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20세기 한
국 문학의
탐험 4
198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문학가

박완서

모계 문학의 수원지

요약 테이블
출생 1931년
사망 2011년
소설의 거리(材料)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게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평범한 일상 속에, 버림받은 쓰레기 속에, 외면당한 남루 속에, 감추어진 추악한 것 속에서 소설의 거리는 보석처럼 반짝거리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우연히 얻어지는 건 아닐 것입니다. 삶에 대한 꾸준한 통찰력, 따뜻한 연민, 때로 열정적인 애정에 의해서만 그것을 볼 수가 있고, 주워올릴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주워올린 다음입니다. 어떤 거리를 소설로 만들기 위해선 주워올릴 때와는 딴판으로 일단 뜨악하게 밀어내고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하고, 정이 앞서지 않는 냉혹한 마음으로 추리고 다듬고 지켜졌을 때만 비로소 명색이 소설이라 부를 만한 것이 만들어졌지 않았나 싶습니다.
박완서, 「이상 문학상 수상 소감」, 『엄마의 말뚝』(문학사상사, 1981)

박완서(朴椀緖, 1931~2011)는 한국 모계 문학의 수원지(水源地)다. 한국 소설사는 부계의 혈통을 잇는 소설들이 오랫동안 주류를 이룬다. 그런데 박완서의 소설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는 존재인 여자의 이야기를 주로 다룬다. 즉 “아들보다는 딸이 아버지보다는 어머니가, 남편보다는 아내의 이야기”가 주류를 이루는 모계 문학의 특징을 보인다.각주1) 그는 여성 특유의 “사설과 넉살, 익살과 엄살, 달램과 꾸짖음, 묘사와 설교”각주2) 라는 방법으로 여성의 삶을 한껏 아우르며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물론 박완서의 소설을 두고 “소시민적 행복의 허위를 예리하게 간파”(염무웅)한다거나 “사회 현실에 대한 남달리 뚜렷한 비판 의식”(백낙청)을 보여준다는 비평가들도 있지만, 박완서 소설의 본령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식민화되는 여성의 삶의 실상을 드러내고 여성의 삶에 구조적으로 가해지는 억압과 소외을 따지고 파헤치는 데 있다. 박완서를 “여성 해방 문학의 작가”각주3) 로 꼽게 만든 소설로는 『살아 있는 날의 시작』(1980) · 『서 있는 여자』(1985) ·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1989) 등이 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룬 모계 문학의 작가 박완서

ⓒ 시공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박완서는 1931년 10월 20일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 묵송리 박적골의 반남 박씨 가문에서 태어난다. 박적골은 개성 시내에서 20여 리 떨어진 한촌으로 홍(洪)씨 문중 마을이었다. 반남 박씨 일가는 그 마을의 유일한 타성바지였다고 한다. 네 살 나던 해인 1934년 그는 아버지를 여읜다. 얼마 뒤 어머니는 어린 딸을 할아버지 밑에 떨어뜨려놓고 아들을 대처에서 공부시켜 기울어가는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울 작정으로 서울로 올라간다. 어머니가 그를 서울로 데리고 올라온 것은 1938년의 일이다. 어머니는 맹렬한 교육열로 학군 위반까지 하며 딸을 매동국민학교에 입학시킨다. 어머니의 꿈은 딸을 ‘신여성’으로 키우는 것이었다. 어머니에게 신여성은 “공부를 많이 해서 이 세상의 이치에 대해 모르는 게 없고, 마음먹은 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자”였다.

어머니가 세운 신여성이란 것의 기준이 되었던 너무 뒤떨어진 외양과 터무니없이 높은 이상과의 갈등, 점잖은 근거와 속된 허영과의 모순, 영원한 문 밖 의식, 그건 아직도 나의 의식 내용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의 의식은 아직도 말뚝을 가지고 있었다. 제 아무리 멀리 벗어난 것 같아도 말뚝이 풀어준 새끼줄 길이일 것이다.
박완서, 「엄마의 말뚝 1」, 『엄마의 말뚝』(일월서각, 1982)
한국전쟁과 분단으로 말미암은 불행한 가족사 체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집 〈엄마의 말뚝〉

여기에 실린 같은 제목의 작품으로 1981년 이상 문학상을 받는다.

