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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지

다른 표기 언어 檜巖寺址

요약 사적 제128호이다. 1313년 이전에 이미 절이 창건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1326년 고려에 온 인도 승려 지공이 창건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1376년 지공의 제자인 나옹이 이 절을 중창했다.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를 이곳에 머물게 했고, 그 자신도 퇴위 후 이곳에서 생활했다. 1472년 세조비인 정희왕후의 명으로 정현조가 중창했고, 명조 때에는 보우를 신임한 문정왕후의 비호로 전국제일의 수선도량이 되었다. 왕후가 죽은 뒤 보우가 처형되고 절도 황폐해졌다. 선조 이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옛 절터 부근에는 1977년 중건한 대웅전·삼성각·영성각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 회암사지선각왕사비(보물 제387호)·회암사지부도(보물 제388호), 회암사지쌍사자석등(보물 제389호) 등이 남아 있다.

회암사지

회암사지부도탑, 경기 유형문화재 제52호, 경기 양주시 회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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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128호. 창건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보우선사의 원증국사탑비(圓證國師塔碑)에 의해 1313년(충숙왕 즉위) 이전에 이미 절이 창건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326년 고려에 온 인도 승려 지공(指空)이 천력연간(1328~29)에 회암사의 절터를 측량했다는 기록으로 인해 지공이 창건했다고도 한다.

1376년(우왕 2) 지공의 제자인 나옹이 삼산양수지기(三山兩水之記)의 비기에서 이곳은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와 지형이 같으므로 가람을 지으면 불법이 크게 흥한다고 하여 이 절을 중창했다. 한편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를 이곳에 머물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퇴위 후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했다.

고려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던 이 절은 대가람이었으며, 1424년(세종 6)에 행해진 선교양종(禪敎兩宗) 폐합 때의 기록으로도 그 규모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472년(성종 3) 세조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명으로 정현조(鄭顯祖)가 중창했고, 명조 때에는 보우를 신임한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비호로 다시 전국제일의 수선도량이 되었다. 왕후가 죽은 뒤 유생들의 탄핵으로 보우가 처형되고 절도 황폐해졌다. 선조 때까지는 기록에 간간이 절의 이름이 보이지만 1818년 재건한 무학대사비에는 폐사되었다고 하므로 선조 이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옛 절터 부근에는 1977년 중건한 대웅전·삼성각·영성각(影聖閣) 등이 있다.

절터에는 중요문화재로 회암사지선각왕사비(보물 제387호)·회암사지부도(보물 제388호), 회암사지쌍사자석등(보물 제389호), 지공선사부도 및 석등(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9호),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호), 무학대사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호), 회암사지부도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2호) 등이 남아 있다.

회암사지부도

회암사지에 있는 조선시대의 부도. 보물 제388호. 높이 270cm. 나옹의 제자인 무학대사의 묘탑으로 지공·나옹선사의 승탑(僧塔)과 나란히 세워져 있다. 부도의 앞에는 쌍사자석등이 있고, 뒤쪽에는 배례석(拜禮石)이 있다. 일반적인 부도와는 달리 잘 다듬어진 8매의 장대석으로 석단을 쌓고 8각의 난간을 돌린 다음 보주 모양으로 꼭대기를 장식한 동자주을 세우고 그 위에 부도를 건립했다. 이러한 석단은 부도를 보호하고 장엄하는 효과도 있을 뿐만 아니라 묘탑의 주인공인 무학대사의 권위를 강조한 것이다.

회암사지

회암사지부도탑 부분, 경기 유형문화재 제52호, 경기 양주시 회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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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대석의 각 면에는 구름무늬[雲紋]를 조각했고, 하대석은 각 모서리에 귀꽃이 있는 16엽의 복판연화무늬[複瓣蓮花紋]로 이루어졌는데 귀꽃 바로 위에는 두꺼비가 앉아 있다. 이와 같이 귀꽃 위에 두꺼비가 조각된 예는 없으며 이 시기에 새로이 등장한 장식요소이다. 배가 약간 부른 8각 중대석에는 각기 다른 꽃무늬가 새겨진 방형의 안상(眼象)을 모각했고, 상대석은 하대석과 대칭을 이루고 있는 앙련(仰蓮)을 새겼다. 따로 탑신굄을 두지 않고 바로 연결된 원형의 탑신(塔身)에는 운룡무늬[雲龍紋]가 가득 있다.

