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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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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BC 338 |
국적 | 중국 |
대표작 | 《상군서》 |
법가의 계통을 잇는 중국 전국시대의 정치가. 위(衛)나라 왕의 서자로 태어났으나 위나라에서는 자신의 이상을 펼칠 수 없음을 알고, 위(魏)나라로 건너가 공숙좌의 가신이 되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등용되지 않자, 다시 진(秦)나라로 건너가 진나라에서 등용되었다. 관중의 사상에 입각하여 준법정신을 강조했던 그는 진나라 왕 효공의 신임을 받아 법령과 제도를 개혁하고 부국강병을 꾀했다. 지나친 법령 지상주의를 주장하여 많은 적을 만들었고, 결국 자신이 만든 법에 목숨을 잃었다. 그 때문에 '자신이 만든 법률에 의해 죽은 자'라는 조롱을 받았으며, 갈고리 모양의 '상앙의 극'이라는 무기를 제조했다. 저서로는 법가의 책인 《상군서》를 남겼다.
나라는 절대 백성을 속이지 않는다
상앙은 원래 위(衛)나라 왕의 첩에게서 태어났다. 본명은 공손앙인데, 진(秦)나라에 등용되어 상(商)이라는 곳에 봉해졌기 때문에, 이후 상앙(商鞅)이라 불렸다. 처음에 그는 위(魏)나라의 재상 공숙좌의 가신(家臣, 높은 벼슬아치의 집에 딸려 있으면서 그 벼슬아치를 받드는 사람)으로 있었는데, 좀처럼 벼슬길이 열리지 않았다. 공손앙의 뛰어난 재능을 알고 있던 공숙좌는 그를 혜왕각주1) 에게 천거했다. 그러나 혜왕은 그를 좀처럼 중용하지 않았다. 결국 공숙좌는 죽기 얼마 전 병석에서 혜왕에게 간언(諫言)했다.
"소신이 죽거든 공손앙을 등용하십시오. 만일 등용하지 않으시려거든 그를 죽여 없애야 하옵니다."
공숙좌는 자신이 한 말을 공손앙에게 전달하고는 빨리 도망치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공손앙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도리어 웃으며 말했다.
"당신의 천거에도 불구하고 저를 중용하지 않았던 왕이 어찌 당신이 간언했다고 하여 저를 죽이겠습니까?"
과연 그의 통찰대로 혜왕은 공손앙을 죽이지 않았다.
얼마 후, 공손앙은 진(秦)나라로 건너갔다. 당시 진나라는 국력이 쇠퇴하고, 이웃나라에서 오랑캐라며 배척당하는 등 아주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에 진나라 효공은 과거의 전성시대를 다시 구가하기 위해 널리 인재를 구하는 중이었다. 이때 공손앙은 효공에게 이렇게 건의했다.
"진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먼저 낡은 법률과 제도를 개혁해야 합니다."
여러 사람이 반대했지만, 효공은 공손앙의 논리에 찬성하고 결국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효공은 공손앙을 좌서장(左庶長, 12등급 가운데 6등급 정도인 벼슬)으로 삼아 법률과 제도를 개정하여 정치 개혁에 착수했다. 이때 공손앙이 만든 법의 내용은 엄벌주의와 연좌제, 밀고의 장려, 신상필벌(信賞必罰) 등 법률 지상주의였다. 모든 사항을 법으로 세밀히 규정하여 백성의 일거수일투족에 이르기까지 법률의 구속을 받게 한 것이다.
공손앙은 법률을 공표하기 전에 우선 백성에게 '법령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정부의 굳센 의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수도의 남문에 석 자 길이의 장대를 세우고는 공언했다.
"누구든지 이 장대를 북문으로 옮기는 자에게는 황금 열 덩어리를 상으로 주겠노라!"