ⓒ 시공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의 꿈은 딸을 ‘신여성’으로 키우는 것이었지만, 평생 동안 작가의 의식에 들러붙는 것은 다름아닌 “문 밖 의식”, 즉 자신이 주변인이라는 의식이다. 박완서는 1944년 숙명여고에 입학하는데, 얼마 뒤 학제가 4년제 여고에서 6년제 여중으로 바뀐다. 여중 5학년 문과반 소속일 때 담임 교사가 소설가인 박노갑(朴魯甲)이었고, 소설가 한말숙과 시인 김양식 등이 같은 반에서 공부한다. 당시 시중에는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책이 넘쳐나서 그는 일본어로 번역된 세계 문학 전집과 톨스토이 · 도스토예프스키 · 체호프 같은 러시아 작가들의 소설을 손쉽게 구해 읽으며 은근히 문학과 관련된 꿈을 키운다.

1950년 그는 서울대학교 문리대 국문과에 입학하지만, 6월 20일 입학식을 치른 지 불과 닷새 만에 전쟁이 터진다. 얼마 뒤 피난지 임시 천막 대학에 등록도 해보나 끝내 그는 대학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 더구나 전란중에 그의 오빠와 숙부가 죽고, 고향 땅은 북한 영토가 되어버린다. 졸지에 어머니를 비롯해 올케와 연년생 어린 조카들의 생계를 떠맡게 된 박완서는 동화백화점 자리에 있던 미8군의 초상화부에 취직을 한다. 거기서 그는 박수근(朴壽根) 화백과 만나고, 뒷날 등단작이 되는 「나목(裸木)」의 영감을 얻는다. 그는 휴전 직후인 1953년 결혼하고 이어 네 딸과 외아들을 낳아 키우느라 문학과 멀어진다.

1987년 외아들의 서울의대 졸업식장에서

가운데가 남편. 박완서는 나중에 이 두 사람을 모두 잃는다.

ⓒ 시공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 예술가가, 모든 예술가들이 대구, 부산, 제주 등지에서 미치고 환장하지 않으면, 독한 술로라도 정신을 흐려놓지 않으면 견디어낼 수 없었던 1·4후퇴의 암담한 불안의 시기를 텅 빈 최전방 도시인 서울에서 미치지도, 환장하지도, 술 취하지도, 화필도 놓지 않고, 가족의 부양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 살았나, 생각하기 따라서는 지극히 예술가답지 않은 한 예술가의 삶의 모습을 증언하고 싶은 생각을 단념할 수는 없었다.
박완서, 『나목』(작가정신, 1990) 후기

박완서는 마흔 살 나던 해인 1970년에 느닷없이 전쟁 직후 미군 부대에서 만난 화가 박수근의 얘기를 장편 소설로 빚어낸 「나목」을 『여성동아』의 여류 장편 소설 공모에 보내 당선한다. 느지막이 작가로 나선 그는 뒤늦은 출발을 벌충이라도 하듯이 왕성한 창작욕을 분출하며 문제작을 잇달아 내놓아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는다.

1976년 박완서는 ‘일지사’에서 첫 번째 창작집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를 펴낸다. 이를 시작으로 그는 거침없고 뛰어난 이야기꾼의 솜씨로 장편 소설 『휘청거리는 오후』(1977) · 『창밖은 봄』(1977), 창작집 『배반의 여름』(1978), 장편 소설 『목마른 계절』(1978) · 『도시의 흉년』(1979) · 『욕망의 응달』(1979) · 『살아 있는 날의 시작』(1980), 창작집 『엄마의 말뚝』(1982), 장편 소설 『오만과 몽상』(1982) ·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1983) · 『서 있는 여자』(1985), 창작집 『꽃을 찾아서』(1986), 장편 소설 『미망(未忘)』(1990) ·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1990) · 『그 많던 싱아는 다 어디로 갔을까』(1993) ·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1995), 창작집 『너무도 쓸쓸한 당신』(1998) 등을 쉬지 않고 쏟아낸다. 박완서는 놀랄 만큼 다작(多作)의 작가이지만, 그 다작이 문학성을 묽게 만드는 일은 거의 없다.

