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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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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1월 24일, 명동 위장 결혼식 사건
1979년 10월 26일 밤, 현직 대통령 박정희가 심복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진다. 박정희가 죽은 뒤 희망과 환멸이 엇갈리는 뒤숭숭한 날들이 이어진다. 국무 총리이던 최규하가 대통령직을 물려받지만, 나라의 앞날은 누구도 제대로 내다볼 수 없을 만큼 혼미를 거듭한다. 아직 전국에 비상 계엄령이 내려져 있고, 한편에서는 유신 헌법과 긴급 조치를 철폐하고 정치범을 석방하라는 목소리도 울려 퍼진다. 이즈음 재야의 여러 인사 앞으로 1979년 11월 24일 토요일 오후 명동 YWCA회관에서 열리는 결혼식 청첩장이 배달된다. 그런데 이 행사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해직교수협의회’의 구성원과 제적 학생 등 천여 명이 모여 유신 정부와 그 잔당 퇴진 및 거국 내각 조직을 요구하는 집회를 갖기 위한 위장 결혼식으로 밝혀진다.
1975년 『동아일보』 신춘 문예를 통해 탐미주의 경향이 뚜렷한 단편 소설 「아버지」로 등단한 현기영(玄基榮, 1941~ )은 바로 그 얼마 전에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온 첫 번째 창작집 『순이(順伊) 삼촌』 몇 권을 갖고 이 집회에 참석한다. 그는 고향 출신 후배들인 친목회 회원들에게 전하기 위해 창작집 몇 권을 들고 행사장에 찾아간 것이다. 이 친목회는 제주사회문제협의회의 모체가 된다. 결혼식으로 위장한 이날의 집회는 반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경찰 진압대가 들이닥치고, 대회장 안으로 난입해 마구 휘젓고 다니는 연행조 때문에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린다. 경찰의 호송 차량 두 대는 강제 연행된 사람들로 금세 가득 찬다.
이틀 뒤인 11월 26일, 계엄사는 YWCA회관 결혼식 위장 집회 사건과 관련해 함석헌 · 박종태 · 양순직 · 김병걸 등 96명을 포고령 위반으로 검거해 조사중이라고 발표한다. 바로 이날, 현기영은 재직중인 서울사대부고에 출근해 수업을 하러 들어가는 길에 교실 앞 복도에서 성동경찰서로 붙잡혀 간다. 며칠 뒤 그는 검정색 승용차에 실려 남산 중앙정보부로 갔다가 보안사의 악명 높은 서빙고동 합동수사본부에 인계된다.
그는 곧바로 군복으로 갈아 입혀진 뒤 꼬박 2박 3일 동안 고문과 육체적 학대를 당한다. 작가는 뒷날 이 때 경험한 고통을 소설 속에 “아, 이 고통스러운 육체를 벗어버릴 수만 있다면! 정신을 배반하는 육체, 제 몸이 이렇게 저주스러울 줄이야.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차라리 죽을 수만 있다면!”이라고 새겨 넣는다. 큰 곤욕을 치른 그는 구류 20일 처분을 받고 풀려나지만, 1980년 8월 중순에 또 한 차례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는다. 그리고 『순이 삼촌』은 곧바로 당국에 의해 판금 조치되어 전국의 서점에서 자취를 감춘다.
「순이 삼촌」
폐병으로 죽은 어머니와 일본으로 밀항한 아버지 때문에 일곱 살 때 고아 아닌 고아가 된 ‘나’는 큰아버지 밑에서 사촌과 함께 자란다. 이후 ‘나’는 고향 제주도를 떠나 뭍으로 건너와 공부하고 직장을 얻는다. 어느 날, 가족 묘지 매입 문제로 상의할 게 있으니 할아버지 제삿날에 맞춰 내려오라는 큰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나’는 고향 제주도 서촌으로 간다. ‘나’는 친척 중에서 순이 삼촌이 눈에 띄지 않아 의아하게 여긴다. 순이 삼촌은 먼 친척 뻘로서, 1년 동안 ‘나’의 서울 집에서 살림을 돌봐주다가, 불과 두 달 전에 고향으로 내려간 여인이다. 이 고장에서는 촌수를 따지기 어려운 먼 친척 어른이면, 남녀 구별 없이 삼촌이라고 부른다.
‘나’는 여드레 전쯤에 순이 삼촌이 자신의 밭에서 자살했다는 뜻밖의 얘기를 듣고 놀란다. 외동딸을 시집보낸 뒤 혼자 살던 그가 며칠째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도로변에 있는 자신의 밭에서 죽은 채 발견된 것이다. 주검이 부패된 정도로 봐서 20일은 족히 되어 보이더라는 얘기.