용의 비늘과 수염은 굵은 선으로 세밀하게 묘사되었으며 도식화되었지만 힘차고 위엄있는 모습을 잘 표현했다. 8각 옥개석의 밑면에는 퇴화된 두공(枓)과 연목(椽木)이 모각되어 있다. 급한 경사를 이루다가 끝에서 완만해진 낙수면은 반전이 있는 선각으로 마무리되었고 각 모서리에는 용두를 양각했다. 보주만 있는 상륜부(相輪部)는 옥개석 위에 꽂혀 있는 형상으로 간략화되었다.

이 부도는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의 건강을 염려해 그가 입적하기 전에 미리 부도를 만들게 했다고 하므로 그가 입적한 해인 1405년(태종 5)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부도에서 원형의 탑신석은 고려초에 처음 등장했지만, 그뒤 보이지 않다가 고려말 중국에 유학했던 승려들의 부도에서 다시 유행했다. 따라서 원형 부도의 유행은 중국 사리탑의 영향을 시사해주는 것이며, 이 부도는 조선 초기로 이어진 고려말의 전통을 확인시켜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회암사지선각왕사비

회암사지에 있는 고려시대의 비. 보물 제387호. 높이 306cm, 너비 160cm. 1377년 건립. 이 비는 복고풍을 보여주는 것으로 중국 당나라의 비형식을 따르고 있다. 귀부는 매우 간략한 기법으로 조각되어 약간 추상적으로 보인다.

비문은 이색이 짓고, 글씨는 권중화(權仲和)가 예서로 썼는데, 비문에 따르면 이 비의 주인공인 선각은 고려말의 유명한 승려로 휘는 혜근, 호는 나옹, 초명은 원혜였으며 1320년(충숙왕 7)에 태어나 1377년(우왕 3) 신륵사에서 입적했다고 한다.

이수는 별도의 석재로 따로 만들지 않고 비신의 상단에 '선각왕사지비'라는 제액을 중심으로 쌍두룡을 조각했는데 매우 정밀하고 화려하다. 이와 같이 이수에 쌍룡이 조각된 것은 당유인원기공비(663)와 원각사비(1417)에서도 볼 수 있다.

회암사지쌍사자석등

회암사지에 있는 조선 초기의 석등. 보물 제389호. 높이 250cm. 이 석등은 회암사지부도 앞에 있으며 지대석과 하대석이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4각형의 지대석 위에 받침을 마련하고 그 위에 하대석을 표현했는데, 8엽의 단판복련을 돌렸으며 윗면 중앙에는 각형의 받침이 마련되어 있다.

회암사지부도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회암사지부도(조선), 보물 제388호, 및 쌍사자 석등, 보물 3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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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마리의 사자가 가슴과 배를 맞대고 앉아 앞다리와 머리로 상대석을 받치고 있는데, 사자의 조각은 통일신라시대와 매우 다른 면을 보여주며 갈기와 꼬리의 표현은 장식적인 느낌을 준다. 상대석의 밑면에는 1단의 받침이 있고 하대석과 마찬가지로 8엽의 앙련이 돌려져 있으며 윗면에는 높은 대가 있다. 화사석은 2장의 판석으로 되어 있는데 판석의 앞뒤로 둥근기둥을 조각하고, 돌 사이를 화창으로 이용했다.

옥개석도 4각형으로 밑면에는 목조건축의 옥개와 마찬가지로 평방과 뺄목, 그리고 모퉁이에는 추녀와 서까래를 모각했다. 낙수면의 합각부분에는 우동을 표현했고, 처마는 곡선을 이루고 있다. 상륜부는 복발과 보주로 이루어졌는데 옥개석과 같은 돌에 조각되어 있다. 이 석등은 화사석의 양식과 상대석에 조각된 연꽃이 청룡사보각국사정혜원융탑 앞에 있는 사자석등(1394)과 유사하여 조선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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