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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사단

다른 표기 언어 興士團

요약 1913년 5월 안창호의 주도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결성된 흥사단은 8도를 대표하는 청년들을 포함한 25인의 발기인으로 발족했다. 무실·역행·충의·용감의 4대 정신을 지도이념으로 하여 일제강점기 국내외에 지부를 설립하고 실력양성운동에 힘썼다. 흥사단은 1920년 상하이에서 흥사단원동위원부를 설치했다. 서울에서는 수양동맹회를, 평양에서는 동우구락부를 결성했는데 두 단체는 1925년 합하여 수양동우회를 결성했으나, 1937년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1945년 12월 흥사단 국내위원부가 발족되었다.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단체등록이 취소되어 활동을 일시 중지했다가 1963년 7월 다시 등록하면서 고등학교·대학생을 대상으로 아카데미 운동을 전개했다. 1969년 8월 사단법인이 되었다.

개요

안창호(安昌浩)의 주도로 만들어졌으며, 무실(務實)·역행(力行)·충의(忠義)·용감(勇敢)의 4대 정신을 지도이념으로 하는 수양단체이다.

일제강점기 국내외에 지부를 설립하여 실력양성운동에 힘썼다.

창립과 일제강점기의 활동

흥사단의 전신은 1909년 2월 국내에서 창립된 청년학우회였다.

흥사단은 1913년 5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강영소(姜永韶)의 집에서 안창호의 주도로 경기도 홍언(洪焉), 강원도 염만석(廉萬石), 충청도 조병옥(趙炳玉), 황해도 민찬호(閔燦鎬), 경상도 송종익(宋鍾翊), 평안도 강영소, 함경도 김종림(金宗林), 전라도 정원도(鄭源道) 등의 8도 대표를 포함한 25명의 발기인에 의해 창립되었다. 흥사단의 목적 조항은 '건전인격'과 '신성단결'을 위한 '무실역행'으로 '우리 민족 전도(前道) 대업의 기초를 준비함'을 표방했다. 그러나 행동강령은 정치운동을 초월하고 기본적인 민족부흥운동으로 발전할 것 등으로 결의했다.

흥사단은 첫 사업으로 동맹수련과 동맹저축을 실시하고, 1914년 10월에는 〈흥사단보〉를 발간했다. 1915년에는 사기앙양과 정서표현을 위한 문학적 창작활동의 방편으로 〈흥사단단기가〉를 발간했다. 미국 내에서만 활동하던 흥사단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됨에 따라 1920년 봄 상하이[上海]에서 흥사단원동위원부(興士團遠東委員部)를 설치하고, 이후 미국 본부와 국내와의 연락을 담당했다. 원동위원부는 1924년 미국 유학을 꿈꾸는 한국 학생들에게 어학준비를 시키기 위해 난징[南京]에 동명학원(東明學院)을 세웠다.

흥사단은 국내에도 조직사업을 펼쳐 서울에서 수양동맹회(修養同盟會)를 조직했고, 1923년 1월 평양에서는 대성학교(大成學敎) 출신을 중심으로 동우구락부(同友俱樂部)를 결성했다. 새로 조직된 두 단체는 흥사단의 합법적 표면단체로서 '인격수양과 민족문화 건설로서 우리 민족 신문화 건설의 기초를 기함'이라는 사업목적을 내세웠다. 두 단체는 1925년 10월 안창호의 권유로 합동하여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를 결성했다.

1926년 수양동우회를 정치적 결사로 개조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수양동우회는 국민운동단체로 두고 정치단체는 외부의 저명한 인사들과 합동하여 새로이 만들 것이라는 안창호의 방침을 따랐다. 그해 5월 잡지 〈동광〉을 발간하고 통속교육보급회(通俗敎育普及會)를 설립했으며, 1929년 11월 이름을 동우회(同友會)로 고치고 합법적인 실력양성운동을 벌였으나,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 강제 해산되었다.

그런데 1920년대 안창호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노동총장으로 상하이에 온 뒤로부터 흥사단의 미국 본부는 구심점을 잃고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었고, 원동위원부도 1932년 윤봉길의 폭탄의거로 안창호가 상하이에서 체포되면서 쇠퇴했다. 국내외의 조직이 수난을 당함에 따라 흥사단 본부는 국내의 대동민우회(大同民友會) 관련자 13명에 대한 출단처분을 하는 등의 조치를 통해 단의 혁신을 도모했다.

8·15해방 후 활동

1945년 12월 흥사단 국내위원부가 발족되었고, 1946년 1월에는 위원장에 김윤경(金允慶), 서무원에 주요한(朱耀翰)·박현환(朴賢煥), 재무원으로 김선량(金善亮)을 선임하는 등 부서를 정하여 정식으로 조직활동을 개시했다.

1947년 봄 청년부를 설치하고, 그해 10월 제2차 국내대회를 열어 본부를 미국에서 서울로 옮길 것을 결의했다. 또 그해에 '단은 일체의 정치적 활동에 중립을 지키나 단에 참가한 개인이 정치활동에 참가하는 것은 관여하지 않는다'는 '정치행동에 관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1948년 3월에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를 발기했다.

흥사단은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단체등록이 취소되어 활동을 일시 중지했다가 1963년 7월 다시 등록했다. 그해부터 고등학교·대학생을 대상으로 전개한 아카데미 운동은 10만 여 명의 회원을 배출했다. 1964년 4월부터 기관지 〈기러기〉를 발간했고, 흥사단출판부는 〈도산안창호〉·〈흥사단운동70년사〉 등을 발간했다. 1969년 8월 문교부의 승인을 받아 사단법인으로 설립되었고 전국에 10개의 지부를 두고 있다. 본부는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동숭동에 있다.

안창호(安昌浩)

대한제국의 교육개혁운동가 겸 애국계몽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가이다.

ⓒ Self-portrait/wikipedia |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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