이런 얘기를 듣고 있던 ‘나’는 혹시라도 순이 삼촌의 죽음이 ‘나’와 무슨 연관이 있지나 않을까 하고 슬그머니 가책에 빠져든다. 순이 삼촌은 얼마 전 서울 ‘내’ 집에 와서 1년 정도를 함께 지내며 가사 노동을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다. 순이 삼촌은 서울에서 머무는 동안 아무도 탓하지 않는데도 밥을 많이 먹어 사람들이 자신을 흉본다고 노여워하고, 공원에 놀러 가서 사진을 찍어주면 구태여 사진 값을 자신이 치르겠다고 우긴다. 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겪으며 ‘나’는 애꿎은 아내를 탓하게 되어 직장에 다니는 아내와 심하게 다투기도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시골에서 올라온 순이 삼촌의 사위가 하는 얘기를 듣고는, 그의 이런 기행이 모두 과거의 충격에서 비롯된 신경 쇠약과 환청 증세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던 ‘내’ 앞에 친척 어른들은 30년 전 그 악몽 같은 날의 얘기를 펼쳐놓는다. 당시 제주도는 좌익의 활동에 힘입어 5·10 단독 선거를 무마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직접적으로 그 일과 관련이 없는 많은 무고한 주민까지 모진 고초를 겪게 만든다. 낮에는 군경들이 나타나 좌익 분자와 도피자를 색출한다며 마을을 뒤지고, 밤에는 반란을 일으킨 세력이 내려와 저희의 임무에 동조할 것을 요구하며 식량을 빼앗아 간다.
이렇게 양쪽으로부터 시달리게 되자 젊은 남자 가운데 일부는 뭍으로 피신하거나 일본으로 가는 밀항선을 타는데, ‘나’의 아버지 또한 이런 경우였다. 이도 저도 못 하고 마을에 남은 젊은 남자들은 낮에는 한라산 기슭의 동굴로 피신했다가 밤에 내려오거나, 아낙네들이 그 곳으로 먹을 것과 이부자리를 날라줘 하루하루 버티는 힘겨운 생활을 한다. 순이 삼촌과 그의 남편은 이런 부류였다. 그런데 이렇게 반란 세력과 군경을 피해 산으로 피난한 양민을 당국은 좌익 사상자로 간주한다. 군경은 반란 세력이 발붙일 근거를 없앤다는 명목으로 무고한 양민을 무차별 학살한다.
마을에 아녀자와 노인들만 남아 있던 그날 점심께의 일이다. 무장 군인들은 마을 사람 전원을 초등 학교 운동장으로 모이게 한다. 잠시 뒤 군경은 운동장에 모인 마을 사람 가운데 군인과 경찰, 공무원 가족을 따로 분류한다. 그 때 ‘나’는 일곱 살이었는데, 매부가 군인이어서 큰아버지 가족과 함께 우익 가족으로 분류되어 목숨을 구한다. 이미 운동장 저 너머 마을은 온통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군경은 우익 가족을 추려낸 뒤 나머지 사람들을 몽둥이와 장대로 위협해 교문 밖으로 내몬다. 교문 밖으로 나가면 곧 죽게 된다는 것을 감지한 주민들은 살려달라고 애원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순이 삼촌과 그의 두 아이도 그 대열에 포함되어 있었다. 양민을 학살하는 총소리는 저물녘까지 이어진다.
군인들이 떠나고, 살아남은 이들은 학교 교실에서 밤을 넘긴다. 그런데 놀랍게도 순이 삼촌이 집단 학살의 주검 더미 속에서 구사 일생으로 살아나 돌아온다. 교실에 들어온 그는 극도의 공포감에 휩싸인 나머지 사람들을 가까이하려 들지 않고, 울지도 않는다.
그 사건 뒤 마을 사람들은 함덕으로 피신했다가 두 달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다. 순이 삼촌은 그 끔찍한 일을 겪은 뒤에도 수시로 경찰에 불려 가서 남편의 행방과 관련해 고문을 받는 등 시달리다가 어느 날 딸을 낳는다. 그리고 자신의 두 아이가 죽은, 아직도 많은 주검이 널려 있는 밭에 들어가 다시 농사를 짓기 시작한다. 이후 30년이 지났는데도 그 밭에서는 납 탄환과 그날 죽은 사람들의 뼈가 발견된다. 순이 삼촌은 그 죽음의 환청 속에서 30년 세월을 살아온 것이다. ‘나’는 이런 기억의 조각들을 주워 담으며, 순이 삼촌은 한 달 전에 죽은 게 아니라 이미 30년 전 그날 그 사건이 일어났을 때 죽은 거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굳힌다.