    • 1〈서 있는 여자〉와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가부장제 사회의 일상 생활 속에 퍼져 있는 여성 억압의 구조를 꿰뚫어보고 그것과 맞서는 여성 전사들을 내세운 박완서의 소설들

    • 21998년에 낸 창작집 〈너무도 쓸쓸한 당신〉

박완서 초기 소설의 주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전쟁과 분단으로 말미암은 가족사적 불행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나목」을 비롯한 소설, 1960년대 이후 등장하는 중산층의 물욕과 허위 의식을 비판적 시각으로 그려낸 소설, 그리고 여성의 정체성 찾기, 즉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억압을 파헤치며 여성 문제에 대해 첨예한 인식을 보여주는 소설이 그것이다.

박완서 소설의 첫 번째 줄기는 오빠와 숙부를 앗아 간, 그래서 그의 삶을 부성 부재의 삶에 빠뜨린 6·25 또는 분단 체험을 다룬 작품들이다. 등단작인 「나목」을 비롯해 「목마른 계절」 ·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 · 「부처님 근처」 ·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 「카메라와 워커」 · 「엄마의 말뚝」 ·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 등이 그것이다. 작가에게 그 체험은 “원점 같은 악몽”의 체험이고, 그의 내면을 씻을 길 없는 원죄 의식으로 물들인다. 작가는 자신의 체험이 짙게 반영된 「목마른 계절」에서 한 작중 인물의 입을 빌려 그 “끔찍한 체험”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동족간의 전쟁의 잔학상은 그대로 알려져야 된다고 나는 생각해요. 특히 오빠의 죽음을 닮은 숱한 젊음의 개죽음들, 빨갱이라는 손가락질 한 번으로 저 세상으로 간 목숨, 반동이라는 고발로 산 채로 파묻힌 죽음, 재판 없는 즉결 처분, 혈육간의 총질, 친족간의 고발, 친우간의 배신이 만들어낸 무더기의 죽음들, 동족간의 이념의 싸움 아니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이런 끔찍한 일들은 고스란히 오래 기억돼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요. ······ 오빠의 죽음의 경우 같은 참혹의 기억, 학살의 통계, 어머니의 경우 같은 후유증, 이런 것만이 전쟁을 미리 막아보려는 노력과 인내의 밑바탕이 될 수 있을 거예요. 툭하면 ‘자유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면’, 저쪽에선 ‘수령이나 사회주의 낙원을 위해서라면’ 일전도 불사할 결의를 보여야만 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치졸한 애국 애족에서 깨어나 좀더 깊이 생각하게 될 거예요. 결국 이데올로기라는 것도 사람을 잘살게 하기 위해 만들어낸 거지 이데올로기 나고 사람 난 건 아니잖나 하고.
박완서, 「목마른 계절」, 『제3세대 한국 문학 ― 박완서』(삼성출판사, 1983)

특히 「엄마의 말뚝」은 첫 번째 계열에 속한 작품으로 1981년 백철 · 김동리 · 최정희 · 유주현 · 김용직 · 김윤식 · 김화영 · 이상섭 등의 심사 위원들에 의해 ‘이상 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되며, “가족사의 특수성”을 “이 민족과 이 시대의 특수성”의 맥락 속에서 천의 무봉의 솜씨로 그려낸 분단 문학의 수작으로 평가를 받는다.