그러나 백성들은 이를 수상하게 여길 뿐 아무도 옮기려 하지 않았다. 이에 공손앙은 상금을 황금 50덩어리로 올렸다. 그러자 호기심 많은 한 사람이 용기를 내어 장대를 북문으로 옮겼다. 공손앙은 그 자리에서 즉시 황금 50덩어리를 상으로 주고는, '나라가 결코 백성을 속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런 다음 새로 개정된 법률을 공표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처음에는 법이 잘 지켜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새로운 법이 시행된 지 겨우 1년이 지나자마자 많은 사람이 법률의 불편을 호소해왔다. 그러던 중 태자가 법률을 위반하는 일이 있었는데, 공손앙은 "법률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는 것은 위에서부터 법을 어기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며 태자를 법대로 처벌하려 했다. 그러나 태자는 임금의 뒤를 이을 사람인지라, 관례상 벌을 내릴 수 없었다. 그리하여 태자를 대신해 그의 스승인 태부[太傅(태사, 태보와 함께 임금의 고문 또는 국가 최고의 명예직)] 공자 건(효공의 형)을 처벌하고, 태사(太師) 공손가에게는 얼굴을 불로 지지는 형벌을 내리니, 진나라 사람들은 모두 법령에 따랐다.
새로운 법령이 시행된 지 10년이 지나자 진나라는 질서가 잡혀갔다. 길에서 남의 물건을 주워가는 사람도 없고, 산적이 없어졌으며, 개인끼리의 싸움은 서로 피하되 나라를 위한 전쟁에 임해서는 모두 용감했다. 이렇게 전국 방방곡곡이 잘 다스려졌다. 공손앙은 법에 반대하는 사람은 물론이려니와, 법을 찬양하는 사람마저 처벌함으로써 법에 대한 논의 자체를 금지했다. 그저 아무 소리 말고 무조건 따라오라는 식이었다.
상 땅에 봉해지다
부국강병을 이룬 진나라는 마침내 위나라를 공격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갑론을박하는 중이었다. 이때 공손앙이 효공에게 건의했다.
"진나라와 위나라는 서로 매우 불편한 존재입니다. 결코 공존할 수 없습니다. 오직 먹느냐 먹히느냐 하는 정글의 법칙만이 지배할 뿐입니다. 따라서 지금이야말로 위나라를 공격할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합니다."
효공은 이 말에 찬성하고, 즉시 그를 장군으로 삼아 위나라를 공격하도록 했다. 이에 위나라는 공자 양을 장군으로 삼아 맞섰다. 양쪽 군대가 대치하는 동안 공손앙은 사람을 시켜 공자 양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내가 옛날 위나라에 있을 때 당신과 매우 친하게 지내던 사이인데, 이제 두 나라의 장군이 되어 서로 싸우게 되었구려. 그러나 우린 서로 차마 공격하지 못할 처지가 아니요? 그러니 당신과 내가 직접 만나 화친 조약을 맺고 기분 좋게 술을 마신 다음, 양쪽 군사를 죄다 거두어들입시다. 그리하여 두 나라가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소?"
공자 양은 이 제안이 그럴듯하다 여겨 찬성하고, 서로 만나 주연(酒宴)을 열었다. 그러나 공손앙은 잔치 자리에 군사를 숨겨놓고 있다가 공자 양을 사로잡았다. 그러고 나서 위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 소식을 들은 위나라 혜왕은 탄식했다.
"내가 그때 공손앙을 등용하라는 공숙좌의 의견을 듣지 않은 것이 한스럽구나!"
이렇게 위나라를 쳐부순 공로로 공손앙은 상(商) 땅에 봉해졌고, 이때부터 공손앙은 상앙 또는 상군(商君)이라 불렸다.
강하면 부러진다
곧이어 2차로 시행된 개혁 방안에는 부자(父子)와 형제가 한방에서 기거하는 것마저 금지했다. 나라에 대한 불평불만이나 유언비어를 만들어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처사였으나, 잔악한 법이었다. 이러다 보니 상앙이 재상으로 있은 지 10여 년 동안에 그를 원망하는 사람의 수는 늘어만 갔다. 그런데도 상앙이 오랫동안 재상 자리에 머무를 수 있었던 것은 그에 대한 효공의 신임이 두터웠던 까닭이다. 그러나 이는 효공이 죽고 나면 상앙 역시 실각하리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효공이 죽기 5개월 전, 상앙은 우연히 조량(趙良)이란 사람을 만났다. 조량은 자신이 '바른 말을 하더라도 나무라지 않겠다'는 상앙의 다짐을 받고 나서 다음과 같이 권고했다.
"제가 생각건대 상군의 위태로움이 아침이슬과도 같은데, 오히려 수명을 더하시려고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차라리 봉지(封地, 제후로 봉하여 내어준 토지)로 받은 상(商) 땅의 열다섯 고을을 반납하고 시골로 돌아가 농사를 지으시는 것이 상책인가 하옵니다."