현기영은 이미 등단작인 「아버지」에서도 4·3사태를 다룬 바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사태에 대한 적확한 묘사나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비판 의식보다는 소년의 불안 심리를 보여주는 데 치우친 작품이다. 그가 초기에 경도된 서구 모더니즘의 영향이 짙게 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처음에는 문학을 예술로 이해했다. 비록 내가 택한 문학 언어가 시가 아니고 소설이라 할지라도, 내 소설이 시적이고, 개성적이고, 실험적이고, 심미적인 발명품이 되기를 원했다.”라고 자신의 문학적 편력에 대해 털어놓기도 한다. 그러나 「순이 삼촌」에서 작가는 우리 시대를 지배한 반공 이데올로기에 의해 그 진상이 가려져 있던 제주 4·3항쟁의 역사를, 그 참혹한 죽음의 역사를 한 여인의 비극적 인생을 축으로 아주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억울한 죽음을 당한 이 사건의 진상이 오래도록 밝혀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나 누가 뭐래도 그건 명백한 죄악이었다. 그런데도 그 죄악은 30년 동안 여태 단 한번도 고발되어 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가 그건 엄두도 안 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군 지휘관이나 경찰 간부가 아직도 권력 주변에 머문 채 아직 떨어져나가지 않았으리라고 섬 사람들은 믿고 있기 때문이다. 섣불리 들고 나왔다간 빨갱이로 몰릴 것이 두려웠다. 고발할 용기는커녕 합동 위령제 한번 떳떳이 지낼 뱃심조차 없었다. 하도 무섭게 당했던 그들인지라 지레 겁을 먹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결코 고발이나 보복이 아니었다. 다만 합동 위령제를 한번 떳떳하게 올리고 위령비를 세워 억울한 죽음들을 진혼하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가해자가 쉬쉬해서 30년 동안 각자의 어두운 가슴 속에서만 갇힌 채 한번도 떳떳하게 햇빛을 못본 원혼들이 해코지할까봐 두려웠다.현기영, 「순이 삼촌」, 『순이 삼촌』(창작과비평사, 1979)
「순이 삼촌」에서 젊은 세대에 속하는 ‘나’와 사촌형은 그 사건의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때때로 망령처럼 무고한 사람들을 덮쳐 부당한 혐의로 심신을 피폐시키는 현재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중 어른인 큰당숙이나 고모부 세대에 의해 젊은 세대의 의지는 억눌린다. 전쟁이란 다 그런 것이며,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라는 것이 그들의 충고다. ‘나’와 사촌형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분노와 증오다. 이들은 “그걸 역사의 금기로 묶어두면 둘수록 역사는 다시 그 전철을 되풀이할 뿐 한치도 발전하지 못한다.”는 신념을 가진 작가를 대변하는 존재다. 그러나 현기영은 「순이 삼촌」에서 과거의 상황에 대한 사실적 묘사와 젊은 세대가 어른들에게 대드는 정도의 소극적 저항만을 보여주는 데 그친다. 그것이 글쓴이의 한계이든, 작품 발표 당시의 갖가지 억압 상황 때문이든, 「순이 삼촌」에서 작가는 사회나 역사와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사건이 일어나게 된 근본 동기까지 파헤치지는 못한다.
현기영은 1941년 제주읍에서 한참 떨어진 노형리 함박이굴에서 한 농가의 맏아들로 태어난다. 그는 1947년 노형국민학교에 입학하지만 3·1운동 기념 집회 발포 사건으로 일어난 시위를 주동한 좌익 검거 바람 때문에 제주도 전체가 혼란에 빠지게 되어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다. 이듬해인 1948년에 들어, 4·3사태 발발 직전 가족이 모두 제주읍으로 피난함으로써, 현기영은 북국민학교에 재입학한다. 어린 시절에 본 숱한 살상과 굶주림의 실상, 그리고 제주도 전체를 뒤덮은 공포 체험은 이후 그의 세계관과 문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1954년 오현중학교에 입학한 현기영은 몇 차례 교내외 백일장에 나가면서 막연하나마 글쓰기에 대해 동경을 품게 된다. 1957년 오현고등학교에 입학한 뒤에는 문학과 철학 서적들을 탐독하며 실존주의에 빠지기도 하고, 선배 현길언이 있던 학내 문학 서클 ‘석좌’에 가입해 “객적은 언어 유희와 방만한 낭만주의”적 분위기에 젖은 채 학창 시절을 지낸다. 현기영은 196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 불어교육과에 입학하게 된다. 배삯만 달랑 들고 서울로 올라온 그는 자취나 하숙 생활을 하는 고향 친구들에게 얹혀 지낸다. 이듬해인 1962년 그는 체질에 맞지 않는 가정 교사 노릇을 관둘 요량으로 해병대에 자원 입대한다. 1964년 제대한 뒤에는 전공을 영어교육과로 바꿔 복학한다. 그는 같은 해 『대학신문』 현상 문예 공모에 단편 「산정을 향하여」로 가작 입선하게 된다.