북쪽에 고향을 둔 한 가족사의 특수성을 이 민족과 이 시대의 특수성에서 유려하게 파악함으로써, 소설 속의 인물의 특성을 시대적 특성으로 이끌어냄으로써 높은 수준의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이 작가의 유려한 문체와 빈틈없는 언어 구사는 가히 천의 무봉이라 할 만한 것으로 우리 소설사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인정된다. 개인과 민족의 관계가 오직 가족사 속에서 깊게 파악됨으로써 추상적이기 쉬운 분단 문제가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음은 이 작가의 삶을 바라보는 눈과 그것을 형상화하는 작가의 능력이 함께 높은 경지임을 말해주는 것이어서, 이에 본 심사 위원들은 이 뛰어난 작가의 작품에 제5회 이상 문학상을 수여할 것을 결정한다.

분단 문학은 1980년대에 들어서며 우리 문학의 중요한 영역으로 자리잡는다. 작가는 ‘이상 문학상’ 수상 소감을 통해 “분단된 상처를 쥐어뜯어 괴롭게 피흘리”는 고통에 대해 말한다. 「엄마의 말뚝」은 굳은 딱지가 앉은 분단의 상처를 가족 단위의 체험을 바탕으로 현재의 것으로 보여준 소설임을 털어놓고 있는 것이다.

우리 겨레의 분단은 이제는 하나의 기정 사실입니다. 분단은 오래 전에 피흘리기를 멈추고 굳은 딱지가 되었고 통일을 꿈꾸지 않은 지도 오래된 것처럼 보입니다. 통일이란 말이 도처에 범람하고 있습니다만 산 채 분단된 자의 애절한 꿈으로서가 아니라 그것을 직업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구호로써 행세하고 있을 뿐입니다. 통일이 직업인 사람은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구호를 만들어내어 분단을 치장하면 되겠지만 진실로 통일이 꿈인 사람은 끊임없이 분단된 상처를 쥐어뜯어 괴롭게 피흘리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박완서, 「이상 문학상 수상 소감」, 『엄마의 말뚝』(문학사상사, 1981)
1981년 이상 문학상 시상식장에서

ⓒ 시공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박완서 소설의 또다른 줄기는 1970년대 이래 우리 사회를 뒤덮은 물질 만능주의 사고, 특히 중산층의 밑도 끝도 없는 물욕, 허위 의식, 천박스러움, 허영심, 도박 심리, 한탕주의, 간교함을 끈덕지고 앙칼지게 물고 늘어지며 비판적 시각으로 까발린 작품들이다. 이 계열의 소설을 대표하는 것으로는 「지렁이 울음 소리」 · 「닮은 방들」 · 「휘청거리는 오후」 등이 있다. 1970년대 이래 도시 중산층의 물질적 생활 수준은 눈에 띄게 나아지나, 그 내면은 더욱 황폐해지고 조잡스러워지는데, 작가는 활력이 넘치는 능변의 문체로 이와 같은 현상을 실감나게 그려낸다. 이런 세태 비판 소설을 통해 작가는 도덕적 타락의 징후를 보이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뛰어나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박완서 소설의 문제 의식은 결혼과 이혼 등을 기둥 줄거리로 여성 문제를 다룬 작품들에서 가장 날카롭게 드러난다. 박완서만큼 여성의 삶에 대해 예민한 감수성과 집요한 관찰력을 보여주는 작가를 찾기란 쉽지 않다. 작가의 사실 묘사의 문체는 여성의 삶이 처해 있는 현실을 꿰뚫어보고 그것을 거침없이 파헤치고 야유하며 끔찍하리만큼 생생하게 그려낼 때 더욱 빛을 발한다. 작가가 그려내는 한심스럽고 궁상맞으며 좀스럽기조차 한 여성들의 이야기는 곧 여성들의 역사다. 그래서 비평가들이 자주 여성 해방의 시각에서 박완서의 작품 세계를 논의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살아 있는 날의 시작』(1980) · 『서 있는 여자』(1985) ·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1989)의 주인공들인 문청희 · 연지 · 차문경은 한결같이 이혼 여성이며, 그들에게 이혼은 여성 억압적이며 불평등한 남녀 관계를 청산하는 불가피한 해결 방법으로 제시된다. 그들은 가부장제 사회의 일상 속에 퍼져 있는 여성 억압 구조를 꿰뚫어보고 이 문제와 당당하게 맞서는 여성 전사(女性戰士)들이다.

