에 그만두는 일은 짜던 베의 날을 끊는 것과 같아 아무런 이익이 없다는 뜻으로 학업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경계하는 말이다.

《한시외전》에는 맹자가 성인이 되어 사회인으로 활동할 때도 그 어머니의 교훈이 의연함을 기록하고 있다.

어느 날 맹자의 아내가 방 안에 혼자 있을 때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있었다. 때마침 맹자가 문을 열고 들어오다가 그 모습을 보고, 어머니에게 아내가 무례하여 내쫓아야겠다고 말했다. 맹모는 그 모습을 어떻게 보게 되었느냐고 물었고, 맹자의 대답을 듣고 나서 말했다.

"그것은 네가 무례한 것이지, 네 아내가 무례한 것은 아니다. 오례각주3) 에 말하지 않았더냐? 대문에 들어갈 때는 누가 있느냐고 묻는 법이고, 대청 위에 올라갈 때는 반드시 기침 소리를 내는 법이며, 또 방 안에 들어갈 때는 반드시 앞만 보고 남의 좋지 않은 점은 보지 말라고. 그런데 네가 갑자기 방에 들어가면서 기척을 내지 않았기 때문에 네 아내가 다리를 뻗고 앉은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니, 이것은 네가 무례한 것이지 어찌 네 아내가 무례하단 말이냐? 또한 네가 무례한 것은 너에게 예법을 잘 가르치지 못한 내게 죄가 있으므로, 그 벌은 내가 받아야 한다."

말을 마친 후 맹모는 스스로 자신의 종아리를 피가 나도록 때렸고, 맹자는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쳤다.

왕에게 바른 소리를 하다

학식과 덕망으로 유명해진 맹자가 제자들을 거느리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유가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할 때였다. 그의 뒤로는 수레 수십 대가 넘는 긴 행렬과 제자 수백 명이 따랐다. 그 모습은 멀리에서 보기에도 그야말로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 그는 호탕하게 열국을 향해 진군했다. 씩씩한 기상과 굳은 절개를 가졌던 그는 왕들에게 이상 정치(왕도정치)를 시행할 것을 강력히 권유했다.

맹자가 양나라의 혜왕을 만난 것은 53세 때였다. 혜왕은 자기 나라가 점차 약화되는 것을 염려하여 사방에서 현인들을 초빙했다. 이에 맹자가 찾아가니 혜왕은 매우 기뻐하며 나라에 도움이 될 방법을 물었다.

맹자는 "만일 왕께서 어떻게 하여 내 나라를 이롭게 할까 주장하신다면 대부각주4) 들도 반드시 어떻게 하여 내 집안을 이롭게 할까 할 것이며, 또 선비나 백성들도 어떻게 하여 나 자신을 이롭게 할까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위아래가 서로 자기의 이득만을 다툰다면 나라가 위태롭게 되고 말 것입니다"라고 충고했다. 이어서 그는 "신하된 자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여 임금을 섬기고, 자식된 자가 자기 이익을 생각해서 어버이를 섬기고, 동생된 자가 자기 이익을 생각해서 형을 섬긴다면, 그것은 인의가 아니라 이익 때문에 서로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고서도 멸망하지 않은 경우는 여태껏 없었습니다"고 말했다. 이른바 모든 일에 개인의 공명(功名, 공을 세워서 자신의 이름을 널리 드러냄)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의 폐해를 통렬히 비판한 것이다.

하루는 맹자가 왕에게 물었다.

"형리(刑吏)가 자기가 맡고 있는 감옥 내의 질서를 바로잡지 못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형리를 파면시켜야 한다."

"나라 전체가 문란해졌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자 왕은 다른 이야기로 말꼬리를 흐렸다.

맹자에 따르면, 군주의 의무를 게을리하여 백성들에게 원망이나 불평을 듣는 자는 마땅히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또 왕이 자리에 연연하여 독재를 하거나 백성들을 억압하려 든다면 살해되어도 무방하다. 그리고 이것은 절대 임금과 신하의 의리 혹은 명분을 파괴하는 일이 아니다. 왜 그럴까? 둘 사이에는 벌써 군신(君臣) 간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걸주각주5) 같은 왕은 이미 왕으로서 존재 의의를 상실했기 때문에 임금과 신하의 도리가 지켜질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맹자는 '혁명의 정당성'을 주창했기 때문에 끝내 군주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했다. 심지어는 그의 초상화와 글이 공자묘에서 철거된 일도 있었다. 60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고, 다만 고향에 은거하며 제자 교육과 저술 작업에 몰두했다고 전한다.

철학 속으로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는 성선설을 주장하면서 사단설(四端說)을 근거로 들었다. 사단이란 인간에게 있는 네 가지 선함의 시초를 말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은 어짊의 시작이요(측은지심-인),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로움의 시작이요(수오지심-의), 사양하는 마음은 예절의 시작이요(사양지심-예),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은 지혜의 시작이다(시비지심-지)."

그러나 아무리 착한 본성이라도 그대로 방치하면 황폐화되기 쉽기 때문에 이를 잘 보존하기 위해서 후천적인 교육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교육을 통해 우리 인간이 감각기관의 요구에 얽매이지 않고 사유 기관의 요구에 따르도록 해야 하며, 그래야만 선악과 시비를 가리어 착함과 옳음에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더불어 인간은 외부의 유혹이나 협박에 넘어가기 쉬운 존재이므로 흔들리지 않는 마음(부동심)을 얻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에 호연지기[浩然之氣('거침없이 넓고 큰 기개'라는 뜻. 지극히 크고 굳세며 곧은 마음으로 진취적 기상의 바탕이 된다)]를 길러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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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맹자는 사람의 본성은 어질기 때문에 통치자는 반드시 인의로써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하여 이른바 왕도정치를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왕도정치란 인의에 기초하여 공리주의를 물리치고, 백성들의 뜻에 따라 정치를 펴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민생 문제를 소홀히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 정전제각주6) 를 실시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그리고 민심(民心)은 곧 천심(天心)이기 때문에 임금은 백성들의 신뢰를 받는 현자 중에서 뽑아 선양(禪讓, 임금이 살아 있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왕위를 물려줌. 유교에서 생각하는 이상적인 정권교체 방식)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맹자의 정치론은 바로 민본주의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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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률 집필자 소개

전남 영광 출생. 전남대학교 철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전북대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광주교육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교내에서 윤리교육과 학과장, 학생생활연구..펼쳐보기

출처

위대한 철학자들은 철학적으로 살았을까
위대한 철학자들은 철학적으로 살았을까 | 저자강성률 | cp명평단문화사 전체항목 도서 소개

세상을 바꾼 철학자 30인의 알려지지 않은 철학 이야기를 통해 세계철학사의 흐름을 읽다. 철학자의 사상보다는 삶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그들의 삶 역시 평범한 인간과 다..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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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맹자위대한 철학자들은 철학적으로 살았을까, 강성률, 평단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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