1967년 사범 대학을 졸업한 그는 서울 광산중학교로 발령을 받는다. 1970년에 들어 서울사대부중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틈틈이 독서와 습작에 몰두한다. 현기영은 1975년 『동아일보』 신춘 문예에 4·3사태 때 ‘폭도’에 가담한 아버지를 둔 주인공 소년의 불안한 심리를 그린 단편 「아버지」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온다. 작가의 길로 나선 현기영은 유신 체제와 뒤이은 신군부 세력의 압제와 부딪치면서 자신의 무의식 속에 가라앉아 있던 제주 4·3항쟁을 떠올린다. 이윽고 그는 「도령마루의 까마귀」 · 「해룡(海龍) 이야기」 · 「순이 삼촌」 등 제주 4·3사태를 다룬 일련의 소설을 내놓으며 문단의 주목을 받는다. 그의 소설은 억울한 죽음을 당한 뒤 아직도 한을 풀지 못한 채 땅에 묻혀 있는 제주도의 원혼들을 달래는 진혼굿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제주도를 휩쓴 두 민란, 즉 1889년의 ‘방성칠의 난’과 1901년의 ‘이재수의 난’을 소재로 장편 『변방에 우짖는 새』(1983)를 내놓는가 하면, 1948년에 일어나는 4·3항쟁의 전사에 해당하는 1932년의 제주도 잠녀 투쟁을 그린 또 하나의 장편 『바람 타는 섬』(1989년)을 선보이기도 한다. 현기영이 1970년대에 시작한 제주도 4·3사태의 문학적 형상화를 이마적까지 계속하는 이유는 “저승에 안착하지 못한 원혼들을 음습한 금기의 영역에서 대명 천지의 밝은 태양 아래 불러내어 공개적으로 달래주”기 위한 것이다.
- 1방성칠의 난과 이재수의 난을 소재로 한 장편 〈변방에 우짖는 새〉
- 21932년의 제주도 잠녀 투쟁을 그린 장편 〈바람 타는 섬〉
1990년대에 들어 가벼운 문학이 문단을 휩쓰는 분위기 속에서도 현기영은 여전히 시류에 맞서 “오연한 거역의 자세”(염무웅)를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1986년 두 번째 창작집 『아스팔트』를 간행한 데 이어 그는 1994년 세 번째 창작집 『마지막 테우리』를 펴낸다. 1998년 그는 『실천문학』에 자전 장편 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새로 연재한다. 이런 노력은 그가 ‘신동엽 창작 기금’ 수혜자(1986), 제2회 ‘오영수 문학상’ 수상자(1994)로 결정되며 조금이나마 보상을 받는다.
작가는 망각 속에 방치되거나 역사 속에 암매장된 제주 4·3사태와 해방 전에 제주도에서 일어난 민란이나 항쟁을 줄기차게 소설로 복원하며 민중을 억압하고 민중의 생명을 압살하는 야만의 역사에 대해 저항 의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로써 작가 현기영은 음습한 금기의 습기 속에서 삭아가던 “육지 중앙 정부가 돌보지 않던 머나먼 벽지, 귀양을 떠난 적객(謫客)들이 수륙 2천 리를 가며 천신 만고 끝에 도착하던 유배지” 제주도를 휩쓸고 지나간 민란과 항쟁의 세월 속에 죽어간 무고한 민중의 한과 슬픔으로 얼룩진 역사가 백주의 빛 속에 환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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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김윤식 · 정호웅, 『한국 소설사』, 예하, 1993
- ・ 임헌영 · 김재용 편, 『한국 문학 명작 사전』, 한길사, 1994
- ・ 신승엽, 「고발과 화해 정신을 넘어서서 역사적 현실의 형상화로」, 『순이 삼촌』 해설 · 연보, 동아출판사, 1995
- ・ 「현기영 특집」, 『작가세계』 1998 봄
- ・ 송상일, 「자연적 삶과 역사적 삶」, 『창작과 비평』 1980 봄
- ・ 홍정선, 「제주도 4·3 사건을 보는 세 가지 시각」, 『월간중앙』 1988. 10.
- ・ 김헌선, 「제주도 4·3 문학의 실상과 의의」, 『문학정신』 199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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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작품을 바탕으로 1900년부터 2000년까지 20세기 한국사의 큰 흐름과 한국인의 생활사, 문화사의 궤적을 함께 추적한다. 20세기를 연도별로 나눠 매년 그해에 일..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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