그러나 상앙은 조량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날로부터 5개월 만에 효공이 죽고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곧 혜문왕이다. 그러니 상앙에게 가혹한 처벌을 받은 공자 건과 그 무리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신하된 자의 권력이 너무 크면 나라가 위태롭다고 했습니다. 지금 어수룩한 백성들은 상앙의 법에 의해 나라가 다스려진다고 말합니다. 더욱이 그의 봉읍이 열다섯 개에 이르니, 그 권력이 막대하여 후일 반드시 반역을 꾀하고야 말 것입니다."
태자 시절 자신의 잘못을 질책하여 스승을 처벌한 상앙에게 좋은 감정을 가졌을 리 없는 혜문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관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조량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데 대한 대가일 것이다.
그러나 일은 이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상앙이 사직하고 상 땅으로 돌아가는데 그의 행렬은 어느 제후에 못지않았고, 아직 그의 세력을 두려워한 대신들이 그를 전송하느라 조정이 텅 비다시피 했다. 그러자 마음이 초조해진 혜문왕은 이 기회에 상앙을 제거해야겠다고 결심하고, 군대를 보내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자신에게 체포령이 떨어진 것을 안 상앙은 급히 도망가다가 관하의 객사에서 하룻밤 머물기를 청했다. 그러나 그가 상앙임을 모른 객사의 관리들은 거절했다.
"상군의 법률에 보면, 여행권이 없는 자를 유숙하게 하면 벌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상앙은 속으로 '아, 내가 만든 법률의 폐단이 이 지경에까지 이른 줄은 몰랐구나!' 하며 탄식했다.
자신이 만든 법률에 의해 죽은 자
상앙은 그 길로 위나라의 국경을 넘었다. 그러나 그곳 사람들은 상앙이 자기 나라의 군사를 쳐부순 데 대해 원망하고 있던 터라, 그를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진나라로 추방했다. 진나라로 쫓겨난 상앙은 다시 상 땅으로 달아나 자신의 무리들과 함께 상 땅의 군사를 동원하여 북쪽의 정나라를 공격했다. 이때 진나라가 군대를 파견하여 상앙을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혜문왕은 상앙을 거열, 두 대의 우마차에 나누어 묶어놓고 각각 반대 방향으로 말을 몰아 몸을 찢어 죽이는 무시무시한 형벌로 처형했다. 그리고 그 시신을 여러 사람에게 돌려보게 했고, 상앙의 일가까지 몰살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상앙을 '자신이 만든 법률에 의해 죽은 자'라고 희롱했다.
한편 진나라는 상앙이 쌓아올린 부국강병의 기반 위에서 더욱 강성해졌다. 상앙은 비참하게 죽었으나, 그가 정비한 법과 제도는 진나라의 시황제가 중국 역사상 최초로 통일국가를 수립하게 한 힘의 원천이 되었다.
철학 속으로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서 유가는 인의도덕을, 도가는 무위자연을, 묵가는 겸애절용을 제창했으나 세태는 혼미만을 거듭했다. 이때 실제 통치 면에 바탕을 두고 일어난 학파가 바로 법가다. 이들의 특징은 정치사상만을 따지고 모두 군주의 관점에서 이론을 전개한다는 점이다. 법가의 직업은 대개 군주의 참모였다. 따라서 그들의 임무는 부국강병이었다. 그들은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어떤 극단적인 수단도 가리지 않았으며, 맹자가 공격한 패도정치(覇道政治, 힘에 의한 정치를 일컫는 말로 왕도정치와 대비되는 개념)가 바로 그들의 이상이었다.
상앙은 사람들이 법을 잘 지키지 않는 것은 첫째, 백성들이 정부에서 하는 일을 믿지 못하고 둘째, 고관대작들이 법률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것을 고치기 위해 노력했으나, 지나치게 법을 엄격히 적용함으로써 결국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 되었다. 보통 법가의 3파라면 상앙의 법(法)과 한(韓)나라의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신불해의 술(術)과 조나라의 학자이자 사상가인 신도의 세(勢)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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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철학자 30인의 알려지지 않은 철학 이야기를 통해 세계철학사의 흐름을 읽다. 철학자의 사상보다는 삶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그들의 삶 역시 평범한 인간과 다..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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