이 세 소설들은 모두 한국 사회에서 여성들이 겪고 있는 억압의 다양한 양상을 예리한 시각으로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다. 작가는 가족 · 일 · 성 관계를 포괄하는 여성 삶의 전체 영역에서 그들을 짓누르는 핵심적 요인들을 가능한 한 샅샅이 집어내 보이고 싶었던 것 같다. 그가 원하든 원치 않든 그는 여성 해방 문학의 작가로 불리지 않을 수 없다.
박혜란, 「‘여자다움’의 껍질벗기」, 『작가세계』(1991 봄)

『살아 있는 날의 시작』

문청희는 지방 대학 교수인 남편과 연애 결혼을 해 20년 동안 가정을 충실하게 건사하며 살아온 주부이자, 미용실을 운영하는 한편 저소득층 여성들의 경제 자립을 돕기 위해 미용 학원을 차린 여성이다. 1남 1녀의 어머니이며 20여 년 동안 시어머니를 모셔온 청희가 결혼 생활에서 꿈꾸는 것은 부부 사이의 진정한 화합이다. 그것은 두 남녀의 평등한 관계 속에서 실현될 수 있는 것이지만, 문청희 부부는 지배 / 피지배 관계의 구도를 벗어나지 못한다. 20여 년의 결혼 생활에 대해 청희는 “무참하게 유린당했다는 느낌, 교묘하게 기만당했다는 느낌”을 떨쳐내지 못한다. “그 여자는 누구나 거침없이 똑바로 바라보는 성질이었지만 인철이한테만은 그러지를 못했다. 그 여자는 눈을 내리깔았다. 무력한 노여움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그러나 꾹 참고 다소곳했다.”는 문장이 말해주고 있는 것은 가부장제 사회의 질서에 길들여진 여자의 공연히 주눅든 모습이다.

남편은 집안일과 바깥일을 조화롭게 해내는 아내에 대해 사소한 일을 빌미로 트집잡고 비아냥대며 자주 군림하려고 든다. 그럴 때마다 여자는 속에서 “무력한 노여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지만 굴욕감을 견디며 “다소곳”하게 사는 것이다. 남편은 가부장제 사회가 의식 속에 심어준 ‘남자다움’ 이데올로기의 신봉자다. “그는 남자답다는 걸 좋아했다. 거의 신봉하고 있었다. 그가 신봉하는 ‘남자다움’에는 아내와의 약속 시간은 희미하게 기억한다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들 사이의 모든 소유 관계가 명백하고도 당연하게 그의 것도 그의 것, 아내의 것도 그의 것이었던 것처럼 아내의 시간 역시 그에게 속했다. 아내만의 시간이란 걸 그는 ‘의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가 숨진 뒤 홀로 남은 친정어머니를 모셔다가 병구완을 하는 사이에 남편은 집안일을 도우라고 들인 소녀와 강제로 성 관계를 가진다. 이 때문에 파생된 복잡한 사태를 담담하게 수습한 청희는 남편에게 강력히 이혼을 요구한다. 그 이혼 요구는 구조화된 불평등 관계를 청산하기 위한 요구이며,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로부터 해방을 선언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서 있는 여자』

