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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407(?), 트란실바니아 후냐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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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456. 8. 11, 베오그라드 |
국적 | 헝가리 |
요약
헝가리의 장군, 헝가리 왕국을 다스린 총독(1446~52).
(영). John Hunyadi(Huniades).
개요
15세기에 투르크군과 싸울 때 헝가리군을 지휘했다.
초기경력
야노슈 후냐디의 이름은 지기스문트 왕이 후냐디 성(지금의 루마니아 후네도아라에 있음)의 소유권을 그의 기사이며 후냐디의 아버지인 보이크에게 넘겨줄 때 쓴 공문서에 처음 언급되어 있다.
이때 후냐디는 아마 어린아이였을 것이다. 그의 가문은 왈라키아(루마니아에 있음) 출신이었다. 왕의 하사 덕분에 후냐디 가문은 헝가리의 하급 귀족(봉건 영주가 아닌 귀족) 가운데서는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40개 마을을 거느린 영지의 소유자가 된 후냐디 가문은 왕실 추밀원 위원으로서 실권을 행사하는 유력한 거물들보다 지위는 훨씬 낮았지만 재산은 그들에 못지 않았던 것 같다.
젊은 야노슈는 그의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대개 갖는 직업에 종사했다. 12명의 기마 전사로 이루어진 부대를 지휘하는 기사로서, 지배계급 중에서도 비교적 유력한 사람들을 섬겼다. 그는 북부 세르비아인의 군주인 스테판 라자레비치와 지기스문트 왕의 가장 훌륭한 군인 가운데 한 사람인 필리포 스콜라리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왕의 궁정에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 그후 국경지방에서 뛰어난 군사 활동으로 이름을 날린 귀족의 딸 에르제베트 실라지와 결혼했다.
젊은 기사는 왕을 수행하여 이탈리아와 그밖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밀라노에서 용병대장 프란체스코 스포르차를 알게 되었고, 이탈리아의 새로운 군사기술을 공부했다. 나중에 보헤미아에서 반란을 일으킨 후스파교도들이 개발한 전투기법을 공부했다.
고국으로 돌아온 후냐디는 헝가리 남부지역에서 가장 훌륭한 전사라는 평판을 얻었다. 아직 고위 공직을 얻지는 못했지만, 50~100명의 무장군인을 지휘하여 점점 거세어지는 투르크인들의 공격에 맞섰다. 그의 승리는 국지적인 중요성밖에 갖지 못했지만 널리 주목을 받았다.
1439년에 투르크 군대가 세르비아를 점령하자, 헝가리에는 투르크군의 침공을 받을 위험이 절박했다. 그래서 후냐디는 투르크군의 공격을 계속 받고 있던 세베린(지금의 루마니아에 있음) 지역의 '반'(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여기서 성공적으로 군대를 지휘했기 때문에 빠르게 진급했고, 땅과 그밖의 소득을 하사받은 것 외에 명예도 한층 높아졌다(오스만 제국). 후냐디는 트란실바니아의 '보이보데'(총독), 테메스(지금의 루마니아 티미슈) 백작, 베오그라드 지구대장, 남부 국경의 모든 방어 체계를 지휘하는 군사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가장 부유하고 유서깊은 봉건 영주 가문과 같은 수준에 이르렀고, 얼마 후에는 그 수준을 능가했다. 그후 몇 년 사이에 투르크군을 헝가리 국경지방에서뿐만 아니라, 이웃한 왈라키아 지방에서도 몰아낼 수 있었다.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독일의 왕 알브레히트 2세는 지기스문트 왕의 사위로 헝가리 왕을 겸했다. 알브레히트가 죽은 뒤 헝가리 왕을 선출하게 되자 후냐디는 투르크에 대한 십자군 원정을 적극적으로 강력하게 지원해주기를 기대하고 젊은 폴란드의 왕 부아디수아프 3세(헝가리의 왕 울라슬로 1세)를 지지했다.
긴 원정
유명한 '긴 원정'은 1443~44년 가을과 겨울에 이루어졌다.
원정을 준비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헝가리의 내분과 합스부르크 왕가의 반대는 교황의 도움으로 가라앉힐 수 있었다. 베네치아와 교황은 후냐디의 군대에 재정적인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외교적인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폴란드와 그밖의 이웃 나라들은 군대를 보내주었고, 헝가리에서는 왕이 십자군 원정을 위해 '임시' 세금을 징수했다. 후냐디는 후스파 전쟁에 참여한 체크인 고참 병사를 포함한 1만~1만 2,000명의 잘 훈련된 병사를 모집했다.