연지와 경숙 여사는 모녀 사이다. 연지는 대학 졸업 뒤 잡지사 기자로 일하는 적극적인 20대 여성이고, 경숙 여사는 대학 교수를 남편으로 둔 평범한 중년 여성이다. 연지는 고등 학교 시절 부모의 불평등한 관계에서 여성의 굴종적인 삶을 보고 “어머니에게서 추악한 것의 극단을, 아버지에게서 아름다운 것의 극단”을 느낀다. 그리고 “나도 아버지처럼 살게 하소서. 어머니처럼 살게 될진대 차라리 죽게 하소서.”라는 소망을 품는다. 여성의 삶을 추악한 것으로 여기고 당당한 남성적 영역에서 자아를 실현하고 싶어하던 연지는 평등한 결혼 생활과 주체적 삶의 실현을 위해 대학 동창생이자 친구 사이인 철민과 결혼한다. 두 사람의 신혼 생활은 평등 관계 위에서 시작되는 듯하나 얼마 가지 않아 그 평등 관계에 균열이 생긴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너그럽고, 겸손하고, 남자가 기고 만장할 땐 애교부리고 응석부려 그 기분을 고조시켜주고, 남자가 의기 소침했을 때는 지혜로운 격려와 꽁꽁 뭉쳐놓은 비상금으로 재기할 수 있는 용기를 주고, 남자가 집에 있을 동안만이라도 철저하게 왕이나 승리자의 환상을 가질 수 있도록 시녀나 패자 연기에도 능한 여자, 음식 잘하는 여자, 섹시한 여자, 돈 적게 들이고 옷 잘입는 여자 등등” 철민이 열거하는 ‘여자다움’의 세목들은 곧 가부장제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상이다. 결국 일과 임신 그리고 인간 관계에서 비롯된 여러 가지 갈등을 겪으며 주체적 삶의 실현을 위해서는 불평등한 결혼 관계를 청산해야 한다는 생각을 굳힌 연지는 단호히 철민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6년 동안이나 남편으로부터 성적 소외를 당해온 경숙 여사는 하필이면 딸의 약혼식 날 남편으로부터 이혼 통고를 받고 당황한다. 제 몫의 삶은 없고 오로지 하석태의 ‘아내’로서 살아온 그에게 이혼은 삶의 기반으로부터 송두리째 뿌리가 뽑히는 절체 절명의 위기일 뿐이다. 경숙 여사는 남편의 기세 등등한 태도에 밀려 마음을 정리하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경숙 여사는 이혼한 친구들의 삶에서 본 부정적인 측면만 떠올린 나머지 이혼은 곧 삶의 실패라는 생각을 더욱 굳힌다. 이에 따라 경숙 여사는 남편에게 따로 잘못한 것도 없이 무조건 용서를 구하고 결혼 생활의 유지에 매달린다. 결국 철저하게 남편의 삶에 예속된 ‘아내’의 자리를 되찾은 경숙 여사는 ‘불행한 삶’이 예정된 이혼을 스스로 택하는 딸을 끝내 이해하지 못한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차문경은 외국에 나간 남편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이혼을 당하고 혼자 살아가는 서른다섯 살 된 이혼녀다. 초등 학교 교사이기도 한 그는 어느 날 우연히 아내와 사별한 대학 동창생 김혁주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김혁주와 성 관계를 가져 임신을 하게 된 차문경은, 가부장제 성 문화 속에서 남자에게는 별다른 책임을 묻지 않는 데 반해, 몸을 함부로 굴린 여자라는 손가락질을 받는다. 뒤늦게 임신 사실을 안 문경은 혁주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만, 혁주는 그 아이를 자신의 친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 냉정하게 잘라버린다.

차문경을 외면한 김혁주는 남자에게 순종적이고 미모에 재력까지 고루 갖춘 다른 여성 애숙과 중매 결혼한다. 김혁주가 애숙에게 기울게 된 결정적 계기는 알고 보면 돈이다. 문경은 좀처럼 혁주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하지만, 혁주가 문경의 교사라는 직업을 ‘선생질’이라고 경멸하자 모욕감과 함께 분노를 느낀다. “그 여자를 결정적으로 견딜 수 없게 한 것은 인간적인 모욕보다는 직업에 대한 모욕이었다. 그 여자는 자신의 직업을 존중하고 사랑했다. 직업은 여지껏 그 여자의 떳떳한 자립을 보장해줬을 뿐 아니라 자존심의 근거가 돼주었다. 그건 남이 알아주고 안 알아주고를 떠난 그 여자 스스로의 가치관의 문제였다.”

혼인 관계가 아닌 남자와 상대해 아이를 낳은 문경은 교육자로서 도덕성이 문제시되어 교사 자리를 잃고 만다. 문경은 반찬 가게를 차려 생계를 꾸리게 되는데, 어느 날 그에게 혁주가 찾아온다. 혁주는 아내가 아들을 낳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자 해결책으로 문경이 낳은 아들을 빼앗아 가려고 한다. 양육권 다툼은 끝내 법정으로 번지고, 경제력을 비롯해 여러 모로 혁주보다 조건이 불리한 문경은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함으로써 아들을 키울 수 있게 된다. 문경은 어린 아들을 “남자로 태어났으면 마땅히 여자를 이용하고 짓밟고 능멸해도 된다는 그 천부의 권리로부터 자유로운 신종 남자로 키우”겠다고 마음먹는다.

박완서는 1981년의 ‘이상 문학상’ 외에도 ‘한국 문학 작가상’(1980) · ‘대한민국 문학상’(1990) · ‘이산 문학상’(1991) 등 많은 상을 받는다. 이런 수상 경력이 말해주듯이 그는 이미 우리 시대의 뛰어난 이야기꾼으로 공증된 “대형 작가”다. 그는 개인사와 역사를 아우르며 분단 문제부터 사회 문제와 여성 문제에 이르기까지 깊은 통찰력을 발휘하며 폭넓은 작품 세계를 펼쳐온 우리 시대의 대표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특히 여성 문제를 다룬 박완서의 소설은 남성 지배의 역사가 강요한 죽음의 침묵을 뚫고 솟아오르는 여성의 “울음이자 노래”다. 그의 소설은 “직접 · 간접적인 침묵에의 강요와 회유”를 뚫고 나오는 “잡담하기, 수다 떨기, 울기, 웃기, 곡하기, 염불 외기, 비명지르기, 신음하기, 딸꾹질하기, 주정하기, 도리질하기”다.각주4)

1980년 한국 문학 작가상을 받은 뒤 동료 작가 한말숙(오른쪽)과 함께

ⓒ 시공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사건의 개요

  • ・ 하응백, 「모성, 그 생명과 평화」, 『낮은 목소리의 비평』, 문학과지성사, 1999
  • ・ 황도경, 「생존의 말, 생명의 몸」, 『우리 시대의 여성 작가』, 문학과지성사, 1999
  • ・ 박혜란, 「여자다움의 껍질벗기」, 『작가세계』 1991 봄
  • ・ 조혜정, 「박완서 문학에 있어 비평이란 무엇인가」, 『작가세계』 1991 봄
  • ・ 「박완서 특집」, 『작가세계』 1991 봄
  • ・ 『박완서 문학 앨범』, 웅진출판사, 1992

장석주 집필자 소개

1979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문학평론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고려원’의 편집장을 거쳐 ‘청하’ 출판사를 설립해 13년 동안 편집자 겸 발행인으로 일했다. 그 뒤 동덕여..펼쳐보기

출처

20세기 한국 문학의 탐험 4
20세기 한국 문학의 탐험 4 | 저자장석주 | cp명시공사 도서 소개

문학작품을 바탕으로 1900년부터 2000년까지 20세기 한국사의 큰 흐름과 한국인의 생활사, 문화사의 궤적을 함께 추적한다. 20세기를 연도별로 나눠 매년 그해에 일..펼쳐보기

전체목차
1980년대 한국문학 1980년의 한국문학 1981년의 한국문학 1982년의 한국문학 1983년의 한국문학 1984년의 한국문학 1985년의 한국문학 1986년의 한국문학 1987년의 한국문학 1988년의 한국문학 1989년의 한국문학
전체목차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한국문학

한국문학과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문학상 수상자

추천항목


[Daum백과] 박완서20세기 한국 문학의 탐험 4, 장석주, 시공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