후냐디는 봉건제도에 따라 영주들의 영지에서 소집한 부대가 비효율적이고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유럽의 사령관들 가운데서는 처음으로 대규모 정규군을 고용했다. 투르크가 점령하고 있는 세르비아 영토로 침공한 뒤, 원정군 병력은 통틀어 3만 명을 넘어섰다. 이 연합군은 10월에 도나우 강을 건너 니슈(지금의 유고슬라비아 세르비아 공화국에 있음)와 소피아(지금의 불가리아 수도) 및 요새화한 투르크군 주둔지를 몇 개 점령했다.
후냐디의 부대는 나머지 부대보다 선봉으로 진격하여, 투르크군의 병력 집결을 방해하고 일련의 전투에서 그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했다. 12월에 발칸 산맥에 이르렀지만, 추위와 보급의 어려움 때문에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십자군은 후퇴하면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세르비아·불가리아·알바니아 등지에서 투르크군을 무찌르고, 2월초에 헝가리의 부도로 돌아갔다.
이 원정의 성공은 유럽에서 투르크군과 싸운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세계를 열광시켰다.
투르크의 술탄 무라드 2세는 평화를 호소했다. 그결과 10년 기한의 휴전협정이 맺어졌지만, 술탄이 유럽으로 다시 건너오는 것을 막기 위해 베네치아 함대가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항해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휴전협정은 깨지고 말았다. 7월에 헝가리군은 유럽에 남아 있는 투르크 군대를 밖으로 몰아내기 위한 공세를 시작했다. 그러나 베네치아 함대가 다르다넬스 해협에 도착하지 못하자, 술탄은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해협을 건너 1444년 11월 10일에 바르나에서 병력이 훨씬 적은 그리스도교 부대를 압도했다.
후냐디의 부대는 투르크 기병대를 뿔뿔이 흩어지게 할 수 있었지만, 술탄의 진지를 공격한 울라슬로 왕의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왕은 전사했고 후냐디는 간신히 도망쳤다.
헝가리 총독
울라슬로가 죽은 뒤, 헝가리에는 봉건적인 무정부상태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 상황은 예외적인 조치를 요구했으므로 1446년에 후냐디는 어린 왕 라슬로 포스투무스(헝가리 왕 라슬로 5세)가 성년이 될 때까지 나라를 다스릴 총독으로 선출되었다. 국내에서는 유력한 거물들의 질시가 그를 방해했고 국외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3세가 그를 집요하게 괴롭혔지만, 후냐디는 질서를 회복하고, 투르크에 반격을 가할 수 있도록 나라의 경제적·정치적·군사적 토대를 재건하려고 애썼다. 그는 알바니아의 동맹자들과 미처 접촉하기 전인 1448년에 코소보에서 벌어진 투르크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여전히 왕의 수입을 관리할 권한을 가진 헝가리 왕국의 총사령관 자리를 유지했지만, 이 패배 이후 헝가리에서 그의 영향력은 서서히 저하되었다. 그는 투르크군에 대해 반격을 개시하지 못했고, 콘스탄티노플이 1453년에 투르크의 공격을 받았을 때도 도와주지 못했다.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투르크의 술탄 메메드 2세는 몇 년 뒤 다시 공세를 펼치기 시작하여 1456년에 베오그라드를 포위했다.
후냐디는 베오그라드 요새에 식량과 무기를 공급하고 상당수의 용병을 모집했다. 장비가 빈약하고 누더기를 걸친 농민들도 여기에 가담했다. 훈련받지 못한 이 군대는 후냐디 부대의 도움으로 1456년 7월 22일에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은 투르크와 싸운 역사상 가장 주목할 만한 승리 가운데 하나였다. 이 승리로 포위가 풀렸을 뿐만 아니라 구원군은 사실상 적의 진지 속으로 돌격한 셈이었다. 며칠 뒤 후냐디는 부대 안에서 발생한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
군사적 승리는 활용되지 못한 채 끝났지만, 성과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헝가리가 그후 약 70년 동안 오스만 투르크에 정복당하지 않은 것은 이 승리 덕분이었다.
후냐디는 유럽에서 투르크인들을 몰아내겠다는 동시대 인문주의자들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상당한 성공으로 명성을 얻었다. 천하무적이라는 투르크 육군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빛나는 명성을 얻기에 충분했다. 동시대의 문헌에서 그를 '투르크인들이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사람' 또는 투르크식 표현을 빌려 '전쟁의 번개와 천둥'으로 묘사되었는데, 이는 투르크 병사들이 자신들의 지도자에게도 좀처럼 바치지 않는 찬사였다.
후냐디의 막내 아들은 1458년에 마티아슈 1세로 헝가리 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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